<천검지애 368화>
368화. 추적(2)
그들의 안가에서 반 마장 정도 떨어진 산속의 동굴에서 나온 운우각주와 소혈선은 조심스럽게 산 아래를 살폈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그녀들의 눈에는 안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미 다 죽었다는 말인가?]
싸우고 있다면 무기가 부딪치면서 생기는 소리가 들려야 했고 불꽃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안가는 이미 모두가 사라진 듯 조용하기만 했다.
[각주님, 전각이 무너진 것으로 보아 비밀 통로를 부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전각에 깔려 죽지 않았을까요?]
[그 정도에 죽을 놈이 아니다.]
이를 부드득 간 운우각주는 주위를 둘러보며 숨은 자가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소혈선을 보며 말했다.
[우선 도화전으로 간다.]
몸을 날려 사라지는 그들을 하늘에서 주시하고 있던 적설이 천천히 따라 날기 시작했다.
* * *
“사제(司祭) 일월신마, 교주님을 뵙습니다.”
“어쩐 일이냐?”
혈뇌와 바둑을 두고 있던 혈우대마종은, 공손히 인사를 일월신마를 보자 뭔가 짐작이라도 한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마종들께서 악불군에 대해 새로운 명을 원하십니다.”
“그놈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지, 왜 자네를 통하는지 모르겠군? 나와는 말도 하기 싫다는 건가?”
“모두 교주님을 두려워하십니다.”
“사부를 두려워하는 제자라……. 하긴, 내가 사부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좀 실수였던 것 같아. 악불군을 죽여야겠다고 하더냐?”
“그자가 지금 강호를 외유 중입니다.”
“그래서?”
“신비 조직과 싸우라고 했더니 오히려 본 교의 정보망을 부수고 있습니다. 거기다 새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신비 조직보다 본 교를 먼저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종들이 악불군을 죽이고 싶은 모양이구나?”
“너무 빠르게 거물이 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파들을 규합하는 속도도 빠릅니다. 더 두고 보다가는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 예상보다 너무 빨리 영향력을 키워 나가고 있긴 하지. 혈뇌, 네 생각은 어떠냐?”
혈우대마종은 바둑알을 하나 놓으며 물었다.
“혈뇌전에도 그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교주님 말씀대로 악불군의 무공의 발전이 너무 빠른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냈느냐?”
“물론 교주님께서 직접 나선다면 언제든지 제거가 가능하겠지만, 그 정도로 강해질 때까지 놔둘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것이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아직 결론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혈우대마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둘려 말했지만, 그 의미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혈뇌전에서도 후환이 되기 전에 빨리 제거하자고 결론을 내렸다라…….”
백 년 전 혈우대마종은 무적이었다. 아무리 당시 무림이 대단히 어지러운 혼돈의 상황이었다 해도, 단 한 명에게 전 무림이 농락을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무공은 예전보다 두 배는 강해져 있었다.
역사상 가장 강한 세력이었던 태양천마저 혈교를 건드리지 못한 것도 바로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런 그조차 지금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측천무후궁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의 정보에 의하면 태양천과 원나라가 결국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측천무후궁 때문이었다. 그들을 잡지 않고 세상을 정복해 봐야 똑같은 전철을 밟으리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악불군이 그 계집들의 정체를 밝혀낼 최적의 조건을 가졌는데, 이대로 제거한다면 좀 아깝지 않느냐?”
“얼마 전, 천무성궁의 장로 놈 하나가 신비 조직의 간세로 밝혀지면서 천무성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동안 무림인들이 그 계집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이젠 모두 믿고 있습니다. 특히 천무성궁에서 그 계집들의 단서를 찾고 있다 하니, 악불군이 없더라도 둘 간의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혈뇌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바둑판만을 쳐다보던 혈우대마종은 갑자기 돌을 판에 놓으며 말했다.
“쯧! 쯧! 아무리 봐도. 내가 진 것 같구나. 바둑이란 것이 상당히 미묘해서, 단 한 수만 실수해도 회복을 하기가 너무 어렵단 말이야.”
“…….”
일월신마와 혈뇌는 감히 답을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혈우대마종이 결정을 머뭇거리는 것은 그만큼 어느 것이 좋을지 판단이 매우 힘들다는 방증이었다.
“그래, 사대마종이 모두 원한다면 들어주는 것이 좋겠지. 일월신마.”
“예, 교주님.”
“죽이든 살리든 재량에 맡긴다고 전해라.”
“존명!”
일월신마가 나가자 혈뇌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교주님, 저는 교주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다.”
“그런데 왜?”
“혈뇌전에서 격론이 벌어졌다는 것은, 악불군을 죽이자는 의견이 다수였다는 의미가 아니더냐?”
“아직 어립니다.”
“아니, 그들이 어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늙은 것이다. 마종도 이제 나이가 들 만큼 들었다. 곧 그 아이들의 세상이 될 텐데, 내가 계속 그 아이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교가 발전하는 데 안 좋을 수도 있다.”
“……소신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동안 악불군을 이용하기 위해 그냥 두고 보던 측천무후궁과 혈교가 결국 악불군을 제거하기로 결정 내렸다.
향후, 이 결정이 무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백설의 등에 담수련과 함께 탄 악불군은 적설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담수련이 납치되자 흑석영은 악불군의 명에 따라 백설을 풀어 주었다. 담수련이 움직이는 곳을 적설이 따르고 있었고, 백설은 적설과의 감응이 악불군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나서 악불군이 쫓아갔던 안가까지 쉽게 찾아왔었다.
지금도 악불군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적설을 쫓아 달려 주고 있었다.
“피곤하시면 잠시 기대어 주무십시오.”
담수련을 품에 꼭 안다시피 한 채 고삐를 잡고 있던 악불군은, 그녀가 피곤해하자 좀 더 꼭 껴안으며 말했다.
악불군의 가슴에 빰을 대고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작게 말했다.
“소군 품에 있으면 피곤하지 않아.”
“…….”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말은 밤 눈이 어두워 어두운 곳에서는 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백설은 어두운 밤, 숲임에도 평지 달리듯 적설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렸을까…….
이미 날은 밝았다.
“으음…… 소군.”
깜빡 잠이 들었던 담수련은 악몽이라도 꾼 듯 몸을 떨면서 눈을 떴다.
“저, 여기 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목소리가 들리자 안심이 된 듯 그의 팔을 당겨 자신의 몸을 꼭 껴안게 했다.
“내가 잠들었었네? 얼마나 잤어?”
“두 시진 조금 못 미치게 주무셨습니다.”
“소군도 피곤할 텐데…….”
담수련이 미안한 듯 말하자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원래 잠을 잘 안 자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아가씨, 적설이 멈췄습니다.”
“이들이 간 곳이 측천무후궁일까?”
“글쎄요? 그렇기를 바라 봐야지요.”
다시 반 시진 정도 달린 후, 악불군은 백설에게서 내렸다.
“아가씨, 앞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잠시 가 보고 올 것이니 백설에게서 내리지 마십시오. 적설도 아가씨를 호위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백설의 안장에 달린 대나뭇가지들을 빼서 그녀의 주위에 진을 설치했다.
* * *
도화전주는 소혈선만 대동하고 나타난 운우각주를 보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맞았다.
“각주님,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도화전주의 말에 운우각주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담수련을 납치하면서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소혈선의 말에 도화전주의 눈이 더욱 커졌다. 섬전천후단의 단주인 소혈선의 무공은 내부 영주 열 명과 싸워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강했다. 거기다 운우각주 역시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도망쳐 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의 무공이 그렇게 강했습니까?”
“우리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살수공을 사용했는데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천륭검보의 검법만 알고 있는 자가 아니었어.”
“천후님께서 이 사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듯하던데, 실패했다니 큰일이군요.”
도화전주 역시 운우각주를 도우라는 명을 받은 터였다.
“담수련이 효녀라서 담무룡의 생명을 두고 모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은 도대체 누가 한 거냐?”
운우각주의 분통에 찬 목소리에 도화전주와 소혈선은 답을 하지 못했다. 운우각주의 산하인 운우전에서 분석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운우각주 역시 그것을 몰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각주님, 우선 천후궁에 보고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화전주는 상황이 매우 다급한 것을 느낀 듯 급히 물었다.
“아직 예정된 시간이 남아 있다.”
“대동하셨던 섬전천후단까지 모두 잃을 정도라면, 지금 있는 인원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남과 섬서에 있는 외부 영주와 수하들을 모두 소집해라.”
“각주님, 잘못해서 하남과 섬서의 정보망을 모두 잃게 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도화전주의 말에 운우각주는 대로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가 감히 내 명에 토를 다는 것이냐! 당장 시행해라.”
운우각주는 이대로 돌아간다면 어차피 살아남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까지 동원할 생각이었다.
더구나 도화전주는 각주의 명을 거역할 지위가 되지 않았다.
“어디로 모이라고 할까요?”
“삼 일 후, 대룡현으로 모인다.”
“은화의 정체도 밝혀졌을 텐데 가능할까요?”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도화전주가 나가자 소혈선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각주님, 천후님께 일어난 상황을 모두 말씀드린다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 목숨은 어떻게 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동안 내가 쌓아 온 모든 공은 그대로 사라질 것이다. 너 역시 섬전천후단의 단주직에서 쫓겨날 게다.”
운우각주의 말에 소혈선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 역시 조금의 실수도 용서치 않는 천후의 냉정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악불군이었다. 운우각주의 기를 기억한 덕에 아주 쉽게 이곳까지 잠입할 수 있었다.
‘계획과 다르게 일이 진행되는군.’
악불군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담수련의 계획은, 이들이 담무룡이 갇혀 있다는 궁으로 퇴각하면 안으로 잠입해 그를 구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 역시 악불군이 담무룡의 기를 기억하기에, 이곳에 있기만 하다면 찾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운우각주가 끝까지 담수련을 납치할 야욕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담무룡을 이용해 담수련을 협박한 행태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모두 죽이고 싶었지만 악불군은 뒤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 * *
“어떻게 됐어? 아버님 계셔?”
악불군이 돌아오자 초초하게 기다리던 담수련은 다급히 물었다.
“그게 예상과는 좀 다르게 됐습니다.”
“어떻게?”
“그게…….”
악불군은 자신이 들은 대화를 모두 전했다.
“대룡현으로 모이라는 말은 거기서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말이겠네?”
“그럴 것 같습니다.”
“하남과 섬서의 외부 영주와 그 수하들을 모두 소집한다면, 그들만 제거하면 최소한 하남과 섬서는 안전해진다는 의미잖아?”
“그렇긴 하지만, 가주님을 구하는 일이 어긋나게 됐습니다.”
담수련은 고통스러운지 표정이 침통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소군, 우리의 계획대로 안 된 것은 어쩌면 아버님의 업보일지도 몰라. 조금 더 늦어질 뿐, 우리의 정성이 닿으면 구출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은 괴롭다는 것을 알기에 악불군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제가 반드시 가주님을 구하겠습니다.”
그때 십여 마리의 전서구들이 악불군 앞으로 날아내렸다.
“웬 전서구지?”
담수련은 의아한 듯 물었다. 분명 악불군이 뭔가를 했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적설에게 전서구가 뜨면 이쪽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게 돼?”
“저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적설이 새를 조종할 수 있더군요.”
순간 뜻밖의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는 듯, 담수련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