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69화>
369화. 모여드는 군웅들(1)
일대일 결투에서는 누가 강하냐가 승패를 좌우했다. 하지만 조직 간의 전쟁에서는 누가 정보를 더 많이 아느냐가 승패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림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정보 전달 수단인 전서구를 마음대로 불러 내용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얘기를 왜 지금 해?”
“저도 안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최근 아가씨께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미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우선 전서에 어떤 내용이 있나 보자.”
“예.”
전서를 펼치자 비문이 적혀 있었다.
“다행히 똑같은 비문을 사용하네.”
천후의 밀지를 해석한 적 있는 담수련이기에, 전서의 비문 역시 밀지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즉각 알았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전부 같은 내용이야. 그들의 총단으로 보내는 전서가 있었으면 기회가 될 수 있었는데, 이중엔 그런 게 없네.”
“그럼 풀어 주겠습니다.”
“응.”
악불군이 풀어 주자 다시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른 전서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룡현에서 그들을 잡고, 각주라는 여인만 놓아 주자. 이번에도 실패하면 총단으로 갈 거야.”
담수련은 운우각주가 지금까지 만났던 측천무후궁의 어떤 인물보다 고위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좀 빨리 갈 것이니 꽉 잡으십시오.”
“내가 잡는 것보다는 소군이 나를 꼭 안아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녀가 말하며 가슴에 폭 안기자, 악불군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꽉 껴안아 주었다.
“백설아! 최대한 빨리 가자.”
그러자 드디어 마음껏 뛰게 된 것이 신난 듯, 백설은 땅을 박차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가주님, 정천보가 구천마성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입니다.”
총관 서절갑의 보고를 들은 화우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를 배신까지 하며 화룡세가를 접수했을 때는 당장 남무림을 장악하고 담수련을 데리고 올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계획과는 너무 달랐다.
주위 모든 세력들이 떠받들어 주던 오룡세가 시절과 달리,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거기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구천마성은 너무 강했다.
이미 네 번의 싸움이 있었지만 네 번 모두 패했다.
아버지 화정무의 심복들은 여전히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가 새롭게 뽑은 친위 세력들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던 화우성은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추 군사는 어디에 있느냐?”
“…….”
서절갑은 당황한 표정으로 답을 하지 못했다.
“추 군사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가, 가주님께서 연금(軟禁) 명령을 내리셔서 지금 자신의 침소에 갇혀 계십니다.”
화우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사건건 그와 의견 충돌을 벌이면서 가두라 했던 것이 생각 난 것이다.
“내가 홧김에 한 말이거늘, 진짜로 연금시켰단 말이냐?”
“그, 그게…….”
화우성은 당시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추설붕을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주위의 만류와 군사인 그가 없으면 당장 대처할 방법을 마련하기도 힘들다는 판단에 겨우 연금으로 대처한 것이었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라. 그리고 정 군사도 함께 불러라.”
“예!”
서절갑이 나가자 화우성은 다시 술을 입에 부었다. 계속되는 좌절에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사라진 담수련까지, 그를 너무 괴롭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는 아직 악불군과 담수련이 천호방주와 담 군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화룡세가의 정보망이 완전히 와해됐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초췌한 표정의 추설붕과 정우택이 안으로 들어섰다.
“군사들은 정천보가 구천마성에 습격을 당했다는 보고는 받았소?”
“받았습니다.”
정우택이 대답하자 화우성은 추설붕을 보며 물었다.
“추 군사는 왜 답이 없으시오?”
“소가주님, 잠룡세가와 마룡세가 그리고 태룡세가까지 모두 멸문했습니다. 본 가 역시 지금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 상황입니다.”
소가주라는 말에 화우성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그가 여전히 그를 가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가의 모든 힘이 굳건하게 뭉쳐야 합니다. 가주님을 풀어 주시고 두 분이 힘을 합치십시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분열된 상태로는 정천보뿐 아니라 본 가도 오래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정천보를 화우성이 맡아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 화룡세가 전체를 그쪽으로 옮기는 것이 추설붕의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화우성의 반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꼬인 상태였다. 화정무가 없는 세가를 화우성은 비울 수가 없었다.
구심점이 없는 정천보는 반란 소식까지 전해지자 심히 위축되면서, 기존에 확보했던 영역까지 구천마성에 빼앗기기 시작했다.
더욱이 화룡세가의 최고 전력인 원로들이 여전히 화정무의 심복들이니 그들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주의 위엄이 사라진 탓이었다.
화우성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추설붕, 진정 나를 끝까지 따르지 않을 생각이냐?”
“소가주님을 제가 얼마나 아끼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전 가주님과 소가주님의 수하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본 가가 존속하느냐 멸문하느냐의 기로입니다. 가주님께서도 소가주님께서 마음을 바꾸신다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지로 화우성은 화룡세가의 절기인 창천화룡검식을 극성까지 익힌 최고의 고수였으니, 조금의 전력도 아쉬운 지금 그를 벌 줄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추설붕을 노려보던 화우성은 간신히 화를 누르고는 정우택을 보며 물었다.
“정 군사, 네 의견을 말해 봐라.”
“가, 가주님.”
“왜 말을 더듬어? 군사로서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말해 보라는 거다.”
“지금 구천마성은 지속적으로 본 가를 도발하고 있습니다. 아직 대대적인 공격은 없지만 모든 지역이 안정화되면 검날을 본 가로 향할 것은 명확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을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대비책을 말해 봐라.”
“추 군사님의 의견대로 전대 가주님을 풀어 주시고 세가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오룡세가 중 하나인 본 가가 어찌 구천마성 하나 당해 내지 못하고 이리 쩔쩔맨다는 말이냐?”
“태양천에서는 본 가의 힘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을 막아 왔습니다. 대신 힘에 부치는 일이 생길 경우 어찰단을 이용해 저희를 도와주었습니다. 하나 지금은 본 가를 도와 줄 세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때, 나찰 같은 형상의 거구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군사라는 것들이 패배주의에 빠져 나약한 말만 골라서 하는구나!”
“부 호법.”
대력천강부 부응철은 화룡세가의 무력 집단을 통솔하는 무력 호법으로, 화우성의 최고 조력자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화정무를 따르는 수하들의 반란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화우성이 전권을 장악한 후, 한 달가량 외유를 나갔었다.
“잘 계셨습니까?”
“어찌 지금에야 온 것입니까?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구천마성의 힘이 강력하여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느라 그랬습니다.”
“그래 찾으셨습니까?”
화우성은 처음으로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반문했다.
“세상에 대처할 방법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의 호언에 추설붕과 정우택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들도 여러 가지 방법을 고심했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방법을 찾는다면 구천마성에 굴복하거나 구천마성과 맞먹는 세력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화정무나 화우성은 죽으면 죽었지 굴복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맞먹는 세력은 무림맹 정도인데, 화룡세가를 부역 세력으로 지정하고 일순위로 멸문시킨다고 공지한 그들이 도움을 줄 리는 만무했다.
“방법을 말씀해 보십시오.”
화우성의 말에 부응철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가주님, 혈교라고 들어 보셨지요?”
“혈교와 신비 조직에 대한 소문이 무림에 무성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제가 혈교와 접촉했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구천마성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의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 정도라면 무림맹보다 더 강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보아도 무방합니다. 제가 본 가의 상황에 대해 의논했는데, 그들이 본 가를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안 됩니다!”
듣고 있던 추설붕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반대했다.
“안 된다는 이유가 뭐냐?”
부응철은 추설붕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혈교는 천녀마교의 잔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과 연계한다면 필시 뒤통수를 맞을 것입니다.”
“지금 세가 자체가 존속을 걱정할 상황인데, 후일 뒤통수 맞을 것을 걱정해서 도움을 거절한다는 거냐?”
“그들이 그냥 도와줄 리는 만무합니다. 조건이 뭡니까?”
“간단하다. 무림맹과 전쟁이 벌어질 시 도움을 주고, 혈교가 무림을 장악할 경우 화룡세가는 남무림만을 지배하며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약조만 하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것을…….”
“추 군사! 더 이상 입을 열지 마시오.”
추설붕의 입을 막은 화우성은 부응철을 보며 다시 물었다.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까?”
“정천보 근처에 버티고 있는 구천마성을 광동으로 모두 쫓아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가주님께서 혈교와의 연합을 동의한다는 서류에 장인만 찍으시면 당장 움직이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구천마성을 멸문시켜 남무림을 전부 화룡세가에 맡기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화우성은 입술을 잘근 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본 가는 혈교와 연합합니다.”
화우성이 결정하자 추설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허허! 천년마교가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데 그들의 잔당과 연합한단 말인가……. 화룡세가는 결국 이백 년을 못 넘기고 망하는구나…….’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파멸의 늪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추설붕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 *
“측천무후궁이라고?”
악불군의 호출에 달려온 소걸아는, 신비 조직의 이름이 측천무후궁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측천무후가 세운 조직이라면 육백 년이 넘는 조직이라는 말인데, 지하에 숨어서 그 긴 기간을 버텼다는 사실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 조금씩 그들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네 활약이 아주 중요해.”
자신의 활약이 중요하다는 말에 소걸아는 기분이 좋아진 듯 어깨에 힘을 주며 물었다.
“몇 명이나 모아야 할 것 같냐?”
“그들의 외부영주 중 한 명이 지금 천호방에 있다.”
“누군데?”
“적동마수.”
“뭐? 일개 외부 영주가 백대고수 중 하나인 적동마수라고?”
“그분 얘기가 자신은 외부 영주 중에서 상당히 강한 편이라고 했으니까, 모든 외부 영주가 그렇게 강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절대 만만한 실력은 아닐 거야.”
“적동마수보다 약하다 해도 최소한 비슷할 건데, 그런 자들이 만약 열 명 이상이면 최소한 백 명은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되겠냐?”
“본 방과 소림은 이미 혈맹지약이고 가까우니까 인원을 보내 줄 거야. 내가 지휘하는 천강개도 백 명은 되고.”
“내가 알아보니까 대룡현이 섬서 안에 있더라.”
“아무래도 화산에도 얘기는 해야겠지?”
“얘기만으로는 부족하다. 화산에서도 최소한 삼십 명 정도의 제자들을 보내 달라고 말해 봐라.”
“알았다. 되건 안 되건 말은 해 볼게. 너는 대룡현에 오 일 후에 도착하도록 해라. 아무리 빨라도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
“정확히 오 일 후에 도착하도록 하마.”
“그때 보자!”
소걸아는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낀 듯, 한마디 하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드디어 막막하던 적들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디까지일까?’
악불군은 소림사에서 기연을 얻은 후, 하늘이 자신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임무가 구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