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71화>
371화. 드러나는 실체(1)
[예상에서 전혀 벗어나지를 않네?]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었다. 지도를 자세히 살핀 담수련은, 우운각주가 기습해 올 장소가 대룡현이 아니라고 얘기했었다.
그러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지적했는데. 바로 악불군이 찾아낸 삼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소군, 그런데 소걸아 소협은 와 있어?]
[예. 조금 전에 감지했습니다. 생각보다 꽤 많이 불러 왔더군요.]
[그럼, 계획대로 되겠네?]
[아가씨께서 세운 계획인데 계획대로 안 될 리가요.]
악불군의 칭찬이 기분 좋은지 담수련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금 그녀는 남장을 하고 악불군의 옆에서 백설을 타고 있었다.
[사화는 위험하지 않겠지?]
단수련은 살짝 마차 쪽을 보며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마차에는 사화가 무기를 든 채 적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의 사화가 아닙니다. 요새 많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차의 기관이 있지 않습니까?]
[하긴 소군이 그렇게 매일 수련을 도와주었는데 안 늘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리고, 령매도 다치면 안 되는데?]
동정어은이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담수련이 걱정 말라며 데려왔기에 더욱 걱정하는 것이었다.
[최 호법이 잘 보호할 겁니다.]
말하던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공격 시작하는 거 같아?]
[아가씨, 양옆을 좀 보시겠습니까?]
[왜?]
[아무래도 진이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악불군이 감지한 기의 숫자가 너무 적어 의아해하던 그녀였다.
[내가 이자들도 진을 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소군 말이 맞아. 미혼진의 일종으로 은신진이야.]
[그래도 아가씨보다는 실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가르쳐 주신 진은 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이 진은 기가 새어나오네요.]
말을 마친 악불군이 수하들 모두에게 적의 공격이 임박했으니 준비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 * *
‘정말로 정면 대결을 한다면, 선봉을 천후궁이 서야 한다는 의미인데…….’
측천무후궁에서 돌아온 천후는 고심에 빠져 있었다.
측천무후가 결정한 전쟁이 시작된다면 무림을 책임진 천후궁의 피해가 가장 클 것은 자명했다.
삼 후가 같은 지위라고는 하지만 역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세력이 클수록 발언권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다.
“천후님, 도화각주님께서 배알을 청하셨습니다.”
호위대장의 보고를 들은 천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갑자기 왜?”
“담수련 건 때문에 보고드릴 일이 있다고 합니다.”
“담수련은 운우각주가 책임지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합니다.”
천후의 아미가 꿈틀했다. 직감적으로 안 좋은 보고라는 느낌이 온 것이다.
“들어오라고 해라.”
얼굴에 가면을 쓴 도화각주가 들어서자 천후는 비스듬히 눕듯 자세를 바꿨다.
“도화각주, 천후님을 뵙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하남의 도화전주로부터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아무래도 천후님께서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달려왔습니다.”
“보고해라.”
“운우각주가 담수련의 납치를 실패한 모양입니다.”
“실패? 운우각주까지 갔는데 무공도 제대로 못 하는 계집 하나 납치하는 것을 실패했다는 말이냐?”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운우각주가 데리고 간 수하들과 소혈선이 이끄는 섬전천후단까지 모두 잃고 둘만 간신히 하남 도화전으로 도망을 왔다고 합니다.”
놀란 듯 벌떡 일어난 천후는 곧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담수련 그 계집이 경고를 잊고 악불군에게 말한 모양이군. 그런데 천호방이 그렇게 강하다고?”
운우각주와 같이 간 전력은 작은 문파 하나를 하룻밤에 멸문시킬 정도의 전력이었다. 거기다 운우각주와 소혈선을 합친다면 중견 문파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더 있습니다.”
“뭐냐?”
“운우각주가 하남과 섬서의 외부 영주와 산하 수하들을 모두 소집했다고 합니다.”
도화각주의 말에 천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어이 담수련을 잡아 오겠다……?”
천후는 운우각주가 무슨 생각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만약 실패하면 하남과 섬서의 정보망에 큰 구멍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도화각주가 위험성에 대해 말했지만 천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일각쯤 지났을까…….
천후의 입이 다시 열렸다.
“놔둬라. 만약 그렇게 하고도 실패한다면 죽을 각오겠지. 어차피 궁주님께서 전략을 바꾸셨다. 이렇게 된 이상, 천후궁이 궁주님의 뜻을 가장 먼저 따른 것으로 포장해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게 무슨?”
천후가 분명 벼락같이 화를 낼 것으로 예상했던 도화각주는 뜻하지 않은 반응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기향이도 이제 바꿀 때가 됐다. 그동안 너무 실패가 많았어.”
기향은 운우각주의 이름이었다. 운우각주는 분명 측천무후궁에서 대단히 높은 지위였다. 하지만 천후에게는 언제든지 쓰다 버릴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차가운 천후의 말을 들은 도화각주는 급히 이마를 바닥에 대며 머리를 조아렸다.
* * *
측천무후궁의 공격은 실로 대단했다.
단번에 선두와 마차의 사이가 끊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선두와 후위를 외부 영주가 이끄는 측천무후궁의 수하들이 공격했다.
‘예상보다 거세군.’
순식간에 십여 명의 적들을 제거한 악불군은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그를 향해 암기가 날아들었다.
타타타닥!
하지만 악불군의 주위에 검막이 만들어지며 모든 암기들은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러자 삼십여 명의 여인들이 악불군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마차를 근접 호위하던 잠봉단과 함께 적들과 싸우던 사효조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엄청난 기운에 급히 몸을 피했다.
오랫동안의 살수 경험이 아니었다면 아마 느끼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는 강한 공격이었다.
연이은 공격에 사효조는 버티지 못하고 계속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공격한 자는 소혈선이었다.
가장 강한 사효조가 마차에서 떨어지자,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잠봉단을 향해 또다시 강력한 공격이 쏟아졌다.
그러자 잠봉단원들은 싸우지 않고 급히 후위로 도망을 쳤다. 공격하던 측천무후궁의 궁도들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쉬익!
드디어 마차의 경계가 무너지자 운우각주가 마차로 날아갔다.
퓩! 퓩! 퓩! 퓩! 퓩……!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에서 사방으로 화살이 튀어나갔다.
담수련이 담무룡에게 부탁해 만금을 들여 제작한 마차의 효능이 처음으로 발휘된 것이다.
“이익!”
어깨에 화살을 맞고 뒤로 물러선 운우각주는 침음성을 터뜨리며 화살을 뽑았다.
그녀의 무공에 화살을 못 피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지만, 마차를 설계한 사람이 바로 담수련이었다. 그녀는 누구라도 마차를 노렸을 때 피할 수 없는 방향을 잡아 화살을 설치한 것이다.
화살 공격에 열 명 가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본 운우각주는, 잠봉단이 공격을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정에 빠뜨린 것을 직감했다.
운우각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예 마차를 부숴 버린다면 쉬웠다. 하지만 담수련을 다치지 않게 납치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가 잠깐 머뭇거리는 동안 상황이 변해가고 있었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싸우는 난전(亂戰)은 고수들도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실수하면 오히려 아군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호특별단과 천호사기단에서 골라 뽑은 호위들은 나름 천호방의 정예들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외부 영주들보다 약했다. 하지만 수하들은 그들과 비슷한 무공 수준이었다.
특히 그들은 난전이 벌어졌을 경우를 상정한 수련을 추명혼에게 집중적으로 받았는데, 그것이 큰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드디어 소걸아가 이끄는 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하고 말았다.
‘우리가 기습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누가 있어 이렇게 완벽하게 상황을 읽을 수 있었던 거지?’
운우각주는 전력을 끌어올렸다. 더 밀리기 전에 다시 한번 반전을 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공격을 하지 못했다. 마차 곳곳에서 이상한 통이 튀어나오더니 그녀를 겨냥한 것이다.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공격을 멈칫하기에는 충분했다.
“악 방주! 이걸 혼자 다 죽인 거야?”
악불군의 옆에 떨어진 소걸아는 주위에 쓰러져 있는 사십여 명의 시신을 보며 놀란 듯 물었다.
“조금 늦었다.”
“무슨 소리야? 난 담 군사님께서 말해주신 대로 정확히 왔는데?”
“일다경(一茶頃) 늦었어.”
“야! 그 정도야 봐줘야지!”
“그 정도 때문에 수하들이 열 명 이상 더 죽을 수도 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운우각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덕분에 악불군에게 인사하려고 다가왔던 소걸아는 뜻하지 않게 소혈선을 직접 상대하게 되고 말았다.
“악 방주, 이 여자는 나한테 너무 강한데!”
척 보기에도 대단한 기운을 풍기는 소혈선을 본 소걸아는 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악불군은 마차에 도착해 있었다.
“다치신 모양입니다.”
악불군은 운우각주의 어깨에서 피가 보이자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놈이 악불군이구나?”
“절 처음 보셨습니까? 하긴, 측천무후궁에서 저를 본 자들은 모두 죽었지요.”
“네, 네가 본 궁의 이름을 어떻게?”
“담 군사에게 말해 주셨다고 들었는데, 건망증이 심하신 모양입니다.”
악불군의 비아냥에 운우각주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궁의 이름은 극비 사안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을 완전히 잡았다고 생각한 그녀가 실수로 말한 것이었다.
“본 궁에 적대한 자들 중 살아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거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한테나 통하는 말이지요. 솔직히 전 죽고 살고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쁜 자들은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운우각주는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마차를 흘낏 보더니 공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도화전주와 그 수하들이 운우각주의 앞에 섰다.
[각주님, 우선 피하십시오. 이미 틀렸습니다.]
운우각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치아가 작게 부서질 정도였다.
[부탁한다.]
운우각주도 다 틀렸다는 것을 직감한 듯, 간단하게 한마디 하고는 몸을 날렸다. 동시에 도화전주와 그 수하들이 악불군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운우각주는 악불군이 일부러 도망가도록 용인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 *
싸움이 끝난 후의 광경은 매우 참혹했다.
사십여 명의 나한승을 이끌고 온 소림사의 십팔나한과 삼십여 명의 제자들을 몰고 온 화산의 운양자와 운성자 역시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들과 개방의 천강개까지 합치면 이백 명이 넘는 수였다. 여간한 무림 세력보다 더 강한 전력이었건만 측천무후궁의 수하들은 대단히 강했다.
그들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지독함마저 보여주었다.
더욱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외부 영주들이었다. 대부분 무림에서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고, 심지어 그중 두 명은 정파의 명숙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무량수불! 이들이 이렇게 무서운 자들인 줄은 몰랐습니다.”
운양자의 말에 혜초 대사 역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받았다.
“자진한 자들도 여러 명입니다. 정녕 이들이 천하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면, 무림은 풍전등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림사와 화산에 측천무후궁의 위험성을 알려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담수련의 계획이 이번에도 성공한 듯했다.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소걸아가 다가와 묻자 혜초 대사는 반장을 하며 말했다.
“이들의 힘이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실로 악 방주께서 엄청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도 처음에 이들의 진면목을 알고는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악 방주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 싸움이 절대 한 세력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빈 승도 악 방주를 열심히 도울 것입니다.”
“화산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소걸아 시주.”
“예, 대사님.”
“악 방주께서 안 보이시는데 어찌 된 겁니까?”
“대사님과 도장님께 인사를 못 해 죄송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고는, 도망간 적을 쫓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적을 쫓아갔다는 것입니까?”
“예.”
“허허허! 진정한 영웅이구료. 아미타불!”
혜초 대사는 진정으로 탄복한 듯 불호를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