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73화>
373화. 시작(1)
“죽이라고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깜짝 놀란 듯 반문했다.
결국 운우각주가 담무룡이 갇혀 있다는 궁이란 곳으로 가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자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던 담수련이 드디어 내린 결정이았다.
한데 그 결정이 너무 뜻밖이었다.
“응, 죽이는 것이 아버님의 안전에 더 나을 것 같아.”
“왜 그렇게 판단하셨습니까?”
“사실, 이번 외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놔두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기다리면 그들의 총단을 발견할 수도 있고. 하지만 우리의 계획이 좀 늦어지더라도 아버님 안전을 먼저 생각하게 되네. 나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가주님의 안전은 제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런데 이들을 죽인다면 오히려 가주님께서 위험하시지 않을까요?”
“그들이 서찰에 말한 대로 실행한다면 시간상 늦었어. 이젠 아버님을 해치는 것보다 살려 두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어야 해.”
담수련의 새로운 계획은 악불군을 반드시 이용해야 할 필수적인 인물로 그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악불군이 필요하면 담수련을 회유해야 하고, 그렇다면 담무룡을 죽이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된다.
“무슨 의미이신지 알겠습니다.”
“이들은 교묘하게 죄 없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어. 죽일 자들만 골라서 죽일 수 있겠어?”
측천무후궁의 심법은 정파의 심법과 굉장히 비슷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소림사의 승려들이 풍기는 기와도 비슷하고 무당파의 도사들이 풍기는 기와도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악불군이 그들의 기를 감지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였다. 그러나 소림사에서 기연을 얻은 후, 악불군은 어떤 기에도 다름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법마다 기를 흡수하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같은 심법을 익힌 동문들조차도 미세하게 달랐다.
“걱정 마십시오. 예전에는 그들의 기를 구별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 * *
삼경이 넘어가는 시간.
자정부터 세찬 바람과 함께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내리고 있었다.
현학장에 스며든 악불군은 생각 외로 경계가 철통같음을 느꼈다.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모든 전각의 지붕 위에는 경계를 서는 무인들이 두 명씩 있었다.
‘제거하기 더 쉽겠군.’
침입자에게 경계를 서는 무인들이 많다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악불군은 도리어 잘됐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약한 기를 감지해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보다는 이처럼 눈에 띄게 있는 것이 더 편하고 시간을 단축시켜 주기 때문이었다.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악불군의 은신술은 신경에 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더욱이 시끄럽게 내리는 빗줄기는 그를 감추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 * *
운우각주의 방은 여전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각주님, 어제 너무 힘드셨을 텐데 조금이라도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우각의 총관인 두진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지금 잘 처지더냐? 섬서에서는 아직 아무 보고도 없느냐?”
“예, 지급으로 알아 오라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설마, 소혈선과 도화전주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단 말인가…….”
“두 분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데요? 분명 피하셨을 것입니다.”
“악불군의 무공을 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구나.”
“그렇게 강했습니까?”
“우리의 정보에 큰 문제가 있었다. 악불군의 무공은 우리가 예측한 것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높았다.”
“그렇게 무공이 높다면 이번 계획도 쉽게 볼 수 없겠습니다.”
“그래, 내가 실패한 이유도 바로 너무 얕보았기 때문이다. 이젠 더 이상 그런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양민들을 이용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우르르릉!
그때 번쩍하는 빛과 함께 천둥소리가 울렸다.
“오늘 밤은 날씨가 굉장히 거칠구나?”
“비가 올 시기가 되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장주님께서 자꾸 각주님을 찾으십니다.”
“왜?”
“공자님과 작은 마님께서 혼인하신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아기 소식이 없다고, 각주님께서 좀 공자님께 말씀을 드렸으면 하는 눈치셨습니다.”
“딸이었어야 했는데, 쯧!”
진소일은 운우각주의 친아들이었다. 딸일 경우 자연스레 측천무후궁에 가입할 수 있지만 남자들은 불가능했다.
운우각주는 물론 모든 측천무후궁의 여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자식이라 할지라도 남자일 경우 이용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충성심이 강하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그들이었지만 친자식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운우각주는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지만, 그동안 많은 궁도들이 명령에 따라 남편이건 자식이건 죽여야 했다.
“내일은 장주님과 한번 만나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분명 운우각주는 자신의 남편인 진규웅을 사랑해서 혼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자식까지 낳으며 오랜 시간 부부로 살아왔기에 그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알았다. 요즘 내가 너무 바빠 좀 소홀히 하긴 한 것 같구나. 내일 만나 보지.”
“쯔쯧! 내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운우각주와 두진향은 후다닥 몸을 일으키더니 경계 태세를 갖췄다.
“누구냐!”
“얼굴이 참 착하게 생기셨는데 뭐하러 괴기하게 생긴 가면으로 가리고 사십니까?”
스르르 나타나는 한 청년, 운우각주는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수 있었다.
“아, 악불군……?”
“열심히 도망을 치시기에 어디 쥐구멍 같은 데로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좋은 곳에 사시네요?”
“네, 네가 여, 여길 어떻게?”
운우각주의 경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습니다. 무공이 쓸 만한 자들은 모두 제가 제거하고 왔으니까요. 그 외의 사람들이 몰려든다면 그건 그저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 신세밖에 안 됩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수하들까지 다 죽이실 행동은 안 하시겠지요?”
“이곳을 어떻게 안 것이냐?”
“당연히 당신을 따라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꽤 많습니다. 당신을 추격한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일 중의 하나이긴 하지요.”
“날 죽이러 온 것이냐?”
“수하들이 다 죽었는데 혼자만 사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다지 좋은 수장은 아니시군요?”
“지금 네놈의 이런 경솔한 행동으로 인하여 담무룡이 살가죽이 벗겨지고 불에 타는 고통을 받으며 죽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죽어 갈 수도 있겠지만, 각주님이 죽음으로써 오히려 살아나실 확률이 더 높아질 수도 있겠지요.”
“……네가 무서워서 내가 피했다고 생각하느냐? 난 너를 죽이지 말라는 명 때문에 피한 것뿐이다.”
“정말 강하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검을 들어 그녀를 향했다.
순간 운우각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악불군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기.
그녀는 이런 검기를 경험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검후와의 비무 때였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검기를…….”
운우각주는 자신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검후에게 그녀는 십 초를 버티지 못했다.
[두진향, 싸움이 시작되면 너는 곧장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쳐라. 악불군의 무공이 검후와 맞먹고 추적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말을 반드시 위에 알려야 한다.]
운우각주의 전음을 들은 두진향은 자신이 막을 테니 각주님이 피하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러기에는 사안이 너무 엄중하다는 생각이 들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둘만의 생각이었다.
두진향은 무엇인가 가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너무 빨라 눈을 뜨고도 무엇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운우각주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검 끝은 여전히 그녀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진향은 가슴이 갈라진 채 앞으로 엎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쾌검에 그녀는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두진향까지 죽은 이상, 나라도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저놈의 위험성을 궁에 알리지 않는다면 대계에 큰 장애가 될 거야.’
운우각주는 전력을 다해 악불군에게 선공을 펼쳤다. 그러자 검환이 방안을 꽃피듯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금환삼십육검은 사백 년 전 검신으로 불리던 금환여제의 독문 무공으로, 당시 적수가 없었다고 알려진 무적의 검식이었다. 그런데 그 검식이 지금 운우각주에 의해 펼쳐진 것이다.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이한 검의 현란함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악불군의 검환이 하나씩 만들어 내는 그녀의 움직임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놈, 걸렸다!’
이미 그녀의 머리에서 악불군을 죽이지 말라는 명은 사라져 있었다.
운우각주는 아직 삼십육 개의 환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덟 개의 환도 제대로 받아 내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형성된 환은 무려 열여덟 개였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 만든 것이었다.
그녀가 검을 내리자 열여덟 개의 환이 악불군을 향해 쏟아졌다. 작은 방 안에서 쏟아지는 열여덟 개의 환을 피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피할 방법은 없지만 파할 방법은 있었다.
악불군의 자세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소림사에서 천불상의 기연 이후 그의 움직임은, 괴상한 느낌은 사라지고 마치 검무를 추듯 유연하게 변해 있었다.
“금환삼십육검을 네가 어떻게…….”
악불군은 그녀가 만든 열여덟 개의 환을 마치 물방울이 깨뜨리듯 모조리 부수고는 그녀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지금 검식이 금환삼십육검이군요? 어쩐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삼십육 개를 전부 만들었다면 저도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운우각주는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는 악불군의 목소리를 들으며 더욱 분노했지만, 이미 욕할 힘도 사라진 터였다.
악불군이 검을 뽑자 운우각주는 그대로 쓰러졌다.
‘장원이 내일이면 발칵 뒤집히겠군…….’
죽은 여인들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현학장의 주인이 부인을 비롯해 삼십 명이 넘는 시체를 발견한 후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히 편치 않았다.
안타까운 듯 고개를 몇 번 저은 그는 훌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 * *
“구천마성을 제거할 방법이 있긴 있는 겁니까?”
혈교 아수라마전의 호법인 적마혼을 만난 화우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현재 그에게는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구천마성의 타도 외에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가주께서는 본 교의 힘을 아직 믿지를 않나 봅니다.”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아직 혈교가 직접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의 도움 없이 화룡세가에서 구천마성을 당해 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본가가 구천마성을 대적할 힘이 없어서 귀 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가는 오룡세가의 일원이었습니다. 본가의 저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저희는 객관적인 분석만 믿습니다. 우선 지금 화룡세가는 전대 가주의 일로 세가 전체가 가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거기다 제자들의 수와 고수의 수, 모두 구천마성에 많이 밀리지요. 궁극적으로 무황 중 한 명인 구천마황을 상대할 고수가 없지 않습니까?”
“혈교에는 구천마황을 상대할 고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본 전의 아수마종께서는 구천마황을 능히 이기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혈교가 그렇게 강하다면 본가와 연합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혼자만의 힘으로 남무림을 제패할 텐데, 왜 연합 제안을 하신 겁니까?”
화우성은 적마혼의 말을 허풍으로 들었는지 약간은 비꼬듯 물었다.
“본 교는 천하를 일통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상대할 적은 구천마성만이 아닙니다. 부역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겠다고 공언한 무림맹도 저희의 적입니다.”
적마혼이 굳이 부역자 얘기를 꺼낸 것은 은근한 압박이었다.
“본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고 어떻게 믿습니까?”
화우성은 이들의 힘이 무림맹까지 제거할 정도로 강하다면 천하를 일통한 후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천하를 일통하실 분이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다는 조롱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화룡세가가 배신한다면 그땐 잔혹한 보복을 받게 될 것이란 점을 알아 두십시오. 본 교는 배신자를 가장 싫어합니다.”
적마혼의 말에 화우성은 잠시 갈등했다. 늑대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들이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걱정을 밀어 두기로 했다.
당장 눈앞에 위험이 닥쳤는데 다음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태양천이 물러나며 안정을 찾아가던 무림에 또다시 혈겁이 시작될 조짐이 남무림에서부터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