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76화>
376화. 다가오는 위험(2)
그녀는 악불군을 세상에서 가장 믿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분명 사랑이었고,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데 동방소령의 말을 듣자, 갑자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관계라는 문제가 뇌리를 가득 채웠다.
‘정말 소군과 나는 무슨 관계지? 유모가 얘기해 준 것이 맞다면, 내가 소군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그런데 소군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녀는 악불군이 그녀를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 정도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그의 운명이라고 할 정도였고, 모든 행동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둘 사이에 부족한 것이 있음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게 뭘까?
“언니, 무슨 생각을 하세요?”
“응~? 미안, 잠깐 생각 좀 했어.”
“방주님과 무슨 관계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답이 없어서요.”
“아가씨, 요즘 생각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그만 물어. 쪼그만 게 알고 싶은 게 뭐가 그렇게 많아?”
듣고 있던 추국이 담수련이 곤란한 것 같자 끼어들었다.
“제가 어려도 알 건 다 알거든요!”
동방소령은 즉각적으로 항변했다.
그때 사효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 군사님, 방주님께서 종남파에 잠시 들렀다 가신다고 합니다.”
“앞을 막은 분들이 종남파 분들이에요?”
“예.”
‘드디어 시작인가 보군…….’
담수련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나타났다.
* * *
“운우각이 완전히 멸문했단 말이냐?”
도화각주의 보고에 천후의 얼굴이 확 굳어져 있었다.
운우각주의 죽음은 그녀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학장이라는 괜찮은 근거지를 그대로 잃은 것은 뼈아픈 손해였다.
운우각주가 죽었을 경우 그녀를 대신하게 하기 위해 심어 두었던 궁도들까지 모조리 죽었으니, 다시 현학장을 마음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마치 본 궁의 궁도들을 알고 있었다는 듯, 간부급들과 정예들만 골라서 죽였습니다. 남아 있는 방도들은 모두 지휘를 받던 아이들이라 당장은 써먹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놈이 운우각은 어떻게 찾은 것이냐?”
“현재로써는 작전에 실패한 운우각주의 뒤를 추적했다고밖에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밀 통로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더냐?”
“아닙니다. 보고에 따르면 비밀 통로를 세 곳이나 사용했다고 합니다. 추적에 만전을 기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측천무후궁의 간부들은 궁이나 각으로 돌아갈 때는 예정된 비밀 통로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심지어 비밀 통로는 그들이 지나가는 즉시 무너져 내리게 만들어져 있기에, 멋모르고 추적했다가는 오히려 생매장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비밀 통로를 세 개나 사용했다면 전설의 만리추종이라 해도 추적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유 외에는 어떻게 운우각을 찾아냈는지, 거기다 본 궁의 정예들만 모두 죽였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추종향을 묻혔을 수도 있지. 그보다 소혈선은 어찌 됐느냐?”
“두 번째 기습 이후에 도화전주와 함께 행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로잡힌 것은 아니겠지?”
“어떤 고수 앞에서도 최소한 자결을 할지언정 잡힐 둘이 아닙니다.”
도화각주의 말에 천후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고심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악불군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놈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담무룡은 어찌할까요? 담수련, 그 계집이 우리의 경고를 따르지 않았으니 목이라도 전해 우리의 경고를 듣지 않은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화각주의 말에 천후는 또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천후의 성정은 매우 잔인하고, 자신이 한 언사에 대해 반드시 지키는 과단성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연히 그러라고 할 줄 알았던 그녀가 말이 없자, 도화각주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톡톡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계속 두드리며 고심하던 천후는 드디어 결정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담무룡을 죽이면 악불군 그놈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먼저 죽이려고 혈안이 될 게다. 담무룡을 죽이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다.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미끼를 이런 식으로 버릴 수는 없지.”
다행히 담수련의 예상이 맞는 순간이었다.
“천후님, 총궁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그때 천후전 시위 무녀가 쪽지 하나를 두 손에 받쳐 들고 나타났다.
“궁주가?”
천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태후와 성후까지 있는 자리에서 큰소리를 쳤는데, 완전 체면 구겨지게 생겼구나.’
운우각주가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한다고 했을 때 나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이제 완전히 실패한 것이 되었으니 궁주에게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난감하던 그녀였다.
“가져와라.”
쪽지를 펼친 천후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천후가 이미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지금 받은 보고를 궁주가 어떻게 먼저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주위를 한 번 살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주위에는 이십 명이 넘는 친위 시위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이들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녀들 역시 알았다면 지금 같이 알았을 테니 벌써 궁주가 알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궁주에게 나 말고도 중원의 정보를 전해 주는 정보망이 따로 있나 보군. 어려서부터 영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예상보다 더 대단하군.’
입술을 꾹 다문 채 쪽지만 보던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담무룡을 총궁으로 압송한다. 내가 직접 갈 것이니 준비해라.”
* * *
종남산은 화산과 달리 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길의 험준함은 화산파에 오르는 길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마차가 오를 수 없는 산길인지라 악불군은 담수련과 동방소령만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남은 흑석영은 다른 세 명의 호법들과 뭔가를 의논하더니 수하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불군이 말한 수상한 살수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사 호법님, 무슨 일이 있나요?”
흑란은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있는 사효조 옆으로 가더니 슬쩍 물었다.
대주인 홍유경의 배신으로 잠봉단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사실 충격을 받기는 사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 역시 홍유경과 매우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이후 호법들이 잠봉단원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분명 그녀들이 악불군과 담수련을 먼저 모셨고 백인막은 한참 뒤에 합류했으니, 어찌 보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의심하는 형국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화만은 담수련의 전폭적인 믿음으로 인해 호법들과도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방주님께서 우리 주위를 상당한 수준의 살수들이 따르고 있다고 하셨다. 어떤 자들인지 먼저 알아보기 위해 흑 호법이 움직인 거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저희한테도 좀 언질을 주시든지 의논을 좀 하실 수는 없나요?”
“흑란아. 담 군사님께서 사화만은 절대 믿을 수 있다고 해서 그냥 넘어갔지만, 원래 우리들 방식대로 했다면 너희는 물론 잠봉단까지 모두 고문하고 죽였을 거다.”
“지금 저희들에게 겁주시는 거예요?”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을 말해 주는 거다. 솔직히 홍 대주가 담 군사님께 직접 걸리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간세라는 것을 믿었겠느냐?”
“…….”
사효조의 말에 흑란은 뭐라 답할 말을 잊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직접 담수련의 혈도를 찍고 운반한 것을 알기에 그냥 넘어간 것이지, 만약 심증만으로 홍유경을 간세로 몰아갔다면 사화는 분명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었을 것이었다.
전날 분명 홍유경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수련이 악불군과 같이 나갔다는 말을 듣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듯 급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고, 자신의 사물을 모두 태우다가 호법들이 닥치자 그대로 자결을 해 버렸다.
악불군과 같이 나갔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은 연화였는데, 그녀 역시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화가 담수련을 찾는다고 호들갑을 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흑석영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남은 잠봉단원들은 정말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홍 대주가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간세가 됐는지부터 생각해 보도록 해라. 사화 너희들이라면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흑란은 사효조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명분이 없자 결국 물러서고 말았다.
* * *
종남파의 장문인 무이명은 악불군을 자신의 옆 자리에 앉히는 파격적인 대우까지 하며 그를 반겼다.
“악 방주, 노부는 종남파의 장로인 섭맹이라고 합니다.”
이미 한 번 전체적인 인사는 했지만, 섭맹은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하며 말을 시작했다.
“말씀하십시오.”
“혈교와 신비 조직에 대한 공표는 우리도 다 읽어 보았습니다.”
“본 방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당연히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자마자 외유를 나와 주요 문파들을 방문하고 있으니, 많은 문파에서 의아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 주기를 바라고 한 일입니다. 그래서 계속 저희들이 동선을 알리고 있는 것이고요.”
“악 방주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대단히 큰 세력을 지니고 있고 매우 위험한 집단입니다. 그렇게 동선을 알리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그의 질문의 의도는 분명했다. 위험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들을 밖으로 끌어낼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공론화를 한 후 저를 미끼로 뿌려, 그들이 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설마, 악 방주 스스로를 미끼로 쓰고 있다는 말입니까?”
“수하들을 내보내 봐야 상대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상대한다 해도 죄 없는 수하들 목숨만 잃게 되겠지요.”
그러자 사진청이 나섰다.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다른 분이 하고 있다면 굳이 제가 먼저 나설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요. 그리고 제 얘기를 믿지 않는 분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소림사를 비롯한 여러 문파를 방문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제 공지를 읽어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들은 한 개인이나 세력이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난 것입니다.”
“도움은 주시겠답니까?”
악불군은 답 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파에서 도움을 주었는지 않았는지를 먼저 아셔야 종남파에서도 결정하실 수 있는 것인지요?”
악불군의 반문에 화기애애하던 청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종남파는 누구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문파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다른 문파가 동의를 하고 안 하고는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해도 됩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악불군이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구상과 거기에 따른 계획에 대해 듣는 종남파의 간부들의 표정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는 악불군의 말에서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정성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같은 구파일방이라지만 현재 종남파는 무림맹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키워 낸 제자들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무림맹의 눈치를 더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악불군의 구상에 찬성한다면 무림맹과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많았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다음 대 무림의 절대자 자리를 예약한 악불군과 친분을 다질 기회를 그대로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번 일로 천호방과 가까워질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악불군은 그들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아는 듯,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