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77화>
377화. 담무룡(1)
“당장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거절한다 해도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려워 마시고 종남파에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십시오. 제가 종남파에 방문을 요청한 것은 곤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 같이 이 엄중한 상황을 이겨 낼 방법을 찾기 위해서이니까요.”
악불군의 말을 듣던 종남파의 간부들의 얼굴에 경탄의 빛이 나타났다.
그들의 곤란함을 덜어 주는 배려 섞인 겸손함도 탄복스러웠지만 지금까지 느껴지지 않던 절대자의 기도를 말하는 순간, 모두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억지로 나타난 기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기도였다.
‘허허~ 장강의 물결은 쉴 새 없이 밀려 간다더니 백 공자 말고도 이런 젊은 신성이 나타나다니 실로 놀랍구나.’
무이명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악 방주께서 천륭검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악 방주, 종남파 구경은 못해 보셨지요?”
“제가 구경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럼 반 시진만 구경하고 오시겠소?”
“반 시진이 아니라 한 시진은 구경해야 다 볼 수 있을 것 같더군요.”
무이명은 문 앞에 서 있는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적산아.”
“예.”
“악 방주와 그 일행에게 종남파 구경을 좀 시켜 드리거라.”
심적산은 허리를 살짝 숙이더니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가시지요.”
밖에 나온 담수련은 홀로 무인들이 수련하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동방소령의 옆으로 다가갔다.
“심심하지는 않았지?”
담수련의 말을 걸자 동방소령은 함박웃음을 지며 답했다.
“전 뭐든지 새로운 것을 구경하면 심심한 것을 몰라요. 그것보다 일은 잘 끝나셨어요?”
“곧 끝날 것 같구나. 아마 잘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군사 언니, 요즘 악 방주님을 보면 막 후광 같은 게 보이는 거 아세요?”
그녀는 심적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악불군을 슬쩍 보며 말했다.
“후광?”
담수련은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동방소령이 말한 것 같은 후광은 보이지 않았다.
“령 매 눈에는 악 방주에게서 후광이 있는 게 보여?”
“지금은 안 보이시는데 이따금 뭐라 할까 함부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위엄이 느껴져요. 그때 보면 마치 후광이 있는 것 같아요.”
동방소령의 말에 담수련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악불군에게서 간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도가 보이고 있음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소림사를 나온 이후, 상대를 위압하던 강력한 기도보다는 모두를 감싸안는 듯한 부드러운 기도를 보이고 있었다.
동방소령에게는 후광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기운이었다.
“그럼 이제 뭐할 거예요?”
“종남파 구경을 좀 할 거야. 령 매는 당연히 좋지?”
“저야 좋지요. 호호~ 이러다가 구파일방 구경을 모두 할 수 있겠어요. 할아버지도 아직 구파일방은 다 구경 못했다고 하셨거든요.”
그녀의 말대로 구파일방 모두를 구경은커녕 들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럼 가자.”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심적산의 안내를 받으며 종남파를 도는 동안 정청에서는 의논이 한창이었다.
“사제들 생각은 어떤가? 솔직히 난 악 방주가 굳이 스스로 종남파에 방문을 요청했다고 강조하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드네.”
“저도 저 명성에 나이도 젊은 사람이 예의도 바르고 겸손까지 하니 사람만 보면 뭐 하나 빠질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청의 말에 섭맹이 부언을 했다.
“더욱이 천륭검가의 후손이라는 신분도 아주 믿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사진청이 말을 흐리자 무이명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 파는 무림맹 특히 천무성궁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직 무림맹에서 천호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혈맹지약을 맺는다면 의(義)가 상하진 않을지, 그게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사파와 혈맹을 맺는 것도 아닌데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섭맹의 반론에 사진청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섭 사제, 본 파가 무림맹 소속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게. 이미 무림맹과 혈맹을 맺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따로 다른 파와 혈맹지약을 맺는다면 어찌 되겠나? 무림맹과 천호방간에 반목이 일어난다면 우리로서는 실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네.”
“다른 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모두 융숭하게 대접하고 장로급들이 나와 배웅까지 했다지 않습니까?”
“그거야,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나? 거절한다 해도 당연히 장로인 우리가 나가서 배웅해야 할 걸세. 그걸로 다른 문파에서 혈맹지약을 맺었다고 할 수는 없지.”
말을 끝낸 사진청은 무이명을 쳐다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문 사형, 왜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아까, 악 방주가 내게 그랬다. 문파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라고.”
“저희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문파에 이익이 되는 방향을…….”
“아니, 지금 사제는 문파의 이익이 아니라 곤란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많이 다르지. 곤란하다고 손해가 나는 것은 아니니까? 사제 한 번 생각해 보자. 악 방주에 대해 천륭검가의 후손이니 믿을 만하다고 했네?”
“그랬습니다.”
“단지 믿을 만한 것이 전부이던가?”
사진청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아닙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지금의 무황 같은 위상을 갖게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천무성궁과 어느 정도로 가깝다 보느냐?”
“……그냥 도움을 준 여러 문파 중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다른 문파에서 천호방과 혈맹지약을 맺지 않았는데 종남파가 받아들인다면 악 방주에게 우리는 아주 가까운 동지가 될 것이다. 만약 다른 문파에서 혈맹지약을 맺었다면 우린 당연히 거기에 끼어들어야 대세에 같이 가게 된다.”
무이명의 말은 천호방과 혈맹지약을 맺는 것이 이익이라는 의미였다.
“장문 사형 생각은 악 방주가 무림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까?”
“이미 대세가 되었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 그는 황상과 친분이 있다고 소문이 나 있다. 거기다 무림 십왕에 봉해졌고 이미 한 문파의 방주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죽인 자들은 거의 다 마황급의 거물들이었다. 무엇이 더 필요하냐?”
“…….”
논리 정연한 그 말에 간부들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천후, 궁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측천무후궁에서 궁주에게 포권만으로 인사할 수 있는 지위를 지닌 사람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앉으세요.”
천후가 자리에 앉자 측천무후는 시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녀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천후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동안 무공 수련에 빠져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는데 요즘 차에 맛을 들였습니다. 드셔보셔요. 제가 자주 먹는 차입니다.”
“감사합니다.”
천후는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확실히 차향이 독특하고 진했다.
“용정차와는 또 다른 풍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은 천후는 좋다는 듯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천후께서 담무룡을 직접 데리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번 제가 말씀 드렸던 계획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인가요?”
“그게…….”
천후의 설명을 듣는 측천무후의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원래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지금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천후께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솔직히 놀랐어요.”
“실수라기보다는…….”
“천후께서는 수하들의 실수에 용서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시네요? 어떤 이유건 결과가 실패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천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계획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해요. 그런데 이번 계획은 시작부터 잘못되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정보를 보니 담수련은 오음절맥이더군요.”
“그렇습니다.”
“대단히 효녀고, 담무룡과는 달리 심성이 대단히 곱다. 맞지요?”
“맞습니다.”
“효녀고 심성이 좋다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오음절맥은 대단히 똑똑해요.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을겁니다. 그런 담수련에게 담무룡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은 상당한 갈등을 주기는 하겠지만 효과를 바랄 수는 없는 방법이었어요.”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담무룡을 데리고 오란 이유가 뭐겠어요?”
“혹시 회유를 생각하신다면 어려울 것입니다.”
“담무룡은 대공까지 속이고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빼돌릴 정도로 담이 크고 야망도 대단한 자예요. 더욱이 성정이 대쪽 같고 자존감이 높아 다른 오룡세가와도 사이가 안 좋았더군요.”
“고문을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런 자는 회유가 안 되지요.”
말을 마친 측천무후는 시위를 보며 말했다.
“담무룡을 이리 데려 와라.”
“예!”
천후는 측천무후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기만 했다.
잠시 끌려 온 담무룡의 몰골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전 잠룡세가의 가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측천무후와 천후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였다.
“역시 눈동자 살아 있군.”
측천무후는 담무룡이 자신을 노려보자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위를 보며 다시 말했다.
“무림의 영웅을 무릎을 꿇리다니 그건 예의가 아니다. 자리에 앉히거라.”
시위는 즉시 담무룡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아혈도 풀어 주고.”
“예!”
보통 이런 경우 아혈이 풀려 말을 하게 되면 당장 욕부터 하는 것이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담무룡은 아혈이 풀렸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시지요?”
“비열한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진정한 무인이 할 행동이 아니다.”
처음으로 담무룡이 입을 열자, 천후가 버럭 소리쳤다.
“너 따위가 감히 반말을 하실 분이 아니다!”
“어떤 분인지 알려 주기나 했더냐?”
지금 자신의 상황을 모르는지 그의 말투는 여전히 거만했다.
그러자 측천무후는 손을 들어 천후의 입을 막고는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정당하게 제압당했다면 인정을 하신다는 의미인가요?”
“무엇을 인정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정당하게 패했다면 죽음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다.”
“담 가주께서는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시나요?”
“일 년 정도 지났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일 년 동안 원나라는 새외로 쫓겨났고 태양천도 무림에서 사라졌어요. 중원은 무림맹이 장악을 했고 오룡세가는 부역 세력으로 몰려 전부 몰락했지요.”
“……잠룡세가가 몰락했다는 것이냐?”
“대공한테까지 버림을 받은 상황에서 그건 당연하 수순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담수련과 담수운에게 비밀 세력을 맡겨 살아남기를 바라신 거고 말입니다.”
담무룡의 검미가 꿈틀했다.
대공조차 눈치 못 챘던 자신의 비밀 세력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은 그와 가장 가까운 측근 중에 간세가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비열한 방법이긴 해도 패배한 것은 분명하다. 더 이상 나를 모욕하지 말고 죽여라.”
“안타깝게도 담 가주는 이대로 죽기에는 몸값이 많이 높아지셨어요.”
“모든 것을 다 잃고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내게 아직도 이용할 가치가 남아 있다는 것이냐?”
“이용 정도가 아니라 무림의 세력 판도를 바꿀 만큼 큰 힘을 지금 가지고 계시지요.”
담무룡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측천무후를 쳐다보자 그녀는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살짝 그리며 말했다.
“담 가주께 우리 모두가 이익이 될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들어 보실 의향이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담무룡의 얼굴은 점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