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78화>
378화. 담무룡(2)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희를 도울 생각이 없다.”
“수작이 아니라, 정정당당히 대결하겠단 겁니다. 지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지요? 예전과 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 휴식하든 수련하든 기다려 주겠어요. 물론 기를 돋우는 약재들도 매일 제공해 드리지요.”
“혈도를 풀어 주겠다는 말이냐?”
“당연히 풀어 주어야지요. 단 몸을 완벽하게 추스르는 동안 딴짓을 하지 않겠다는 약조는 해 주셔야겠습니다.”
담무룡의 표정이 변했다. 우선 혈도를 풀어 준다는 것만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죽이면 될 일을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본 궁주와 계약을 하나 하면 됩니다.”
“계약?”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하나의 계약을 위해 자유롭게 무공을 복원할 시간을 주는 걸 보면, 그 계약에 엄청난 내용이 담길 것이 명약관화했다.
“계약의 조건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싶다.”
담무룡의 반문에 측천무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경우 배신하거나 약속을 안 지킬 자들은 무조건 하겠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차피 지키지 않을 약속, 조건 같은 것은 알아볼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담무룡은 자신이 죽을 처지에 있으면서도 우선 조건부터 알고 싶다는 의향을 표명했다.
그가 가진 자존심만큼, 신의가 있는 자라는 방증이었다.
“본 궁주와 비무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내 일 초를 받아 낸다면 당신에게 잠룡세가를 다시 돌려줄 것이며, 예전 잠룡세가의 세력은 건드리지 않겠어요. 대신 일 초를 견디지 못한다면 오 년간 나의 충실한 충복이 되세요. 물론 오 년 후에는 잠룡세가를 다시 세우고 예전의 세력을 그대로 주겠어요.”
담무룡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어이없음이 섞인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계약의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을 뿐 아니라, 그에게 너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그렇게 무시하는 것을 보니, 지금 내 모습이 매우 초라해 보이는 모양이구나?”
“한때 담 가주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는데, 무시할 사람이 있을까요?”
‘한때’라는 표현에 담무룡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내게 일 초를 얘기한 것이냐?”
“최대한 담 가주께 유리하게 해 줄 생각인데, 마음에 안 들면 바꿀까요?”
“내가 이긴다면 어쩔 거냐?”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던 측천무후의 입가에 살짝 선이 그어졌다.
“만약 담 가주께서 나를 이긴다면 무림의 황제를 만들어 드리지요. 어때요, 계약하시겠어요?”
“좋다. 약속은 지켜라!”
“제가 할 말이군요.”
“나 담무룡은 약속만은 꼭 지킨다.”
“대공을 배신하고 천륭검보를 숨긴 것은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닌가요?”
“약속을 어긴 것은 맞다. 하지만 먼저 약속을 어긴 것은 대공이다. 난 상대가 약속을 어기기 전에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
“믿겠어요. 그럼 백 일 후에 봐요. 혈도는 수련장에 도착하면 풀어 주라고 할게요.”
시위 무사가 담무룡을 데리고 떠나자 천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담무룡은 무림 십대고수의 일인입니다. 더욱이 그는 대공의 행동대 역할을 하면서 천 번 이상의 싸움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 초에 이기지 못할 것 같은가요?”
“조건이 너무 담무룡에게 유리한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만약 그가 일 초를 버틴다 해도 제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불편은 좀 생기겠지만, 본 궁에 손해날 것은 없어요. 부역자 중에서도 중원 무림인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담무룡이 다시 잠룡세가를 일으키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담무룡이 바보가 아닌데 나서겠습니까?”
“원래는 태풍이 지날 때까지 잠시 숨어 있으려고 했겠지요.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피할 곳이 생겼어요. 아니 세력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바로 천호방이예요.”
“결국, 담무룡 때문에 천호방과 무림은 싸울 수밖에 없겠군요.”
천후의 말에 측천무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나타났다. 그녀의 말에서 승복하는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호북으로 향하는 악불군과 담수련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예상에 없던 종남파까지 혈맹지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소군의 영향력은 거의 무황과 맞먹는다고 해도 될 거야. 구파일방 중 무려 네 문파와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까지 소군을 지지하기로 했고, 사천의 세 문파는 혈맹지약까지는 맺지 않았어도 우리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 있으니 절대 적대시하지는 않을 거야.”
담수련은 무척 고무된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아가씨의 계획대로 되고 있습니다. 아가씨의 능력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계획이 좋아도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해. 하지만 능력이 좋으면 좀 허술한 계획이라도 해 내. 지금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은 모두 소군의 덕이야.”
“무당파 다음은 제갈세가로 가신다고 했는데, 대략 한 달은 걸릴 여정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아주 건강해. 직접 봐 봐.”
담수련은 악불군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빙설초의 효과가 좋긴 한 것 같습니다.”
말하는 악불군의 표정은 그리 밝지는 않았다. 빙설초로 만든 환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최대한 아껴 먹는다 해도 이 년 안에는 모두 먹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빙설초하고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아. 새편작 어르신의 의서에 의하면 빙설초는 증세를 완화만 시켜 줄 뿐이라고 했는데, 난 오히려 더 건강해지는 기분이야.”
“그래도 빙설환은 꼭 드셔야 합니다.”
“알았어. 그것보다 흑 호법께서 수상한 자들을 조사했다고 하던데, 뭐 특별한 거 있었어?”
“흑 호법께서 몇 가지 흔적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자들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자들이라는 말이네?”
“예.”
“우리에게 적대적인 것은 확실해?”
“제게 살기를 보낸 것으로 보아 적대감을 가진 자가 분명합니다.”
“측천무후궁이 또 기습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무림맹이나 정파인들이 우리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보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태양천 아니면 혈교밖에 없네?”
“제가 기억하는 태양천의 기가 아니니, 아마도 혈교가 맞을 것입니다.”
담수련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우리에게 측천무후궁의 정보까지 보냈는데 우리를 기습한다? 혈교에서 소군에 대한 대처를 바꾼 것 같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결정이 늦었다고 봅니다.”
“우리를 이용하려고 했어. 그런데 이용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 거야. 그리고 이젠 소군을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거지.”
담수련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술술 그들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말을 혈뇌가 들었다면 그는 아마 제일 먼저 죽일 사람을 담수련을 지목했을 것이었다.
“소걸아가 온 것 같습니다.”
“소걸아 소협이? 어디?”
담수련은 주루의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아래 층에 와 있습니다. 매향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소걸아 소협이 매향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런가요?”
악불군이 전혀 짐작도 못 했다는 듯 답하자, 담수련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소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거야?”
“어떤 눈치를 말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남자가 여자한테 호감을 보이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른다는 거야?”
“……음, 죄송합니다.”
악불군이 고민하며 내놓은 대답을 들은 담수련은 작게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휴우~ 죄송할 일은 아니지 뭐.”
그녀는 악불군과 자신 간의 관계에서 빠진 것이 무엇일까를 계속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드디어 한 가지 찾아냈다.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까 우리 관계가 진전이 없었던 거야.’
담수련은 여전히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악불군의 모습에, 입술을 꾹 닫으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눈치가 없으면 눈치를 채게 하는 수밖에 없지 뭐.’
그녀가 무슨 다짐을 하는지 전혀 눈치 못 챈 악불군은 또다시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몰라!”
* * *
“호호호호!”
“호호호~”
소걸아의 입담에 삼화는 까무러칠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매향만은 입을 꾹 닫고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마치 웃으면 소걸아에게 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소걸아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매향 소저는 재미가 없으신 모양입니다?”
소걸아는 매향만 웃지 않자 약간 실망한 듯 물었다.
“매향아, 소걸아 소협께서 묻잖아? 빨리 대답해 드려.”
흑란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끼어들자 매향은 옆 눈으로 흘기며 말했다.
“소걸아 소협께서는 너무 가벼우신 것 같아요. 남자라면 좀 무게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하하하! 솔직히 개방에서 저보고 너무 무겁다고 다른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 수 있으니 좀 가볍게 처신하라고 해서 그런 겁니다. 사실 전 보기보다 정말 무게가 있는 남자입니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나온 소걸아의 말에, 삼화의 입에서는 또다시 웃음소리가 까르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매향은 소걸아를 휙 째려보았다.
소걸아의 생김새는 천하미남은 아니었지만 절대 못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지저분했다. 같은 거지인 사해신개와 그의 사부인 신룡신개조차 지저분하다고 느낄 정도이니,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었다.
“소걸아 소협께서는 예의가 너무 없으신 것 같아요.”
“제가요? 어떤 면을 말씀하시는지?”
“이렇게 여인들이 식사하는 곳에 나타나시려면 씻고 오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어요?”
“매향 소저께서 아직 모르시는 모양인데 거지가 씻으면 누가 거지로 보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거지들도 깨끗한 거지들이 있거든요!”
“그건 사이비 거지입니다. 진실한 거지는 거지의 품격을 지켜야 합니다.”
거지의 품격이라는 말에 또다시 삼화는 까르르 웃고 말았다.
연화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럼, 개방의 방도들은 혼인을 안 하시나요?”
“많지는 않지만 당연히 혼인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분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부부가 거지로 구걸을 하는데, 남들보다 더 잘 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매향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갑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소걸아 소협께서는 여자 거지분들 중에서 혼인할 분을 찾아야겠네요?”
‘아무래도 지금 말은 실수 같은데……. 사조님께서 내 입이 방정이라 혼인하기 힘들 거라고 하셨는데, 에이!’
소걸아는 사해신개와 신룡신개에게 자신은 두 분처럼 홀아비로 늙지 않고 반드시 혼인할 거라고 큰 소리를 쳤었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마음이 가는 여인이 나타났는데, 그녀가 바로 매향이었다.
그때 이 층에서 악불군과 담수련이 내려왔다.
“소걸아, 왔으면 올라오지 여기서 뭐하는 건가? 우리 이제 식사 끝났다.”
당연히 식사가 끝나기 전에 소걸아가 올라와 음식을 시킬 줄 알았는데 안 올라오자 결국 내려온 것이었다.
소걸아는 자신의 뺨을 손으로 긁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식사가 끝났다고……? 내가 그것 때문에 죽어라 달렸는데 여기서 뭐한 거지?’
매향은, 소걸아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먹을 것까지 잊게 만들 정도였다.
* * *
[분명 살수들이었더냐?]
삼불귀마는 예춘벽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조금만 실수했어도 들켰을 정도로 대단한 살수들이었습니다. 특히 몇 놈은 저를 능가할 정도로 살수 무공이 대단했습니다.]
[천호방주를 살수들이 호위한다……. 설마 그놈이 자신의 호위를 살수 집단에게 맡긴 것은 아닐 텐데?]
[저번 천살단 회의 때, 단주님께서 갑자기 사라진 살수 집단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여 단주가?]
[예.]
[어떤 살수 집단이냐?]
[백인막입니다. 저를 능가할 살수를 보유한 살수 집단은 백인막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백인막이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찾아다니며 뭔가 수작을 부리면서, 뒤로는 부역 세력으로 찍힌 백인막의 살수들을 끌고 다닌단 말이지? 정말 우습게 볼 놈이 아니구나.]
[정면 대결을 할 경우 우리가 이긴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봉미독수 장로가 사전 작업에 이미 들어갔다. 그 작업이 끝나는 즉시 공격하면 쉽게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삼불귀마는 자신 있는 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