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80화>
380화. 습격(2)
“왜 그러십니까?”
악불군은 그녀의 표정에 의아함을 느낀 듯 반문했다.
“방주님은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반문하는 담수련을 보고서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긴, 종남산에서 방주 호법들의 추적까지 뿌리친 자들이 그렇게 쉽게 걸린 것이 좀 의아하긴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척후를 보내면서 이동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이렇게 허술하게 매복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들키려는 의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일부러 들키면서 기습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상하지요. 더구나 전력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산적들은 무슨 이용 가치가 있을까요?”
“그걸…… 찾아야지요…….”
둘의 대화를 듣던 흑석영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제가 혼자 가서 좀 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방주님을 상대할 정도의 고수들이 있을 거예요.”
“걱정 마십시오. 정면으로 싸워 이기지는 못해도 도망은 칠 수 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았다. 어찌 됐건 결정은 악불군이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적의 의중을 모르고 그대로 가는 것은 자만입니다. 흑 호법이 한 번 더 수고해 주십시오.”
“예!”
절도 있게 대답한 흑석영이 사라지자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소군이 직접 갈 생각을 한 거 알아. 하지만 방주가 뭐든 다 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야.”
담수련은 이미 악불군의 표정에서 그가 직접 가서 알아볼 생각을 했음을 파악했다. 그래서 흑석영의 제안을 유도한 것이었다.
악불군이 직접 간다면 수하들의 희생도 막고, 마무리도 쉽게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사실은 자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 벌어지면 언제나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그의 책임 의식은 수하들에게 인정을 받는 중요한 덕목이긴 하지만, 무엇이든 모두 나서는 것은 지양해야 할 부분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답하긴 했지만 악불군의 눈은 여전히 흑석영이 사라진 산 위를 보고 있었다.
* * *
보고서를 받은 만통광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지금 천호무적검의 행보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불가침 조약을 맺기는 했지만, 무림맹과 구천마성 간의 직접적인 충돌을 막아 주고 있는 천호방이 정파의 중요 문파들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거슬렸다.
만나는 문파들이 하나같이 무림맹의 주요 구성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호방이 무림맹의 편에 선다면 구천마성으로서는 큰 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남무림을 정리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는데, 정천보를 견제하고 있던 구천마성의 무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그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정천보에 있는 화룡세가 놈들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다른 놈들이 끼어들었어. 누군지 찾아낸 것은 있느냐?”
만통광심은 역시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한혈흑의존에게 반문했다.
“아직 범인을 특정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화룡세가에서 원군을 보낸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들을 모두 죽일 정도면 움직인 전력이 상당할 터, 본 성의 정보망에 걸린 것이 있을 것 아니냐?”
“점창파도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남무림에서 그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문파는 점창파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점창파가 부역 세력으로 낙인찍은 화룡세가를 도울 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강서에 주둔하고 있던 본 성의 수하들을 하룻밤 만에 제거할 전력을 가진 문파는 남무림에 점창파와 화룡세가 둘밖에 없습니다.”
쾅!
만통광심은 검미를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이놈들이 감히!”
한혈흑의존은 만통광심이 범인을 알아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물었다.
“어떤 놈입니까? 당장 그놈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혈교다.”
“예? 그놈들은 우리와 암묵적으로 서로 건드리지 않고 있었지 않습니까?”
“놈들이 우리보다는 화룡세가를 이용하기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미처 답을 듣기도 전에, 만통광심은 몸을 일으켰다.
“난 성주님께 갈 것이니, 넌 장로들을 만나 회의 소집을 전해라.”
“예!”
일촉즉발의 상황을 이어 가던 남무림에 드디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혈교의 본격적인 중원 침공의 시작이기도 했다.
* * *
“숨어 있는 자들의 수가 최소한 삼십 명, 산적들과 같이 있는 자들이 약 이십 명, 거기다 흑 호법께서 발견하지 못할 정도의 고수가 몇 명 있을 거고…….”
흑석영이 돌아온 후, 작은 간부 회의가 열렸다. 방주와 군사 그리고 네 명의 방주 호법들만 모인 회의였지만 모두의 표정은 진중했다.
흑석영의 보고가 끝나자, 담수련은 보고 중 거슬리던 내용에 대해 질문했다.
“흑 호법, 산적들의 표정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했지요?”
“예.”
“그렇다면 산적들은 그들에게 협박을 받고 억지로 같이하고 있다는 말인데, 우리에게 크게 위협이 되지 않을 산적들을 굳이 같이 내세우는 이유가 뭘까요? 도망을 칠 수도 있고 무공도 약하니 금방 행적이 드러나는 위험도 있는데 말이에요?”
담수련의 반문에 모두 즉답하지 못했다. 사실 담수련의 반문은 그들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는 의미가 컸다.
그리고 곧 답을 찾은 듯 눈이 커졌다.
“대단한 책사가 직접 꾸민 함정이네요.”
“이유를 알아내셨습니까?”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까지 염두에 두고 만든 계책 같아요. 티가 나게 산적들을 배치한 것은 저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한 목적임이 분명해요.”
“그럼 산적들은 그저 미끼이고, 주위에 다른 함정을 파 놓았다는 뜻입니까?”
악불군의 반문에 담수련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주위에 다른 함정을 파 놓았다면 척후를 나갔을 때 걸렸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 살수들이 매복해 있는 것을 보인 이유가 있네요. 그곳을 못 오게 하기 위함이에요. 함정을 발동시킬 뭔가가 그들이 숨어 있는 곳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럼 그냥 지나는 것보다는 저희가 먼저 기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효조의 말에 담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책사가 제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짠 계책일까요? 지금 상황에 모른 척 행진을 계속할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고 기습을 한다면 많은 분들이 죽거나 다칠 거예요.”
“저희가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대독관이 자신 있다는 듯 말하자 담수련을 그를 보며 다시 말했다.
“우리는 지금 총수가 삼십 명 정도인데 반해 그들은 두 배에 가까운 오십 명이에요. 더구나 호법들의 추적까지 뿌리칠 정도로 상당한 능력을 가진 살수들이고요. 거기다 그들은 방주님까지 염두에 두고 저들을 보냈을 겁니다. 개별적인 기습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행진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철저하게 방어진을 펼치면서 방주님과 호법들께서 적절한 방위를 점하고 움직인다면 큰 희생 없이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겁니다.”
“그럼 그렇게 준비시킬까요?”
대독관의 말에 담수련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똘똘 뭉쳐서 방어진을 펼치고 움직인다면, 그때 산적들이 위력을 발휘하게 될 거예요.”
담수련의 말에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천마전의 군사인 나채현이 수립한 이번 계획의 전모에 대해 거의 짐작하고 있었다.
무슨 계책이든 방향이 정해지면 이후의 진행은 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금 찾아낸 것은 이들의 함정이 어떻게 구성이 되었을까였다.
미끼이건 혼동을 유발하기 위해서이건, 산적들을 이용하는 걸 보면 그들에게 유용성이 있음이 분명했다. 전력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자들을 싸움에 유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강해지게 해야 했다.
물론 그들의 목숨은 안중에 없었다.
“화약 아니면 독이에요. 이들의 목적은 우리를 그냥 죽이는 거예요. 방주님을 당황하게 만들어 허점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지요. 어쩌면 내가 방주님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담 군사님은 저의 약점이 아닙니다.”
악불군이 급히 끼어들었지만 담수련은 살짝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주님께는 제가 약점이 아니지만 적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천호무적검과 천상신녀에 대한 소문은 아직도 무림에 회자되고 있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악불군이 다시 반박하려고 했지만, 담수련은 더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화약이나 독을 집단 싸움에 사용하는 것은 무림의 공적으로 몰릴 수 있는 금기 사항입니다.”
최욱걸의 말에 담수련은 그를 슬쩍 보며 물었다.
“그런 것을 생각할 자들이 아니지요. 저들이 그런다면 우리 역시 저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해 주면 됩니다.”
담수련이 드디어 상대할 방법을 결정한 듯 말하자 모두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적들에게 이기는 것은 그녀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무한정 신뢰를 보이는 악불군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함정을 분쇄하면서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 그녀는 그게 중요했다.
* * *
[저놈들이 왜 갑자기 멈춰 서더니 더 이상 오지 않는 거지?]
봉미독수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담수련의 예측대로 숨어 있는 살수들은 암기와 함께 독을 터뜨릴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악불군 일행이 관도에 들어서는 즉시 암기들이 그들에게 날아들 것이고, 동시에 독가루가 주변을 덮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때를 기해 우왕좌왕하는 천호방들을 산적들이 공격한다. 산적들은 당연히 천호방도들이 손에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들의 몸에 달아 놓은 화약들이 사방에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불 공격에 화약은 맹렬하게 탄다. 산적들을 죽인 방도들의 몸에 묻은 화약은 물로도 끌 수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악불군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그를 세 명의 원로가 합공으로 죽인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나채현은 천호방이 마차를 중심으로 밀착 방어진을 형성한 채 올 것이라고 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무슨 냄새지?”
상황을 살피던 사비쌍검이 코를 킁킁대더니 놀란 듯 말했다.
삼불귀마와 사비쌍검도 놀란 표정으로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
삼불귀마는 눈이 동그래졌다.
냄새를 방금 맡았으니, 불을 붙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불길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이, 이, 이런……. 이건 나 군사의 계획에 전혀 들어 있지 않았는데?”
당황한 삼불귀마의 말에 봉미독수가 급히 말했다.
“빨리 후퇴 명령을 내려야 하네!”
“모두 후퇴하라!”
삼불귀마가 급히 소리쳤지만, 너무 빨리 다가오는 불길에 후퇴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화약을 이용한다 해도 이렇게 빨리 불이 번질 수는 없었다. 거기다 불을 본 산적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면서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화약에 불이 옮겨붙자, 불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독은 불에 매우 취약했다. 사방에 준비했던 독에 불이 붙으며 뿜어져 나온 연기는 오히려 천살단 살수들을 쓰러지게 만들었다.
다 이긴 싸움이라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천마전의 무사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 * *
악불군의 뒤를 따르던 모든 수하들은 어이가 없는지 아니면 너무 경탄했는지, 마치 신을 보는 듯한 눈길로 악불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효조와 최욱걸의 지휘하에 수하들이 관도 옆 나무 여러 곳에 불을 붙였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지금 시기가 우기인지라 산 전체가 습기가 많아 불이 번져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고, 불길이 퍼지는 속도상 적들이 몸을 피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피해를 주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불군이 양팔을 앞으로 뻗자 상황은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다.
산속의 기들이 요동을 치며 불길을 바람의 속도로 밀어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보고 있는 방도들은 이게 꿈인지 사실인지 혼동을 할 정도였다.
소림사에서 기연 이후 완전한 자연경에 오른 악불군의 경지는 실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