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83화 (383/472)

<천검지애 383화>

383화. 백천학(1)

올라온 청년은 백천학이었고 노인은 태극검자였다.

“나백귀왕이 호북에 들어오다니, 배짱도 좋으시구려?”

태극검자는 나백귀왕을 아는 듯했다.

“태극검자 선배, 오랜만입니다.”

“왜 혈해사계에서 호북까지 왔는지를 물었소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당파 사람인 태극검자는 질문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난 지금 개인적으로 온 것입니다. 개인적인 용무마저 무당에 보고할 의무는 없지 않습니까?”

나백귀왕의 말에 태극검자는 서 있는 악불군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악불군이 포권을 하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나백귀왕에게 말했다.

“개인적인 용무라면 이제 가 보시게. 누구한테 해를 끼치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네.”

“나도 호북에 오래 있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나백귀왕은 수하에게 가자는 듯 눈짓을 하고는, 태극검자의 옆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악불군보다 더 대단한 것 같잖아? 도대체 저놈이 누구지? 빨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

백천학이 뿜는 기도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을 느꼈는지, 내려가는 나백귀왕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바짝 굳어 있었다.

나백귀왕이 사라지자 백천학과 태극검자는 악불군의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저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악불군은 백천학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아니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저를 만나기 위해 오셨다는 겁니까?”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이라고 제가 예전에 말했는데, 악 방주께서는 저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제가 백 공자님을 만나기 싫어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니라고 하시니, 반가워하신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생각이야 자유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가 담 군사님과 함께 식사 중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담 군사라는 말을 들은 백천학은 자연스럽게 담수련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포권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역용술이 대단히 발전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너무 정중하게 인사를 하니, 담수련도 몸을 일으켜 포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 공자님께서 한눈에 알아보실 정도인데, 축하할 일인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악 방주님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저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알아봤다고 할 수는 없지요.”

“악 방주 이쪽으로 와요. 그리고 두 분은 앞에 앉으세요.”

담수련이 악불군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백천학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식사 중이라고 하셨는데 저희가 방해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미 방해를 하셨어요. 두 분이 옆에 앉아 있는데 식사가 제대로 되겠어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백천학은 감사하다는 듯 포권을 하고는 태극검자를 슬쩍 보며 말했다.

“허락을 받았으니 앉으시지요.”

악불군은 둘이 앉는 것을 보고 마지막으로 앉았다.

“높디높으신 무림맹 중원 총순찰께서 태극검자 어르신까지 모시고 오셨으니 중요한 용건이 있으실 텐데, 말씀하시지요.”

“식사는?”

“대화가 끝난 이후에 먹어도 상관없을 거예요. 뜨겁게 먹어야 하는 음식은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천신문에 오셔서 천상신녀가 문주냐고 물어보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왜 그것을 물으신 건가요?”

“천신문에 대해 약간 의심쩍은 정보가 들어왔었습니다. 하지만 천상신녀께서 천신문의 문주시라면 정보를 무시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천상신녀를 그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있나요? 그녀에 대해 공자님께서 잘 모르시잖아요?”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요. 전 천상신녀의 눈에서 조금의 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믿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보시나요?”

담수련의 반문에 백천학은 그녀의 눈을 자세히 응시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성 자체가 깨끗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전 제가 보고 느낀 것을 믿습니다.”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럼 이제 용건을 말씀해 보시지요?”

백천학은 아무 말 없이 있는 악불군을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천호방에서 공표한 혈교와 신비 조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신비 조직은 측천무후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담수련의 말에 백천학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측천무후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측천무후궁에서 저를 납치했었어요. 그때 제게 말해 주더군요.”

“담 소저께서 납치를 당했었다는 말입니까?”

“예, 하지만 악 방주님께서 옆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어요. 그리고 담 소저가 아니라 담 군사로 불러 주세요.”

“전 담 소저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굳이 담 군사라고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백천학의 말에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이상하게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말이 거슬린 것이었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전 백 공자님과 공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어요. 사적인 자리도 아닌데 친근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럼 사적인 자리에서는 친근하게 대해도 된다는 말로 생각하겠습니다. 담 군사.”

“생각은 자유니까요. 그럼,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대해서 알아보았다면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오신 건가요?”

“정보 공유는 당연해야겠지요. 우린 같은 정파니까요. 그것보다 저는 악 방주와 협력 관계를 맺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와 협력 관계를 맺고 싶단 말입니까? 무림맹에서 아직 저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던데, 가능하겠습니까?”

악불군은 그의 의도가 이해가 안 되는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림맹이 아닌 저와 악 방주, 개인끼리의 약속을 하자는 것이지요.”

“중원 총순찰은 무림맹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로 알고 있는데, 그게 용납이 되겠습니까?”

“용납이 된다고 하면, 승낙하시겠습니까?”

악불군과 백천학의 눈이 마주쳤다.

백천학은 처음 악불군을 보았을 때부터 특별하게 생각해 왔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눈 때문이었다.

마왕급의 마두인 나백귀왕조차 그와 눈을 마주친 후 즉시 눈을 피했다. 심지어 그의 옆을 지나면서 떨기까지 했다.

하나 악불군은 아직 무공이 완성되지 않았던 강호 초출일 때 그를 만났음에도, 그의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억지로 버틴 것이 아니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림맹은 가용인력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굳이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 그런 제안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악 방주께서 공표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림맹에도 그들의 간세가 꽤 많을 것 같더군요. 천무성궁의 장로마저도 간세로 밝혀졌을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악 방주가 가장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뿐입니다.”

“백 공자님께서 저희를 믿어 주신다니 정말 큰 힘이 되네요. 그럼 어떻게 협력하면 될까요?”

“지금 정파를 방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백천학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담수련은 즉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번 강호행은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계획됐지만, 그 안에는 악불군을 잠룡세가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단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

담수련은 대화할 때의 말투와 내용 그리고 그때그때 나타나는 표정 속에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백천학은 몇 번을 만났지만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하나 그가 그녀를 보는 눈에는 확실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있기에 그에게서 어떠한 위험도 느끼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이유를 말해 주기 어렵다면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백천학은 담수련이 답이 없자 다시 말했다.

“지금 대화한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지지 않는다고 보장하실 수 있나요?”

“서로 간의 신뢰는 비밀 엄수에서부터 시작되겠지요.”

“좋아요, 그럼 말씀드리지요. 저희는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모아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담수련의 말에 놀란 것은 태극검자였다.

무림맹이 존재하고 있는데, 무림맹에 속하지 않은 정파의 조직을 만든다는 것은 무림맹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천호방은 무림맹 소속이 아니었고, 악불군은 무림 십왕의 지위까지 받은 혈기왕성한 젊은이였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당은 달랐다.

“설마, 무당도 동의했느냐?”

태극검자의 질문에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천천히 답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르신께서 무당파에 직접 물어보시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녀의 대답에 태극검자는 더 물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당에서 악불군의 제안을 받아들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상 사형께서 설마 악 방주를……. 아무래도 무당파에 들러 봐야겠구나.’

영웅회에서의 활약으로 태극검자라는 명호를 얻었지만, 그의 도명은 무송 진인으로 무상 진인의 사제였다.

“담 군사께서 후기지수들로만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백 공자님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럼, 그들을 조직한 이후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근거지를 알아낸 후 동시에 그들을 칠 생각이에요.”

“수십 년이 넘도록 찾아내지 못한 그들의 근거지를 찾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백천학의 반문에 담수련은 악불군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전 없어요. 하지만 악 방주님은 찾으실 수 있습니다.”

순간 백천학의 얼굴에 살짝 어둠이 나타났다. 악불군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 다정하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근거지를 찾게 되면 제게도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전 제가 직접 만나 본 분들만 평가합니다. 그래서 백 공자님은 믿을 만한 분이라고 판단했어요. 하지만 주위에 있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도 담 군사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좀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현기수사란 분이 저희를 무척 못마땅해하던데, 그건 아시나요?”

“현기수사를 만났습니까?”

“남궁 세가에서 태웅왕 선배님과 함께 만난 적이 있습니다.”

“보시기에 나쁜 사람 같았습니까?”

“무엇이 나쁜 사람이냐는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지만 저희를 적대시하는 분이라면 제게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현기수사는 맹주님께 대한 충성심이 너무 강한 것이 좀 문제이긴 하지요.”

“맹목적인 충성심이 있는 분이라면, 자신의 주군에 대한 불이익이 예상될 경우 매우 나쁜 행동을 벌일 수도 있어요.”

“그 문제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혈교와 측천무후궁 그리고 무림을 배신한 부역자들에 대한 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천년마교는 나타날 때마다 천하에 피바람을 일으켰습니다. 후신인 혈교 역시 같은 행태를 보일 것입니다. 그동안 천하는 너무 많은 피를 보았습니다. 더 이상 백성들이 힘든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혈겁은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백 공자님께서는 부역자를 처단하고 다니셨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혈겁이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세상에는 정의란 것이 있습니다. 나라를 배신하고 호의호식하던 자들이 나라를 되찾았는데도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천하를 활보한다면 어찌 세상에 정의가 있다 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힘들게 원나라와 싸운 분들과의 공정성도 생각해야겠지요.”

“맞는 말이네요. 정의와 공정이 없는 세상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지요. 저도 그 말은 동의하겠어요.”

담수련이 순순히 백천학의 말에 동의하자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느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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