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84화>
384화. 백천학(2)
“전 그래도 하나의 원칙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악불군의 말에 백천학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어떤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죄에는 경중이 있는 법이라고 봅니다. 특히 죄인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거 대상이 된다면, 그것도 정의와 공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 방주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경중을 누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악 방주께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없애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다면, 그 정도 자격은 주어지지 않을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악 방주께서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없애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신다면, 당연히 그런 자격이 생기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 준다면 제 목숨을 걸고 인정하도록 돕겠습니다.”
“공자님! 목숨까지 거실 필요는…….”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남자끼리의 약속인데 그 정도는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극검자 어르신께서 제 말에 대해 증인을 서 주십시오.”
“하아…….”
태극검자가 탄식을 하자, 백천학은 악불군을 보며 다시 말했다.
“대신 악 방주께서도 목숨을 걸고 약속을 하나 해 주시지요.”
“어떤 약속을 바라십니까?”
“정의에 입각해 정확하게 판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은 죄와 무림에 대한 공헌을 살펴 조금의 편견도 없이 정확하게 판단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아! 그런데 악 방주께서 만약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없애는 데 실패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반드시 성공합니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전 악 방주께서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실패하더라도 악 방주께 부역자들의 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어른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배려해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악 방주를 믿는 마음이 있고, 부탁도 하나 있어서 그럽니다.”
“부탁이요?”
“만약 실패하시면 제가 원하는 것 한 가지만 양보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가지신 백 공자님께 제가 양보할 것이 있겠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백천학은 미소만 지은 채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소군, 거절해.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담수련이 급히 전음을 보냈지만 악불군은 모른 척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정말입니까?”
백천학은 악불군이 생각보다 빨리 결정을 하자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이미 무림에서 큰 명성을 지니고 영향력까지 과시하고 있는 그가, 상관도 없는 부역자 문제로 어떤 양보를 원할지도 모르는데 허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큰 공을 세운다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양보할 필요도 없겠지요.”
“하하하! 정말 많이 달라지셨구려.”
처음 악불군을 봤을 때는 초출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 지금 보이는 모습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긴장은커녕 오히려 자신감까지 보였다.
“저희는 이제 움직일 시간이 됐습니다. 백 공자님께서 협력을 얘기하셨으니, 우선 연락을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얘기해 보시지요.”
담수련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끼어들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빨리 용건을 끝내고 가 달라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었다.
“협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으니 강화 방안은 좀 천천히 해도 되겠군요. 제가 악 방주께 연락할 경우 무림맹 순찰단원을 보내겠습니다. 제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개방에 연락을 바란다는 말만 전하십시오. 그럼 즉시 제가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주세요.”
“담 군사님께서는 제 제안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쌀쌀맞게 대하자 백천학은 서운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백 공자님의 제안은 아주 마음에 들어요. 하나, 천호방의 군사로서 분석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알겠습니다. 전혀 생각을 못 하셨을 테니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서로 간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동의가 이뤄진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백천학은 의외로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따라서 일어서자 백천학은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무림인이 아니었다면 악 방주와는 꽤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백천학과 태극검자가 떠나자 담수련은 삐진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악불군은 뭔가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을 느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식사부터 끝내시지요.”
“입맛이 없어!”
“혹시 화나셨습니까?”
“화 안 났어!”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을 본 악불군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그녀가 삐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먼 길을 가야 하는데 든든하게 먹어 둬야 버틸 수 있습니다.”
어찌 됐건 악불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건강이었다.
“내가 승낙하지 말라고 전음을 보냈는데, 왜 승낙했어?”
결국 그녀는 왜 자신이 삐졌는지 먼저 말하고 말았다.
“제가 양보할 것이 없으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백 공자는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야. 이유 없이 그런 것을 조건으로 걸 사람이 아니란 것을 몰라?”
“그는 지금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천호방을 세우고 이렇게 정파의 어르신들을 만나고 다닌 이유의 가장 큰 이유는 아가씨와 소가주님을 부역자라는 족쇄에서 빼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게 판단을 맡긴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
담수련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악불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소걸아가 그러더군요. 자신이 영웅회에 있을 때 가장 감탄했던 인물이 백 공자였다고요. 그러면서 맹주님을 설득할 수 있는 단 한 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바보……. 지금 자신의 명성이 얼마나 높아졌는데, 왜 가장 큰 이유가 나를 부역자에서 빼주는 게 되는 거야? 소군은 욕심도 없어?’
담수련은 나 같은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면 악불군이 매우 슬퍼할 것이 분명해서였다.
“알았어. 그런데 소군은 백 공자를 어떻게 보았어?”
“기운도 깨끗하고 내공도 매우 높습니다. 최소한 보타검각에서 보았던 검후와 비슷할 정도로 강합니다.”
“거기다 정파 무림의 절대자인 천제무황이 할아버지야. 어쩌면 현 무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뒷배로 두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어. 그런 자가 왜 갑자기 우리에게 협력하자고 했을까?”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없애지 않는다면 큰 후환이 될 거라고 느껴서일 겁니다. 최소한 오늘 그가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그자가 소군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양보해 달라고 하면 어쩔 거야?”
“불안하십니까?”
“천호방을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
“주면 되지요. 아가씨와 소가주님만 편해진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원래부터 명성이니 세력이니 하는 것은 전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난 괜히 불안해. 백 공자 같은 자가 굳이 원한다는 말까지 썼잖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없애는 데 가장 큰 공을 제가 세우면 되니까요.”
“자신 있지?”
“제가 아가씨 실망시켜드린 적이 있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악불군을 보는 그녀의 가슴은 또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 * *
“공자님, 오늘 일은 공자님답지 않으셨습니다.”
악불군이 있는 주루에서 좀 멀어지자, 태극검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다운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없애는 데 굳이 악 방주와 협력하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백천학은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해결하는 성격이었다.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대해 알고 나서도 그는 목표가 생겼다는 듯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며, 더 이상 무림이 유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들을 무너뜨리겠다고 태극검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자신에게조차 전혀 언질도 없이 악불군에게 협력을 하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혈교와 측천무후궁은 대단히 강한 조직입니다. 악 방주만이 아니라 무림 전체가 협력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하지만 악 방주는 무림맹에 허락도 안 받고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님께서 그와 협력하기로 한다면 무림맹에서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태극검자 어르신.”
“예.”
“태극검자께서는 무당파에서 악불군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 같으십니까, 아니면 거절했을 것 같으십니까?”
“그건……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전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당파는 맹주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배신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악 방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승적으로 옳다고 보았겠지요. 악불군, 그는 영웅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렇게 느꼈다면 다른 어르신들도 그렇게 느끼셨을 것입니다.”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는 즉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무림의 구성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백천학과 맞먹는 기도를 지닌 악불군에게 크게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면, 저도 공자님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공자님께서 천상신녀를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결정이 대승적인 결정이라면 공자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하나 그녀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면…….”
“태극검자 어르신, 전 공적인 감정과 사적인 감정 정도는 분간할 줄 압니다.”
태극검자는 백천학의 말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얘기할 때 지금처럼 끊은 적이 거의 없었던 그가 안 하던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구심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 * *
서찰을 읽던 혈우대마종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태양천이 다급하긴 한 모양이구나.”
“이번에는 또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태양천과 협력한다면 장강 이남을 본 교에게 넘기겠다고 하는구나.”
“장강 이남을요?”
“그래, 아주 큰 패를 내민 것 같지 않으냐?”
“태양천주는 그동안 계속 우리를 압박했습니다. 협력한다 해도 절대 장강 이남을 본 교에게 넘길 자가 아닙니다. 믿을 수 없는 놈들입니다.”
“넘길 놈이 아니긴 하지. 아마 그놈도 내가 이 제안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한 말일 게다.”
“주군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혈뇌.”
“예!”
“군사는 내가 아니라 너다. 대책은 네가 내야지, 왜 나한테 묻는 것이냐?”
혈우대마종의 말에 혈뇌는 신중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 계집들과 본 교는 절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 아니더냐?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다.”
“그럼 그 계집들과 연계할 수 있다면 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는 것입니까?”
혈뇌가 놀란 듯 반문하자 혈우대마종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의 대업을 계속 방해한 그 계집들과 어찌 연계하겠느냐?”
“연계하지 않는 이상, 저희는 무림 전체와 그 계집들까지 한꺼번에 상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정적으로는 아니지만, 책사로서 말한다면 태양천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그놈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뒤통수를 쳐도 그다지 미안할 일이 없겠지요.”
“그러니까 협력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뒤통수를 치자 그 말이냐?”
“그자가 본 교에 장강 이남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장강 이남을 책임지고 쓸어버릴 것이니, 태양천은 장강 이북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