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86화>
386화. 태동(2)
도화각주의 말에 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혈독불사마공이 십성에 이를 경우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무려 천년마교의 금지 마공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천년마교에서조차 금지 마공으로 지정해 익히지 못하게 한 이유는, 어느 순간 미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살인 마물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미룡세가의 가주였던 사도중명은 그 사실까지는 모르고 사도비류에게 시술했지만, 그 덕에 마물을 확보하게 되었으니 천후로서는 뜻하지 않은 소득이었다.
“사도비류의 통제는 아직 문제는 없느냐?”
“보고에 의하면 아직은 괜찮지만 십성을 넘어가면서 점점 통제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왕 사용할 거라면 아직 통제가 가능할 때 사용하는 것이 더 낫겠지. 언제라도 사도비류를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
“예!”
도화각주가 나가자 천후의 아미가 바짝 좁혀졌다.
“가벼운 변수 정도로 여겼던 악불군이 겨우 몇 달 만에 판세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되다니……. 도대체 그놈의 정체가 뭐야?”
잠룡세가의 정보를 아주 세세하게 받아 온 그녀는 악불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체가 뭐냐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악불군이 너무도 빠르게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 * *
제갈세가가 있는 호남 상향에 도착한 악불군은 실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무림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와 당문에게 무력으로는 좀 밀리지만 영향력 면에서는 오히려 두 세가를 넘어선다는 평을 받고 있는 제갈세가였다. 더구나 제갈세가는 대대로 무림 정파의 지낭 역할을 도맡아 왔다.
특히 진법과 기관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주님께서 친히 가문 밖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갈세가로 향하는 악불군의 옆에는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신산이 붙어 있었다.
“천하의 무림 십왕이 제갈세가에 친히 오셨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림맹의 군사이자 숙부인 제갈우명에게 이미, 악불군이 도착하면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대하라는 조언을 들은 제갈신산이었다.
“무림 십왕의 칭호는 황상께서 옛날의 작은 연으로 인해 내려 주신 것이지요. 제가 감히 가주님의 명성을 어찌 따르겠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제갈신산은 흡족한 미소를 그리며 받았다.
“악 방주께서 아무리 겸손하셔도, 이미 천하가 인정하고 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악 방주의 성정이 이리 바르니, 정파로서는 큰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불군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갈신산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제갈신책과 제갈신우조차 놀란 듯 서로를 쳐다볼 정도였다.
[가주 형님께서 저렇게 웃는 것은 오랜만에 보지?]
제갈신책이 놀랍다는 듯 묻자 제갈신우 역시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신산은 신중하면서도 생각이 깊어, 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말 아주 기분이 좋을 때, 만면에 미소를 짓는 것이 다일 정도였다.
“제갈세가가 양민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는지 알 것 같습니다.”
상향의 백성들이 제갈세가의 깃발을 보자 모두 고개를 숙이기는 했으나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악불군은 제갈세가에서 상당히 관대하게 백성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민에게 잘 대해 주는 무림 문파야말로 진정한 정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이니만큼, 제갈세가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원나라와 화룡세가에게 많은 착취를 당해 온 사람들인지라,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최대한 빨리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본 가 역시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갈신산의 말이 더욱 마음에 든 악불군은 조심스럽게 의중을 물었다.
“본 방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갈세가에도 상단이 있다면,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 어떻겠습니까?”
악불군의 제안에 제갈신산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악 방주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본가가 재건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원나라 이전엔 제갈세가 역시 상당히 규모가 있는 상단을 자체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권은 천하 사대상단이 완벽하게 쥐고 있어서 제갈세가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데 천하 삼대항 중 하나가 위치한 절강의 패자인 천호방에서 절강의 물품을 다른 상단을 끼지 않고 직접 제갈세가에 넘겨준다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될 것은 분명했다.
“제가 총단으로 돌아가면 즉시 제갈세가의 상단과 연계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이거, 찾아오신 손님에게 저희가 선물을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손님이 제게 큰 선물을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창방한 지 일 년도 안 된 신생 문파인 천호방이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제갈세가와 친분을 갖는다면 그 자체가 바로 큰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대단한 젊은이로구나……. 숙부님 말대로 내가 직접 나오기를 정말 잘했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배려를 느낀 제갈신산은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호법님, 제갈세가의 경계가 삼엄해 이곳에서 기습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루의 이 층에 앉아 상향의 전경을 구경하던 혈마전의 호법인 구지혈선은 전음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전의 군사 악뇌사심은 천마전의 기습 실패를 보고 받은 후, 한적한 곳에서의 기습으로는 악불군을 제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리고 나온 계책이 절대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장소에서의 기습이었다.
상향은 커다란 도시로 양민들의 통행이 매우 많은 편이었다. 더욱이 제갈세가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기습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가주인 제갈신산이 직접 마중을 나오면서 경계가 강화된 것이었다.
[다음 계획으로 변경한다.]
구지혈선은 두 번째 기습 장소로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두 번째 장소는 놀랍게도 제갈세가의 정문이었다.
제갈세가는 상향의 중앙에 세워져 있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시장 통하고 매우 가까웠다.
또한 제갈세가는 다른 문파들과 달리 정문 앞을 양민들이 통행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정문을 기습 장소로 정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모두에게 전하겠습니다.]
보고자가 사라지고 창밖을 보던 구지혈선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악불군과 제갈신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몸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풀어 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다행히 그들을 보는 것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주루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악불군의 행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구경꾼처럼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악불군과 제갈신산을 보던 구지혈선은 갑자기 느껴오는 서늘함에 깜짝 놀랐다.
‘살기? 누가 지금 내게 살기를 보내고 있다는 말인데…….’
분명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자, 구지혈선의 얼굴에 갈등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살기를 보낸 자를 파악하려면 내공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 순간 악불군이 감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불군과 제갈신산이 탄 말이 그가 있는 주루를 지나자 살기도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기를 끌어올리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 설마 저놈이…….’
구지혈선은 핼쑥한 표정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행렬의 뒤를 쳐다보았다. 그가 살기를 느낀 것은 악불군의 앞모습이 보인 후, 주루를 지나 뒷모습이 보일 때까지의 짧은 시간이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절묘했고, 아니라고 생각하기에는 살기를 느낀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이 걸렸다.
전체적으로 뿌려진 살기라면 당연히 다른 창으로 밖으로 보던 양민들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살기를 느낀 자가 없었음을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느낀 정도의 살기를 양민들이 느낀다면 최소 온몸이 바짝 얼 정도의 충격을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나를 알아보고 내게만 경고하는 살기를 보낸 것이라면, 우리는 상대가 안 된다.’
천마전에서 원로가 세 명이나 보냈음에도 실패하고 모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구지혈선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 *
악불군을 주시하고 있는 자는 구지혈선만이 아니었다.
제갈세가로 가는 중앙로에는, 말로만 듣던 천호무적검이 나타났다는 말에 수십 명은 족히 됨직한 기녀들이 몰려나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에서 나온 무사들이 길 주위에 서서 통제하고 있었지만, 이미 소문만으로 악불군에 빠진 기녀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히 손님들을 호객하듯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악불군의 늠름하고 잘생긴 얼굴에 기녀들은 황홀경에 빠진 듯했다.
추파를 보내거나 몽롱한 눈빛으로 보는 기녀는 다수였고, 심지어 기절할 듯 휘청이며 다른 기녀에게 몸을 기대는 기녀까지 있었다.
당연히 그녀들 사이에는 측천무후궁의 궁도들 역시 끼어 있었다.
[영주님,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녀들의 관심사는 악불군이 아니라 그 뒤를 따라 움직이는 마차였다.
[독을 넣을 방법은 없는 것 같으냐?]
[제갈세가의 무사들도 무사들이지만, 마차 주위를 호위하는 자들이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 영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차의 창문이 살짝 열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회라고 생각한 듯 급히 손을 털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작은 환(丸)이 하나 잡혔다.
그녀의 무공이라면 아무리 작은 창이라도 그 안으로 독환을 집어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창문이 열리자 두 명의 무사가 창 옆에 선 것이었다. 창으로 무엇인가 날아온다면 당장 받아칠 준비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주 훈련이 잘된 놈들이군. 조금의 허술함도 보이지 않고 있어…….’
마차가 결국 시야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주위에 있는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선 오늘은 일단 돌아간다. 곧 다른 명이 내려올 수도 있으니, 기루에 돌아가더라도 언제든지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
[예!]
[예!]
대답을 들어 보니 최소한 이십 명은 측천무후궁의 제자인 것 같았다.
* * *
제갈세가에 도착한 제갈신산은 곧장 정청으로 악불군과 담수련을 안내했다.
도착 후 회의부터 하자고 악불군과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제갈신산은 악불군을 예우하는 차원으로 중앙 상단의 가주 자리를 치우고 악불군의 정면에 가주 자리를 배치해 놓았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앉자 제갈신책이 일어서더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갈세가의 군사를 맡고 있는 제갈신책입니다.”
그는 그의 옆에 앉은 십여 명의 제갈세가의 간부들을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자 담수련이 일어섰다.
“저는 천호방의 군사인 담 군사입니다. 예전부터 제갈세가를 많이 동경해 온 저로서는 오늘의 방문이 마치 꿈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쁩니다.”
담수련의 말에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던 간부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제갈세가에서도 무림의 영웅이신 악 방주님과 담 군사의 방문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담이 몇 번 더 오간 후, 담수련이 드디어 용건을 꺼냈다.
다른 문파와 마찬가지로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대한 정보로부터 대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남무림에 혈교가 발호한 것 같다는 새로운 정보였다.
다른 문파와는 달리 남무림과 붙어 있는 제갈세가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은 급한 정보였다.
“그 정보는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제갈신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황상 저는 혈교가 행동을 시작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담수련은 소걸아에게 들은 정천보와 구천마성에 대한 정보를 자신의 분석을 붙여 설명했다.
“그렇다면 본 가에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됐다!’
긍정적인 제갈신책의 반문에 담수련은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