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87화>
387화. 구지혈선(1)
정파에서 지낭 역할을 도맡아 하는 제갈세가를 잡는다면 이번 강호행은 대미를 장식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담수련은 대화의 주도권을 어떻게 잡을까 고심했었다.
그런데 소걸아가 가져온 정보 덕에, 제갈신책이 오히려 그녀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묻고 있었다.
그녀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제가 취합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 정천보는 화룡세가의 위성 문파였습니다. 구천마성에서 정천보를 공격한 이상, 화룡세가와 싸움은 피할 길이 없다고 봅니다. 전 제갈세가에서 구천마성을 도와야 한다고 봅니다.”
담수련의 말에 제갈세가의 간부들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태양천이라는 공통의 적이 나타나고 중원 무림이 완전히 몰락하면서, 정파와 마도 간에 직접적인 싸움은 수십 년간 없었다.
하지만 무림의 천년 역사 중 정파의 주적은 마도와 사파였다.
이제 다시 중원 무림이 재건되는 상황에서 마도의 절대자인 구천마성을 정파를 대표하는 제갈세가에게 도우라고 말하니, 놀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담 군사께서는 무림의 역학 관계에 대해 아직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정파와 마도는 물과 불 같은 사이입니다. 절대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태양천에 무너질 때의 실수를 또 하실 생각인가요? 구천마성이 무너지면 남무림은 혈교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럼 다음은 어디일까요?”
담수련의 말에 모두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구천마성이 무너지고 남무림을 혈교가 장악한다면 가장 불안해질 세력은 점창파와 형산파 그리고 제갈세가였다.
제갈세가의 간부들의 눈이 제갈신책에게 향했다. 군사로서 생각을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담 군사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구천마성과 연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정파의 가장 문제점인 명분과 체면이 제갈세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담수련은 이미 제갈세가의 반응을 예상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방주님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부터 말씀드린 후에 남무림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갈신책은 그들의 강호행이 남무림의 상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천호방에서 혈교와 신비 조직에 대해 공표한 것은 아시지요?”
“보내 주신 서찰은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읽었습니다.”
“방주님께서는 혈교와 신비 조직, 그러니까 측천무후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신 후, 많은 고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담수련의 설명은 무려 삼각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간부들은 누구도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드디어 담수련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신비 조직이 측천무후궁입니까?”
제갈신책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문제는 혈교 역시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던 제갈신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담 군사.”
“예, 가주님.”
“혈맹지약을 맺은 문파가 몇 개나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로 하기로 이미 약조한 뒤입니다. 제갈세가 역시 제안을 받아들이시건 받아들이지 않으시건 비밀로 할 것입니다.”
제갈신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악 방주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순간 제갈세가의 간부들, 모두는 놀란 눈으로 제갈신산을 쳐다보았다.
제안한 사람이 악불군인데 그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묻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태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만약 저라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럴 만한 이유를 세 가지만 말해 보시겠습니까?”
“제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겠습니까?”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십시오.”
“지금 제갈세가는 아직 예전의 성세를 찾지 못했습니다. 호남에는 여전히 사파 세력이 사방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오면서 알았습니다.”
“…….”
제갈신산은 입술을 꾿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일 뿐 반박하지 않았다.
“가장 큰 위협 세력인 화룡세가가 여전히 호남 남부에 건재하지만 아직 그들을 소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담 군사 말대로 혈교까지 모습을 드러낸다면 또다시 큰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갈세가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듣고 있던 제갈신책이 결국 반박을 하고 말았다.
“천하에 누가 제갈세가가 약하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강하고 약하고는 상대적입니다. 혈교와 측천무후궁은 한 문파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합니다.”
제갈세가에서도 측천무후궁이 보낸 혈교에 대한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천호방과 혈맹지약을 맺으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도움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뭐든 물으십시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손수 강호를 돌아다니며 각 문파와 혈맹지약을 맺고 다닌다면서 무림맹을 먼저 방문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무림맹은 본 방을 아니, 저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무림맹은 제가 그리 탐탁지 않은 모양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악 방주께서 하시는 일은 누가 보아도 정의라는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은 무림맹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최소한의 타격을 입히려면 그들도 모르게 움직일 수 있는 타격대가 필요합니다. 하나, 현재 무림맹은 비밀을 지키기에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무성궁의 장로 한 분이 간세로 판명된 사건은 알고 계시지요?”
결국 무림맹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제갈우명 숙부님께서 천호무적검이 무림맹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군.’
제갈신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의 귀에 제갈신책의 전음이 들려왔다.
[형님, 제 추측이 맞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문파 모두 천호방과 혈맹지약을 맺은 것 같습니다. 본 가도 맺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갈신책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분석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좋습니다. 무림 십왕에 봉해지고 천륭검가의 후계자인 악 방주를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혈맹지약을 맺도록 하시지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제갈신산의 답을 듣던 담수련은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절강성 주위의 가장 강력한 정파 모두와 혈맹지약을 맺은 것이다.
그녀가 혈맹지약을 맺은 문파들은 무림에 영향력이 강한 문파들 중 절강성에서 가장 가까운 문파들이었다.
“가주님께서 저희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불군이 공손히 포권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담수련이 끼어들었다.
“그럼 아까 하던 말을 끝내겠습니다. 제갈세가에서도 측천무후궁에서 보내온 혈교에 대한 정보를 보셨을 것이니 대충은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남무림에서 혈교가 발호했지만, 제 분석에 따르면 호남에도 혈교의 또 다른 세력이 있습니다.”
“그 말은, 본 가의 세력권 내에서도 혈교가 발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솔직히 저의 예상보다 좀 빨랐어요. 하지만 남무림에서 시작한 이상, 다른 곳도 곧 시작할 것입니다.”
“그럼 구천마성을 도우라는 말은?”
“제갈세가에서 구천마성과 직접적으로 연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혈맹지약을 맺으셨으니 저희가 주는 정보를 믿고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구천마성과의 연계는 천호방이 할 거니까요.”
“천호방에서 구천마성과 연계한다면 악 방주의 명성에 흠이 될 것인데, 그래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오?”
“사악한 자들을 없애는 일인데 명성 따위가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듣고 있던 악불군은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언했다.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명성에 연연하지 않겠다……. 정말 보기 드문 청년이로고.’
제갈신산은 물론 모든 간부들은 탄복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무림인들에게 명성은 목숨 이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의 부언이 모두에게 신뢰를 주자, 담수련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구천마성은 이미 본 방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습니다. 저희가 그들에게 혈교와의 싸움에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면 분명 많은 정보를 저희와 공유할 것입니다. 그때 저희가 그 정보를 제갈세가에 보내겠습니다. 출동할 것인지 아닌지는 가주님께서 결정해 주시면 됩니다.”
* * *
“구지혈선, 아까부터 왜 그래?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구지혈선이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혈마전에서 같이 나온 다섯 명의 원로 중 한 명인 광혈귀가 물었다.
“사실은 어제 낮에 악불군이 오는 것을 봤어.”
구지혈선은 자신이 느꼈던 살기에 대해 말했다.
“천하의 구지혈선이 잠깐 느낀 살기 때문에 이렇게 심각하다니, 다른 친구들이 들으면 웃는다.”
광혈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게 그렇지 않아. 순간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정말 간단히 죽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자 듣고 있던 적양마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말 악불군이 보낸 살기라고 생각하는 거냐?”
“……솔직히 나도 아직 긴가민가하고 있다. 하지만 악불군이 정말 나를 콕 집어 보낸 살기라면 이번 임무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이미 공격 준비를 다했는데 지휘를 맡은 네가 이렇게 흔들리면 어떻게 하냐? 죽음을 각오하고 악불군의 목을 반드시 가지고 오라는 혈마종 님의 명을 잊지 마라.”
적양마장의 말에 구지혈선은 급히 정색하며 말했다.
“혈마종 님의 명을 잊지는 않았으니 걱정 마라.”
[호법님! 제갈세가의 움직임이 빨라졌습니다. 아무래도 악불군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혈마단 대주 우성종의 전음이 들려왔다.
[알았다. 우리도 곧 출발할 테니 모두 계획대로 준비해라.]
[예!]
* * *
“가주님께서 현 입구까지 마중을 나와 주신 것만도 황송한데 배웅까지 나오시면 정말 저희가 너무 죄송해서 안 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아침 식사를 마친 악불군과 담수련은, 제갈신산이 같이 나오려고 하자 극구 사양했다.
“허허허~ 알겠네. 그럼 정문 앞까지만 가겠네. 돌아가는 대로 연락을 주게.”
하룻밤 동안 많이 가까워진 듯, 제갈신산은 말까지 편하게 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지금 위기를 넘기려면 빠른 전달 체계와 공조가 가장 중요합니다. 도착하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악 방주를 만난 후, 든든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걸 보면 정말 잘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
“너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갈신산과 악불군이 나오는 양옆에는 제갈세가의 제자들이 양쪽으로 도열한 채로 서 있었다. 실로 대단한 예우였다.
정문 앞에는 대독관이 수하들과 함께 마차를 둘러싼 채 대기하고 있었다.
사화는 담수련이 나타나자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길 좌우에는 길을 오가던 수많은 양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정문에 선 제갈신산을 비롯한 간부들에게 포권을 했다.
이미 악불군을 호위하는 천호방도들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더구나 제갈세가의 가주를 비롯한 최고 고수들이 다 모여 있었고, 최소 삼십 명이 넘는 제갈세가의 제자들이 주위를 통제하고 있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제갈세가의 안에서 수백 명의 제자들이 튀어나올 것은 자명했다.
기습을 성공해서 악불군을 제거한다 해도 기습한 자들이 살아서 도망을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공격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을 못 할 것이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허를 찌르는 계획이었지만 수하들의 목숨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악뇌사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못 한 것이 있었다. 악불군은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을 풀지 않도록 철저한 호위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