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88화>
388화. 구지혈선(2)
“태후님, 주원장이 마 황후의 주변을 환관들로 채우면서 본 궁의 조직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수정각주의 보고에 태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태후의 시선이 옆으로 향하자 홍옥각주가 입을 열었다.
“남경에 구축된 본 궁의 조직 중 여덟 곳이 금의위의 공격에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태후의 볼 살이 흔들렸다. 화가 더 난 것이다.
그러자 마지막 남은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장군 김민전이 역모로 몰려 뇌옥에 갇히고, 그가 이끌던 군 조직이 모조리 해체되었습니다.”
“그게 다냐?”
“…….”
드디어 태후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쾅!
결국 화가 폭발한 태후의 손이 앞에 있는 책상을 내려치고 말았다.
완전히 가루로 변한 책상을 세 명의 각주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동시다발적으로 본 궁과 연관된 조직만 공격을 당한다는 것은, 주원장이 뭔가를 눈치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주원장이 어떻게 알게 됐고 누가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하지 않느냐!”
“주원장 거처의 경계가 너무나 삼엄하고 그의 심복들만 드나들 수 있는 관계로 아직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하나 곧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낼 것입니다.”
홍옥각주가 이마를 바닥에 대며 급히 말했다.
“시작이 잘못됐어. 시작이…….”
태후는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군들이 원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났을 시기, 태후는 모든 반군에 측천무후궁의 간세들을 심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원장의 주변에도 간세를 심었다. 하지만 비중이 달랐다.
처음 반군들이 세력을 넓혀 갈 때, 가장 세력이 큰 자는 유복통과 진우량이었다. 그래서 그 둘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고, 측천무후궁 궁도를 그들의 후궁으로 심어 놓는 데 성공했다.
그런 행보를 보인 이유는, 주원장이 이길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것이었다.
대세가 주원장으로 기운 이후 급히 간세들을 심었지만, 이미 주원장의 주위에는 측천무후궁과 상관이 없는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거기다 주원장은 마 황후 외에는 여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패황인 그가 뜻밖에도 애처가였던 것이다.
각주들은 그녀의 탄식을 듣자 더욱 겁을 먹은 듯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만약 악불군이 주원장에게 정보를 전해 주었다는 사실을 태후가 알았다면 아마 분노가 더욱 커졌을 것이었다.
* * *
제갈세가의 가주 집무실.
상석의 제갈신산을 중심으로 간부들이 양옆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했다.
“신책아.”
“예, 가주님.”
“그자들의 정체는 알아냈느냐?”
“무림에 이름이 알려진 자는 적양마장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르는 자들입니다.”
제갈신책의 말에 간부들의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렇게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악 방주 말대로 혈교의 인물들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갈신욱의 말에 제갈신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천마성이나 혈해사계의 마두들은 대부분 무림에서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오늘 너희들이 본 악 방주의 무공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더냐?”
제갈신산이 모두에게 묻자 잠시 침묵이 집무실을 감돌았다.
양민들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혈마단의 공격에, 주위를 통제하던 제갈세가의 제자들은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임을 당했다.
삼십여 명에 달하는 일류급 고수들의 공격에 십여 명의 제갈세가 제자들이 비명과 함께 피를 뿌리며 죽어 나가자 구경을 하던 양민들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고, 곧 사방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장소로 변해 버린 것이다.
혈마단은 거침없이 반은 마차를 지키는 천호방도들에게 달려들었고, 나머지 반은 제갈세가의 정문을 향하여 돌격했다.
제갈신산의 뒤에 서서 악불군과 인사하던 간부들은 급히 제갈신산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의 일직선상에 제갈신산과 악불군이 있어, 제갈신산을 노린다 생각했던 탓이었다.
곧 제갈세가의 비상타종이 울리고 수십 명의 제자들이 달려 나왔다.
하지만 혈마단의 공격은 곧 막히기 시작했다. 흑석영과 사효조 등 비밀 호위를 맡고 있던 호법들과 천호특별단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들은 주위에 적이 있다는 악불군의 전음에 곧장 방비에 들어갔으나 간발의 차이로 조금 늦어 제갈세가의 제자들이 죽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하나 더 이상의 희생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혈마단의 공격은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한 성동격서(聲東擊西)였다.
제갈신산을 보호하던 제갈세가의 간부들은 갑자기 몰려 오는 엄청난 마기에 경악을 했다.
한 명 한 명이 마왕급의 고수인 구지혈선을 비롯한 다섯 명의 혈마전 원로들의 합공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제갈신욱과 제갈신명 그리고 제갈태선이 그 공격을 받기 위해 급히 검을 휘둘러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곧 그들은 그 공격이 악불군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혈기와 묵기 그리고 단번에 바위라도 갈라 버릴 것 같은 위력의 도가 악불군에게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신산에 대한 암살 시도가 아닌 것에 안도할 시간도 없이, 제갈신명은 악불군을 돕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곧 번쩍하는 섬광을 보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정확히는 뭔가 부드러운 기운이 그를 밀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콰광! 쾅!…….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제갈세가의 거대한 정문이 우르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담수련을 꼭 껴안은 악불군의 모습이 보였고, 그의 손에는 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다섯 명의 마기를 풍기는 마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치명상을 입은 듯 온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천륭검가의 후손답게 검의 경지가 거의 신경에 든 것 같지 않더냐?”
제갈신산은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 감탄의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처음 보는 검식이었습니다. 분명 공격은 다섯 곳에서 들어왔고 악 방주의 검은 그냥 일직선으로 내려꽂힌 것 같은데, 어찌하여 다섯 명이 모두 검에 당한 것인지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제갈신명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받자 제갈신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무공 수준이 거의 무황급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혈맹지약은 본 가에게 이익이 되면 됐지 손해는 아닐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제갈세가의 확고한 방향이 정해졌다.
인정은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던 마지막 의구심이, 악불군의 무공을 본 후 확실한 믿음으로 변한 것이다.
역시 무림은 힘이 가장 큰 발언권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사실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 * *
제갈세가의 피습 사건은 또 한 번 악불군의 명성을 올려 주었다.
더구나 그 소문의 발상지가 제갈세가라는 것이 그 신뢰성을 높혔다.
이제 천하의 모든 호사가들의 입담에서 천호무적검이 빠지면 인기가 없을 정도로, 그의 이름은 사방에 퍼지고 있었다.
이미 양민들 사이에서 천호무적검은 무황을 넘어 천하제일 고수가 되어 있었다.
상향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한 악불군은 강서의 경계에 위치한 예항에서 배를 내렸다.
예항에는 배가 다가오자 수십 명은 됨직한 무인들이 항구의 길목을 막고 양민들의 출입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천호무적검 악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전 강서 명설무관의 관주인 명설검 현중권입니다.”
“저는 조은문의 문주인 오상돈이라고 합니다.”
악불군이 배에서 내리자 네 명의 중년인이 다가와 공손히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천호방 방주 악불군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악불군은 이미 이런 상황은 여러 번 겪었지만 짐짓 모른 척 물었다.
“저희는 예항 주변에 위치한 정파들입니다. 정파의 영웅이신 악 대협께서 오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저희들이 공동으로 예항에 주루도 예약해 놓았고 객잔도 준비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들에게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작은 문파나 무관들에게 무림의 고수들과 안면이 있다는 것은 영광을 떠나 힘이 될 때가 있었다. 위기에 닥쳤을 때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을 천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안면을 익힌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벼운 대화라도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든다면, 그땐 안면 정도가 아니라 친분이 있다고 소문을 낼 수도 있었다.
악불군이 도착하는 곳마다 군소 문파와 무관의 관주들이 몰려와 그에게 눈도장이라도 찍고 자신의 이름이라도 알리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배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출출했는데, 식사까지 준비하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가시지요.”
이전까지 악불군은 이유 없는 호의는 싫다거나, 폐를 끼치는 것은 안 된다는 이유로 무조건 거절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친분을 다지는 중요한 요식 행위라는 담수련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단지 식사를 같이하고 대화 몇 마디에 자신의 우군을 늘릴 수 있다면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중원의 무림은 거대 문파들이 지배하지만 실질적인 힘은 군소 문파와 무관들이라고 했다.
그만큼 군소 문파와 무관들은 수가 많았다.
다른 고수들과는 달리 악불군이 그들의 뜻을 받아주자, 그들은 환해진 얼굴로 주루로 천호방도들을 안내했다.
* * *
“악불군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구지혈선 등 악불군을 제거하러 간 수하들이 전멸 당했다는 말에 극노한 혈마종은 커다랗게 소리쳤다.
“지금 상향에서 배를 타고 강서성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고로는 예항에 내릴 것 같습니다.”
악뇌사심의 보고에 혈마종은 그를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악뇌사심! 터진 입이라고 대답은 잘하는구나. 내가 반드시 죽이라고 했거늘, 어떻게 준비했길래 오히려 전멸당한 것이냐?”
혈마종의 살기 어린 물음에 악뇌사심은 죄송하다는 듯 머리를 한 번 숙이고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동안 들어온 정보와 천마전의 실패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다섯 명의 원로와 혈마단 한 개 대라면 제거가 가능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제 분석이 너무 안이했습니다.”
혈마종은 다혈질이며 대단히 잔인하고 충동적인 자였지만 악뇌사심은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곧 그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지금 그것을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주군, 천마전에서 악불군이 호북을 넘기 직전에 공격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무슨 의미냐?”
“저도 처음에는 악불군이 너무 강해 실패했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공격이 실패한 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 무슨 생각?”
“천마전에서는 악불군의 무공이 예상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본 전에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악불군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모습만 교주님께 보여 주고, 본 전의 세력권으로 넘어가도록 한 것이지요.”
“네 말은 천마종 그놈이 악불군의 손을 이용해 본 전의 힘을 빼려고 했다는 말이냐?”
“나채현은 잔머리가 대단한 놈입니다. 그러고도 남습니다. 제가 이번에 보낸 전력은, 악불군을 죽이면 성공이고 실패해도 본 전에는 크게 타격이 안 될 정도만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더 이상 악불군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더 이상 악불군을 공격하지 말고 놔두자는 것이냐?”
“예!”
“교주님께서 악불군의 제거를 재가하셨다. 거기다 이번 공격이 실패했는데 그냥 둔다면 다른 마종들이 내가 겁을 먹었다고 조롱할 것이 아니냐?”
“교주님께서 악불군을 제거하라고 명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재량에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본 전에서도 비록 실패는 했지만 공격은 했으니 체면치레는 한 것입니다. 천호방의 총단은 절강성입니다. 바로 천마종의 영역입니다. 그냥 놔두면 천마종이 맡아야 하는데 본 전에서 손해를 보면서 굳이 더 공격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악뇌사심을 말이 끝나자 혈마종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말을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다. 내가 천마종 그놈의 장단에 맞춰 줄 필요는 없지. 역시 너는 내가 믿을 만해.”
악심마뇌의 예상대로 혈마종의 화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