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89화>
389화. 불화(1)
“군주님, 온 단주가 전서를 받고는 급히 소천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소천주는 어디에 있느냐?”
“집무실에 계십니다.”
금령사자의 보고에 금잔화는 벽을 열었다.
비밀 벽 안에는 몇 개의 관이 있었다.
금잔화는 그중 하나를 빼더니 자신의 귀에 댔다.
철무정의 집무실에서 하는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소리관이었다.
온금하가 건넨 봉서를 연 철무정은 안에 든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어려운 명령이 내려왔습니까?”
철무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찰을 내려놓자, 온금하가 불안한 듯 물었다.
“천주님께서 드디어 오신다고 한다.”
“천주님께서 오신다면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명을 내리셨다.”
“무슨 명이신데……?”
그들의 대화를 듣던 금잔화는 귀에서 관을 뗐다.
‘갑자기 대화를 전음으로 바꿨어. 내가 듣고 있는 건 모르는 게 분명한데도 전음으로 바꿨다는 것은 진짜 조심스러운 정보를 나눴다는 의미인데……’
금잔화가 아무 말도 없자, 금령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대공 전하께서 오실 모양이다.”
“어차피 오실 것은 예상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예상은 했지…….”
‘태양전사들이 완벽하게 경계하고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왜 갑자기 전음을……. 설마?’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하던 금잔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금령사자!”
“예! 군주님.”
“금령단을 비상 소집해서, 내 거처를 지키고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예? 갑자기 그게……”
“당장 명대로 해라. 소천주나 온 단주가 와도 지금 내가 외출 중이라고 말하고,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라.”
금령사자는 갑작스러운 명령에 어리둥절했지만, 다급한 그녀의 모습에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금잔화는 집무실과 붙어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곳을 잡아당기자 침상이 움직이더니 바닥에 시커먼 통로가 나타났다.
그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며 온금하의 외침이 들리자, 그녀는 급히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침상이 다시 움직이더니 원래대로 변해 버렸다.
* * *
태양전사 오십여 명을 끌고 나타난 온금하는, 금령사자가 금령단과 함께 그의 앞을 막자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무슨 일이시기에 갑자기 태양전사들을 이렇게 많이 끌고 오신 것입니까?”
“소천주께서 금령군주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다.”
“지금 군주님은 외출 중이십니다.”
“금령군주께서 나가셨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는데 무슨 소리냐?”
“군주님께서 나가시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금령사자가 쉽게 비켜 줄 것 같지 않자 온금하는 대로하며 버럭 소리쳤다.
“금령사자, 당장 비키지 못하느냐! 네가 아무리 금령군주님의 심복이라 해도, 태양전사단의 행사를 방해하면 죽을 수도 있다!”
챙!
챙……!
온금하의 고성에 맞춰 태양전사들이 모두 무기를 빼들었다. 그러자 금잔화가 직접 키운 금령단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무기를 빼들었다.
“지금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온금하는 금령단이 무기를 빼는 것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금령단은 금령군주님의 명만 듣습니다. 온 단주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천주님의 명은 금령군주의 명에 우선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순간 금령사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천주님의 명이라니, 무슨 말이십니까?”
“지금 우리는 천주님의 명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당장 비켜라!”
천주의 명이라는 말에, 금령단의 무사들은 불안한 눈으로 금령사자를 쳐다보았다.
“천주님께서 무슨 명을 내리셨기에 이렇게 많은 태양전사단을 끌고 오신 것입니까?”
“금령사자, 정말 죽고 싶으냐?”
온금화의 눈에 살기가 번뜩했다.
“저 역시 천주님의 명에 따라 군주님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못 비키겠다는 것이냐?”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금령사자의 얼굴이 탈색했다.
태양전사단이 양 옆으로 비키며 통로가 만들어지자, 철무정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 소천주님……”
“천주님께서 금령군주의 지위를 박탈하고 체포하라고 하셨다. 당장 무기를 거두지 않는다면 모두 죽는다.”
철무정의 싸늘한 목소리에 금령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금잔화의 거처를 한 번 보았다.
방금 전까지 웃고 지내던 태양전사들의 서슬 퍼런 모습에 금령단원들은 모두 주눅이 들고 있었다.
“천주님의 명이라신다. 모두 무기를 거두고 길을 터 드려라.”
금령사자는 결국 무기를 거두며 금령단원들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철무정이 고개를 살짝 움직이자, 온금하와 태양전사들은 금잔화의 집무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온금하는 아무도 보이지 않자 침실문을 보며 수하들에게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금잔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는 그로서는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네 명의 태양전사들은 온금하를 보며 보고했다.
“단주님, 아무도 없습니다.”
수하의 말에 온금하는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빈 방이 그가 들어왔다고 달라질 리는 만무했다.
“금령군주가 밖으로 나간 흔적은 없었다. 샅샅이 뒤져라 분명 비밀 통로가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예!”
‘역시 금령군주답군,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온금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듯 말했다. 그가 철무정에게 오기 전, 대공은 그에게 생각지 못했던 말을 했었다.
금령군주를 제압할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처음 그는 그 말을 들으며 어리둥절했다. 대공이 금령군주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어머니가 색목인 출신의 후궁이었지만 엄연한 황족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를 제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니,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금령군주는 요기를 가지고 태어난 애다. 그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너희들은 오히려 죽는다. 그러니 그 아이를 제압할 때는 절대 그 아이의 눈을 보면 안 된다. 그리고 머리가 대단히 뛰어난 아이이니, 내가 명을 내리면 속전속결로 제압해야 한다.
철무정과 온금하가 대공의 서찰을 받자마자 즉시 금잔화의 거처부터 포위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움직였지만 이미 그녀는 눈치채고 도망을 친 것이다.
“사라졌다고!”
보고를 듣고 급하게 안으로 들어선 철무정은 화가 많이 난 듯했다.
사실 그는 금잔화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계속 무시하고, 소천주가 된 후에도 여전히 눈 아래로 보는 것에 상당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를 자신의 발밑에 엎드리게 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금잔화를 제압하여 가두라는 대공의 서찰을 받자 그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었다.
상당한 기대를 품고 달려왔던 그로서는 분노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단주님, 이것 좀 보십시오.”
집무실을 조사하던 수하 한 명의 외침에 달려간 철무정은, 부서진 벽 속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관을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뭐냐?”
온금하는 관들을 살피더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리관입니다. 소천주님, 금령군주께서 소천주님과 저희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교활한!”
철무정은 얼굴이 뻘게졌다. 지금까지 금잔화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닫자, 견딜 수 없는 치욕감이 몰려든 것이다.
“단주님! 이곳입니다.”
그때 침실 쪽에서 또 다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무정과 온금하는 급히 침실로 달려갔다.
뒤집혀진 침실의 밑에는 강철판이 깔려있었다.
“부숴라!”
“소천주님,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치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얼마나 걸리느냐?”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걸릴 것입니다.”
“이이이이익!”
철무정은 주먹을 꽉 쥐며 분한 듯 침음성을 뱉었다.
하루의 시간이라면 금잔화를 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 * *
태홍장에 도착한 악불군은 마음이 무거웠다. 태홍장을 돕기 위해 달려온 천호방 상산분타의 많은 방도들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폐허로 변한 태홍장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휴우~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 같네?”
무너진 전각과 박살난 문, 화재로 인해 검게 그을린 기둥들을 보며 담수련은 안 됐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보고에 따르면 최소 이백 명은 죽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열 살도 안 된 아이들도 여러 명이라고 하더군요.”
“어찌 됐건 무림 세력이니 이런 혈겁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도대체 그 어린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다고 다 죽였을까?”
담수련의 목소리에는 큰 분노와 슬픔이 배어있었다.
“방주님.”
그때 사효조가 다가왔다.
“말하십시오.”
“주위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싸움다운 싸움도 없었습니다.”
“그냥 학살 수준이었다는 말입니까?”
“태홍장과 습격한 자들 간에 무공의 수준 차이가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 판단을 한 이유가 있나요?”
듣고 있던 담수련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태홍장 사건이 일어난 것이 거의 한 달 전이었다. 그동안 비도 여러 번 왔고 곳곳에 자란 잡초와 수북하게 먼지가 덮여 있는데, 무엇을 보고 그런 분석을 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주위에 남아 있는 무기 흔적과 파괴된 물건들을 보면, 비등한 전력을 가진 자들의 싸움인지 일방적으로 당한 싸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나 배웠네요.”
매우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담수련은 금방 이해한 듯했다.
“사 호법.”
“예, 방주님.”
“어느 문파의 수법인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천입니다.”
태양천이나 어찰단과 같이 협공을 자주 했던 백인막은, 태양천의 수법에 대해 천하에서 가장 잘 아는 조직 중 하나였다.
“추적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지요?”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해도 흔적은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비가 여러 차례 온 것 같습니다.”
추적의 가장 큰 적은 비라고 할 수 있었다.
“상산분타주께서 삼십여 명의 방도들을 이곳에 데리고 왔었다고 했지요?”
“예.”
“분타주님은 백인막에서 일급 살수셨고요?”
“그렇습니다.”
“방도들 실력과 이곳 태홍장의 무사들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날까요?”
“분타주 빼고는 대부분 이류 무인들이었습니다. 아마 태홍장의 무인들과 비슷한 실력이었을 것입니다.”
담수련은 장원을 둘러보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이곳을 기습한 자들은 최소한 사십 명이 넘어요. 그렇게 많은 자들이 움직였는데 목격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사십 명이 넘는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악불군의 의아한 듯 물었다. 마지막 생존자였던 태홍장의 장주는 의원이 열심히 상처를 치료했지만 기습한 자들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말하지 못하고 결국 죽었다.
심한 부상을 입고 상산까지 달려온 바람에 도저히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덧났기 때문이었다.
태홍장을 가장 먼저 조사했던 개방 역시 기습한 자들에 대해 알아낸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담수련은 단언하듯이 최소 사십 명이라고 말했다.
“일급 살수인 상산분타주께서 삼십 명이나 되는 방도들이 있었는데 도망도 치지 못하고 죽었잖아. 그렇다면 그들의 무공 수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어. 그리고 이곳 장원의 크기와 태홍장 무사들의 무공 수위로 미루어, 이백 명 가까이 죽을 동안 한 명도 도망을 치지 못했다면 최소한 사십 명은 넘는다는 계산이 나오네.”
그러나 숫자를 안다 해도 이미 사라진 범인들의 정체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녀의 말을 듣자 어떤 상황인지 즉각 알 수 있었다.
“사 호법.”
“예!”
“이곳을 기습한 자들은 최소한 사십 명입니다. 그렇게 많은 수가 움직였는데 목격자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담수련은 태홍장의 멸문에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