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91화>
391화. 대공(1)
문이 열리고 머리와 수염까지 은백색인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노인을 보자 철무정과 온금하는 급히 부복했다.
“철무정, 천주님을 뵙습니다.”
“온금하, 천주님을 뵙습니다.”
대공은 부복한 둘을 무심히 쳐다본 후 중앙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앉아라.”
철무정과 온금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대공은 아무 말 없이 둘을 지그시 쳐다볼 뿐이었다.
하나 둘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엄청난 압박으로 느껴졌다.
결국 온금하가 다시 부복을 하며 말했다.
“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금령군주가 너희들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죄송합니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소리관까지 만들어 놨을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다. 어차피 너희들이 금령군주를 잡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 아이가 간세였음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았다는 게 중요하다.”
“금령군주가 간세였습니까?”
철무정은 놀란 듯 반문했다.
“태양천 안에도 분열과 내분을 획책하는 자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놈들이 누구인지 추적했지만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자들은 황실까지 망쳐 버렸지. 그래서 난 모든 편견을 버리고 다시 모든 상황을 분석했다. 그러면서 사건 때마다 연관이 없는 자들을 한 명 한 명 지워 나갔다.”
대공은 태양천마저 내분에 휩싸이자 구대전왕을 한 명씩 찾아가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신뢰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생긴 의심이라면 되돌릴 수 있지만, 오랜 기간 작은 의심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불신은 그의 회유만으로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 간세 년을 반드시 잡았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철무정이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령군주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소천주는 지금부터 내 명을 따라 일을 처리해라.”
“명만 내리십시오.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대주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주님, 누군가 장원 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나가서 처리하고 오너라.”
대공의 말에 부복하고 있던 온금하는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갔다.
보고한 대주는 온금하가 나오자 급히 예를 갖췄다.
“이쪽으로 오는 것이 분명하냐?”
“그렇습니다. 확인해 본 결과, 개방의 거지 놈들로 보입니다.”
“지겨운 놈들이군. 스스로 죽음을 찾아온 놈들이니 살려 둘 필요 없겠지. 모두 죽여라.”
“존명!”
* * *
“이런 깊은 산속에 장원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까?”
개방의 상문개는 자신들을 안내하는 무관의 무사에게 다시 물었다.
“약초꾼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저희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장원을 짓기도 힘들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깊은 숲속이었거든요. 하지만 숨어 살기에는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형,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보고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때 상문개의 뒤를 따르던 천강개가 전음을 보냈다. 소걸아는 은밀하게 사람이 숨어 사는 곳을 찾으라는 명을 하면서, 절대 가까이 가서 조사는 하지 말라고 했었다.
[확실히 있는지를 알아야 보고를 하지. 만약 보고했는데 사실이 아니라면 어떡하냐?]
상문개의 말도 일리는 있는지라, 천강개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 죽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악불군을 만나 무슨 말을 했느냐?”
천제무황의 말에 현기수사와 천무사왕은 백천학을 쳐다보았다.
그가 악불군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왔는지에 따라 무림맹의 대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와 협조 체제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순간 현기수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공자님, 아쉬운 것은 악불군인데 어찌 공자님께서 먼저 그런 제안을 하신단 말입니까?”
“어험!”
현기수사의 말에 천제무황은 불쾌한 듯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군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다만…….”
“진격아. 지금 천학이와 대화 중이다. 말이 끝난 후, 의견을 말하거라.”
천제무황의 말에 현기수사는 결국 입을 닫고 말았다.
“천학아.”
“예, 맹주님.”
“그런 이유가 있느냐?”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대의를 따라야 한다고 맹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맹주님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악불군에게 협조하는 것이 대의라는 말이냐?”
“악 방주에게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악 방주와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게 차이가 있느냐?”
“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제무황은 다시 물었다.
“대의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그냥 놔둔다면 무림은 백 년 전의 상황이 다시 벌어질 것입니다. 당시 혼란은 모든 문파가 이기심 때문에 공통의 적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습니다. 전 그런 상황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는 악 방주와 협조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악불군과 협조하지 않고도 무림맹을 잘 정비하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
“그들은 이미 암중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암중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림맹의 방식은 너무 느리다는 것이 제 판단이었습니다. 더구나…….”
백천학이 잠시 말을 멈추자 천제무황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거라. 네 생각을 나도 정확히 알아야 동의할지 안 할지를 판단하지 않겠느냐?”
“숨어 있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비밀 엄수가 가장 중요합니다. 맹주님께서도 이미 간파하고 계시겠지만, 천무성궁의 장로가 간세일 정도면 본 궁이나 무림맹에 더 많은 간세가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무림맹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한 명의 간세가 백 명의 아군을 죽일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림맹을 통해 적들을 대처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악불군이 그들의 편이라는 생각은 안 해 보았느냐?”
“혈교와 측천무후궁의 정체를 처음으로 세상에 밝힌 사람이 악 방주입니다. 그들의 편이라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일부러 한 행동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직접 가서 만난 것입니다. 만나 본 결과, 악 방주는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흠…….”
잠시 생각하던 천제무황은 현기수사를 보며 말했다.
“진격아, 이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현기수사는 천제무황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악불군은 공자님께 가장 위험한 적입니다.”
“그는 저를 적대시한 적이 없는데 어찌 적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가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현기수사.”
“예, 공자님.”
“증거가 있으시면 그 증거를 제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지 못하고 말로만 하는 증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더구나 악 방주는 스스로 천륭검가의 후계자라고 공언했습니다. 태양천과 끝까지 적대했고 태양천에 의해 멸문한 천륭검가의 후손이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기에 배척해야 한다는 말을 증거 없이 한다면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현기수사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그는 악불군이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증거 역시 나름대로 몇 가지 수집해 놓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납득할 증거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공자님, 말씀대로 악불군에 대한 증거가 약간 모자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곧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낼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확실해진 후에, 악불군과 연대를 생각해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혈교와 측천무후궁이 먼저 발호한다면 그땐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전 현기수사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무성궁이나 무림맹 또는 저만을 생각하는 계책을 짜지 마십시오. 천하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백천학의 단호한 말에 현기수사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 * *
계속 산길을 이용해 움직이던 악불군은 말들을 쉬게 하기 위해 행렬을 멈췄다.
“적설이 뭐라고 해?”
아까부터 계속 하늘을 쳐다보는 악불군을 본 담수련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적설이 쫓았던 자들의 근거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
적설이 추적한 자들은 여러 곳이었다.
“천화궁주가 갔던 곳 같습니다.”
“그럼 측천무후궁이네?”
“예.”
“아쉽지만 이번은 그냥 가자고. 우선 태양천을 없애는 것이 우선일 것 같아.”
“지금 가는 곳에 태양천이 있을까요?”
“아직은 모르지만 내 생각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곳이야.”
담수련은 태홍장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누구의 눈에도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분석했었다.
우선 관도를 제외했고, 소걸아가 가져온 정보에 맞춰 화전민촌이나 약초꾼들이 많은 산을 뺐다.
그렇게 가능성이 부족한 곳을 빼면서 특정한 곳이 바로 소걸아에게 말해 준 곳이었다.
“누구냐?”
그때, 경계를 서던 천호방도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크게 소리쳤다.
“개방의 주안개입니다. 소걸아 대장님께서 보낸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 가져오세요.”
주안개는 악불군에게 서찰을 넘기자마자 다시 사라졌다.
“소걸아 소협께서는 개방의 제자들이 게으르다고 했는데, 내가 보면 정말 부지런하신 것 같아. 이 산속에 우리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개방의 제자 몇 명이 저희들 뒤를 따르면서 표식을 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서찰을 펼쳐 읽어 보더니 담수련에게 건넸다.
“아가씨께서 직접 읽어 보십시오.”
악불군이 건넨 서찰을 본 담수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서찰에는 담수련이 특정해 준 장소를 수색하던 중에 벌어진 일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의 촉각에 걸린 것은 수사에 나갔던 제자들이 연락이 없어 다시 조사할 것이라는 대목이었다.
그 장소가 바로 그녀가 지금 가는 남민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소군, 지금 출발해도 될까?”
“급하십니까?”
“남민산을 조사하던 개방의 제자들이 연락이 안 된대. 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어. 최대한 빨리 가야 할 것 같아.”
“그럼 빨리 가야지요.”
말을 마친 악불군은 몸을 돌려 명을 내렸다.
* * *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금령각주는 금잔화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상황은 본 궁에 아주 불리해. 이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악불군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궁주님께 허락을 받지 않고 금후께서 직접 악불군을 만나시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어차피, 지금 이대로라면 나는 태후나 천후의 수하 꼴이 될 뿐이다. 나는 그런 대접을 받고 싶지 않다.”
같은 후의 지위임에도 계속 태후와 천후가 자신에게 명을 내리는 듯한 상황이 이어지는 것을 그녀는 견딜 수 없었다. 더욱이 원나라가 완전히 중원에서 축출된 지금 그녀의 지위는 더 위태로웠다.
“지금의 악불군은 잠룡세가의 악불군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잘못하면 금후님께 위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악불군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나 알아봐라.”
“……알겠습니다.”
금령각주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금령각주가 나가자 금잔화는 자리에 비스듬히 누웠다.
‘첫눈에 나를 두근거리게 한 첫 남자. 그를 내 옆에 둔다면 측천무후궁의 궁주가 될 수도 있을 거야.’
금잔화 그녀는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는 천요기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요기를 완벽하게 내보인 적이 없었다. 요기를 보일 정도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악불군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악불군이 자신의 앞에서 담수련을 보호하며 버틸 때에도 그녀는 그를 살려 주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신이 악불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