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94화 (394/472)

<천검지애 394화>

394화. 악불군(2)

중앙에 우뚝 서있는 악불군과 달리 태양삼존과 태양팔존은 강력한 기에 옷이 너덜해진 채, 반장 이상 날아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태양삼존은 허리가 반 이상 잘린 채 이미 즉사했고, 가슴을 찔린 태양팔존은 약간씩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 회생 불가로 보였다.

“으으으…….”

죽지는 않았지만 철무정의 몰골 역시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강기에 의해 옷은 갈가리 찢어졌고 입가에는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격돌의 충격이 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를 든 그의 손 역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태양삼존과 태양팔존이 아주 적절하게 양옆에서 공격할 때만 해도 철무정은 쾌재를 불렀다.

그의 전력이 담긴 태양광열도는 아름드리나무도 새까맣게 태워 버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태양삼존과 태양팔존 역시 조금의 방심도 없이 자신들의 최고 절기를 전력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중을 날아다니며 태양전사단원들을 죽이고 다니던 천륭검이 어느새 그의 손에 나타난다 싶더니, 그의 몸 주위로 순식간에 검막이 펼쳐진 것이었다.

철무정은 도가 검막을 치면서 내기가 흔들리며 검막의 반탄력에 주르륵 반 장 가까이 밀려나갔다.

그리고 태양삼존과 태양팔존이 악불군의 검에 치명상을 입으며 튕겨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태양삼존은 자신의 태양폭혈권에 호신강기까지 서려있어 검막 따위는 얼마든지 부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내공이 삼 갑자에 근접한 화경의 고수로서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그 판단은 오판이었음이 당장 드러났다.

악불군의 검이 그의 권을 그대로 잘라버리면서 허리까지 쓸어 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태양삼존의 허리를 잘라 버린 그의 검이 태양팔존의 기형검까지 자르며 그대로 그의 심장을 찔렀다는 점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공격과 방어를 완벽하게 해 내고, 베어 나가는 와중에 찌르는 수법으로 변환하는 것은 사실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불군이 철무정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철무정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 따위 천한 놈이 감히 나 철무정에게 반항하다니! 내 필히 네놈의 가죽을 벗기고 살은 포를 뜰 것이다!”

“포를 뜨기 전에 네 목숨부터 걱정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구나.”

악불군이 한 걸음 다가서자 철무정은 가슴을 잡더니 다시 토혈을 했다.

“소천주님을 보호해라!”

태양삼존과 태양팔존이 합공을 했음에도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양혈랑단의 대주는, 철무정이 피를 토하자 정신이 든 듯 다급히 소리쳤다.

이미 반 이상 죽었지만 여전히 백 명 가까이 남아있던 태양전사단은 대주의 명을 따라 철무정의 주위를 에워쌌다.

“왜 움직이지 말라고 한 거냐?”

철무정을 보호하려는 태양전사단을 막으려고 했던 소걸아는, 그들이 방어진을 칠 때까지 악불군이 움직이지 말라고 한 것이 의아한 듯 다가와 물었다.

“아직 백 명 가까이 남아있는데, 막으면 우리 쪽도 희생자가 꽤 나올 수 있어.”

사실 천호방도들도 열댓 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개방의 천강개들도 최소한 이십 명 가까이 죽은 터였다.

악불군이 철무정과 태양존 둘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고, 그 와중에도 계속 이기어검과 암기로 태양전사단의 무사들을 대량으로 죽이면서 전열을 흩트리지 않았다면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겼을 것은 분명했다.

“그럼 저놈들을 어떻게 할 건데? 희생 없이 저들을 제거할 수는 없잖아?”

“나 혼자 움직인다.”

악불군의 말에 소걸아는 다시 한번 악불군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비록 악불군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한 명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를 한꺼번에 세 명이나 상대했다.

분명 그도 힘들 것이 분명한데도 수하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마지막을 직접 끝내려고 하는 것은 정파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 알아볼 것이 좀 있다.”

악불군은 부언하고는 철무정을 보며 물었다.

“철 공자,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호위들이 자신을 겹겹이 에워싸자 약간 마음이 놓인 철무정은 운기조식부터 할 생각으로 정좌를 하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교묘하게 악불군의 목소리가 그의 기를 끊어 버렸다.

운기조식을 못 하게 방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우선 운기조식부터 하고, 이게 끝나면 네놈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철무정이 못 들은 척 다시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기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천하의 철룡세가의 철무정이 나같이 천한 놈이 두려워서 대답조차 못 할 정도라니, 대단한 척하더니 결국은 겁쟁이에 불과했구나!”

또다시 들려온 악불군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듯 콕콕 찌르자 철무정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끌어올린 기가 역류하며 다시 속에서 피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방심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너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는다!”

결국 운기조식을 포기한 철무정은 올라오는 피를 다시 꿀꺽 삼키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까 누군가 당신한테 소천주라고 하던데, 설마 태양천의 소천주라도 된 건가?”

“그렇다. 내가 바로 태양천의 소천주다. 태양천은 모욕을 당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태양천에서는 네놈뿐만 아니라 너와 가까운 모두를 죽일 것이다.”

악불군이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소걸아와 백여 명의 천강개까지 다 들었으니, 확실한 증인은 충분히 확보한 셈이었다.

“저들이 태양십존이냐?”

악불군은 태양삼존과 태양팔존을 가리키며 물었다. 꿈틀거리던 태양팔존은 결국 죽었는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육관에서 수련할 때, 무림의 수많은 무공 수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호위 무사로 노리는 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싸울지 도망칠지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태양십존도 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태양십존을 아느냐?”

철무정은 의아한 듯 물었다. 태양십존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인만 해 주면 된다. 이유까지 알 필요는 없다.”

‘이, 이, 이놈이……!’

철무정은 대화하는 척하며 내상을 누르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말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저놈을 쳐라!”

철무정의 명령에 태양혈랑단 대주는 급히 전음을 보냈다.

[소천주님, 지금 공격을 하면 소천주님을 보호하기 어려워집니다. 우선 이번은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남은 수하들의 수는 개방과 천호방을 합친 수와 비슷했다. 더욱이 각각 개인의 무공도 그들보다 높았다.

하지만 고수의 수가 문제였다. 태양삼존과 태양팔존이 이미 죽었고 철무정은 부상을 입었다.

심지어 수하들의 눈빛에서 사기가 극도로 떨어졌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나를 치라고 했는데 수하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권위 없는 소천주인가 보구나.”

다시 이어지는 속 긁는 말에 철무정은 내상이고 뭐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귀에 다시 전음이 울렸다.

[소천주님, 저자는 지금 소천주님을 격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으……. 이 철무정이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악불군……. 네놈을 반드시 죽인다. 그리고 천륭검보를 빼앗아, 지금 네가 가진 그 무공을 내가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이 망상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악불군이 그들 무리를 향해 그대로 뛰어든 것이다.

미리 들었던 소걸아는 물론 천강개들까지 경악한 듯 입을 벌렸다.

태양삼존과 태양팔존이 엄청난 고수라는 소문을 들었고, 그들로서는 평생 또 다시 보기 힘든 엄청난 기의 폭풍을 직접 경험했지만 사실 정작 싸우는 모습은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악불군의 신위는 그동안 들었던 소문이 너무 축소되어 퍼지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비슷한 무공과 내공을 지닌 사람이 싸울 경우,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무기였다.

명검이나 명도가 나타나면 수많은 무림인들이 몰려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천륭검은 실로 대단한 명검이었다.

길이는 보통 장검에 비해 짧았다. 짧다는 것은 그만큼 빠르게 운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더구나 두 개의 검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어떤 강력한 무기도 막아낼 수 있는 탄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상황에 따라 분리되어 쌍검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는데, 심지어 한 개가 길어지며 장검으로 사용도 가능했다.

백 명 가까운 무리에 뛰어든 악불군은 지금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천륭검의 장점을 이용해 말 그대로 검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륭검은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쌍검으로 나뉘었다 합쳐졌다 하면서 적의 가슴을 베고, 허리를 찌르고, 목을 잘랐다.

누가 보아도 저절로 몸이 떨려 올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허나 보고 있는 모두는 사방으로 뿌려지는 붉은 피 속에서 간결하면서도 현란한 악불군의 모습에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인데…….”

잠시 넋 잃고 보고 있던 소걸아는 정신이 든 듯 중얼거렸다.

그가 아는 악불군은 이렇게 잔인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급 보이는 그는 손속에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았다.

“소천주님, 피하십시오!”

삼각도 안 되어 반이 넘게 죽자, 대주는 안 되겠는지 다시 한번 철무정에게 소리쳤다.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전음으로 보내는 것도 잊고 크게 외친 것이다.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있던 철무정도 대주의 외침을 듣자 그제야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세 명의 인영이 땅 속에서 스르르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흑석영을 비롯한 세 명의 천호방 호법들이었다.

“이, 이놈들이…… 감히!”

철무정은 그들이 살수들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대로한 듯 말했다. 그는 살수들을 백정 정도로 생각할 정도로 천시해 왔다. 그런 살수들이 자신의 앞을 막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치욕이었다.

“철룡세가의 소가주께서 태양천의 소천주까지 되셨으니, 우리가 더욱 천하게 보이시겠구려?”

대독관의 말에 철무정의 표정이 일변했다.

“넌……?”

“기억이 나시나 보네. 철무정! 그런데 너도 지금 보니까 고양이를 만난 쥐새끼 꼴이구나. 도망이 쉽지는 않지?”

대독관은 백인막 시절 철룡세가의 청부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특급 살수인 그가 직접 청부 때문에 가는 경우는 없었지만 철룡세가의 요구 때문에 간 것이었다.

그때, 철무정을 만난 대독관은 인격적인 모욕을 크게 당하고 왔었다.

대독관의 말에 철무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처절한 심정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소천주! 빨리 피…… 억!”

철무정이 멈춘 것을 보고 다시 소리치던 대주의 말이 중간에 끊기고 비명 소리가 뒤를 이었다. 지휘를 하던 대주까지 죽은 것이었다.

이제 이십여 명밖에 남지 않은 태양전사단은 완전 전의를 잊은 듯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태양천의 전사는 죽어도 후퇴는 없다’는 태양천이 철칙으로 여기는 신조였다.

실지로 무림인들이 그들과 싸울 때,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도, 죽으면서도 한 명이라도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그들의 끈질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버텨서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버티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아무 의미 없는 죽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도주 역시 쉽지는 않았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천강개와 천호방도들이 그들의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철무정은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수하들이 없다는 것을 느끼자 도망을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눈앞엔 어느새 악불군이 서 있었다.

“크크크크! 이제 보니 백인막의 백정들을 네놈이 거두었구나? 부역 세력인 백인막이 천호방에 숨어있다는 것을 정파에서 알면 뭐라고 할까?”

“이제 네가 죽으면 알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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