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95화 (395/472)

<천검지애 395화>

395화. 위상(1)

악불군의 말에 철무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난 위대한 칭기즈 칸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철룡세가의 적통이자, 천하에서 가장 강한 태양천의 소천주이다. 나를 건드린다면 넌 영원히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야 할 텐데, 감히 날 죽일 자신이 있느냐?”

하나, 그것은 말 그대로 악불군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일 따름이었다.

평생을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특권 의식에서 찌들어 살아온 그는, 지금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철무정의 모습에 악불군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넌 도저히 바뀔 자가 아니구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악불군의 주위로 번쩍하는 검광이 일었다.

내공이 거의 섞여 있지 않은 단지 쾌검이었다.

하지만 철무정은 심한 내상으로 인해 방어조차 생각 못 한 채 급히 뒤로 물러났다.

“컥!”

철무정은 싸늘한 느낌이 자신의 목을 스쳐 지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목을 잡았다.

분명 검의 길이에 맞춰 빠르게 피했다고 생각했던 그는, 악불군의 검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을 보자 얼굴이 구겨졌다.

“이, 이…… 네, 네놈이 미쳤구나! 감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대던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의 목이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전혀 상상치 못했던 것 같았다.

지독히 초라한 최후였다.

* * *

또다시, 엄청난 소문이 순식간에 천하에 퍼졌다.

천호무적검이 공포의 태양십존 중 두 명과 소천주까지 합세한 세 명과 싸웠음에도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그 싸움이 끝난 후 태양전사단 백여 명을 홀로 다 정리했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악불군의 명성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높아졌다.

더욱이 그 상대가 태양천이라는 사실에 무림인들마저 열광했다. 무림에 최대의 치욕을 안긴 세력이 바로 태양천이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전공에, 지금 무림에 무슨 태양천이 있냐며 헛소문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방의 백여 명의 천강개들이 직접 보았다는 증언까지 첨부되면서 살아 있는 전설이 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재미있거나 좋아하는 얘기를 해야 많은 사람이 모이는 호사가들에게는 실로 반가운 소식이기도 했다.

천호무적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더 많은 돈을 던졌는데, 새로운 얘깃거리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악불군과 함께 주루의 이 층 창가에 앉아 있는 담수련의 얼굴에는 뭔가 만족한 미소가 계속 그려져 있었다.

“아가씨께서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서 저도 좋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소군 얼굴은 그다지 기분 좋은 것 같지가 않은데?”

“기분은 좋은데, 들려오는 소문이 너무 부풀려져서 좀 민망합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피식! 웃었다.

지금 주루 일 층에서 호사가 한 명이 이십 명이 넘는 손님들 앞에서 몸짓까지 섞어 가며 악불군의 이번 전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수법이었다. 천호무적검은 하늘을 난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가 죽는다, 심지어는 용으로 변한다는 터무니없는 말까지, 마치 자기가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난 재미있기만 하던데? 원나라의 폭정과 이어지는 전란에 지친 백성들에게 영웅담은 그동안 쌓인 억압과 긴장을 풀어 주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고 봐.”

담수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악불군의 고개가 돌아갔다. 소걸아가 급히 계단을 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같이 식사하자더니 뭐가 그렇게 바쁘냐?”

악불군의 말에 소걸아는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나도 정말 죽겠다. 넌 죽이고 그냥 떠나면 그만이지만, 난 뒤처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악 방주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편했는데, 씨!”

“수고 많았다. 대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라.”

“당연하지, 그러려고 발이 닳도록 뛰어왔는데!”

소걸아는 점소이를 부르더니 그 자리에서 열 가지가 넘는 요리를 주문했다.

“저번에도 궁금했는데, 그 많은 음식이 어떻게 다 들어가는 거냐?”

“내 몸의 반이 위장이거든.”

너스레를 떠는 소걸아를 보며 악불군을 미소를 짓더니 다시 물었다.

“태양천과의 싸움이 고작 삼 일밖에 안 됐는데도 벌써 호사가들이 알고 떠벌이고 있던데, 혹시 네가 그런 거냐?”

“내 친구 명성 높이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곳도 아니고 태양천을 전멸시킨 건데 당연히 소문을 내야지!”

“지금도 과분한 명성인데, 더 높여서 뭐하려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 몰라? 명성이 높을 때 계속 소문을 내야 명성이 확고해지는 거다. 이제 태양천의 태양십존까지 둘이나 죽였으니, 넌 이제 명실공히 무림 최고의 영웅이 될 거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너무 과하면 모자란 것보다 못할 수도 있어.”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모자라다. 내 친구 악불군은 아직 명성이 더 높아져야 해.”

소걸아의 답에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소걸아 소협께서는 악 방주의 명성이 왜 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악 방주가 누구도 넘보지 못할 명성을 얻어야만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친구로서 안전하기를 바란 것뿐입니다.”

“아무래도 천하는 소걸아 소협의 진가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네요.”

담수련의 의미심장한 말에 소걸아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이해한 듯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제 진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담 군사님께서 저를 알아주시는군요. 그런데 전 제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게 더 좋습니다.”

“왜요?”

“제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귀찮아지거든요.”

“호호호~ 소걸아 소협다우신 답이시네요. 알았어요. 저도 소걸아 소협께서 비범한 분이라는 것은 비밀로 할게요.”

“그런데 마차와 수하들은 다른 곳으로 움직이던데 넌 왜 여기 있냐?”

“어디 좀 다녀올 생각이다.”

“어디?”

악불군은 담수련을 잠시 쳐다보더니 약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래서 네게 와 달라고 부탁한 거다.”

“뭔가 있구나?”

“내가 아는 정보망이 있는데, 혈교의 중요 거점 하나를 알아낸 것 같다.”

“뭐! 아니, 어떤 정보망이냐? 내가 알기로 네 정보망은 개방밖에 없지 않냐?”

“개방처럼 광범위한 정보망은 아니지만, 한 가지만을 알아내는 데는 무엇보다도 정확한 정보망이다.”

“그런 조직이 있어? 하오문인가?”

정보망에 관한 한 어떤 조직에게도 밀리기 싫은 소걸아는 슬쩍 반문했지만, 악불군은 미소만 지을 뿐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적설은 악불군과 담수련만 아는 최고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혈응접사 수십 명이 혈우대마종의 특명으로 적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악불군과 담수련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신경 끄고 이것 좀 전해 다오.”

악불군은 품에서 여러 봉서를 꺼냈다. 각 봉서에는 문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뭐냐?”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공격할 생각이다.”

악불군의 말에 소걸아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냐?”

“영웅대회가 이제 몇 달밖에 안 남았다. 그 전에 정리할 것은 최대한 정리할 생각이다.”

“알았다. 걱정 마라, 정확하게 전해 주마. 그런데 어디 가는지 아직 말해 주지 않았는데?”

“내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냐?”

“그럼 어떻게 너랑 연락을 하냐?”

“모두가 모일 때쯤이면 총단에 도착할 것이니까, 그동안은 나랑 연락할 일 없다.”

“어! 그럼 안 되는데?”

“왜? 사해신개 어르신께서 내 뒤를 꼭 따라다니라고 하셔서?”

“잉?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모르겠는데?”

피식!

소걸아의 답에 악불군은 웃으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가씨, 가시지요.”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던 담수련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시킨 거는?”

둘 다 일어나자 소걸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요리 값은 주고 갈 테니 걱정 마라. 그럼 천호방 총단에서 보자.”

낚시꾼들이 많이 쓰는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악불군이 담수련과 함께 주루를 떠나는 것을 심각한 표정으로 보던 소걸아의 얼굴이 금방 희희낙락하게 변했다.

점소이가 요리들을 가져와 그의 앞에 내려놓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래, 모든 일은 우선 먹고 시작하는 것이 거지의 법도지.”

* * *

“흐흐흐! 그 대단하신 대공 전하께서 하찮은 저를 보러 여기까지 오신 것을 보니 다급하신 모양입니다.”

혈뇌의 빈정대는 말에, 대공의 뒤에 서 있던 태양십존이 살기를 띠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가만 있거라.”

“저자의 언사가 너무 건방집니다!”

대공의 말에 태양일존은 혈뇌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물러서라.”

“태양십존께서 성격이 급하다는 소문이 틀린 것은 아닌가 봅니다.”

태양십존이 물러서자 다시 터져 나오는 혈뇌의 비꼬는 말에, 대공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원나라가 물러갔다 하여 태양천까지 약해진 것은 아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뭔가를 알아내려는 허튼 짓은 그만하거라.”

상대와 몇 마디 대화만 나누면 상대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혈뇌조차 대공의 마음 상태는 쉽게 알 수가 없었다.

“하하하! 얄팍한 제 꼼수가 들켰군요. 알았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교주님께서는 태양천과 본 교 간의 연합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십니다. 하지만 태양천에서 제시하신 조건은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시고 계시지요.”

“남무림 전체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그게 부족하다는 것이냐?”

“남무림이 아니라 장강 이남을 다 주십시오.”

“장강 이남? 너무 큰 욕심을 부리면 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중원 전체를 잃고 지금 북방 초원으로 쫓겨나신 상황이 아닙니까? 본 교와의 연합으로 장강 이북을 다시 차지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이익이실 텐데요? 거기다 원나라 때도 어차피 장강 이남은 통치가 매우 어려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본 교에서 골치 아픈 지역을 맡아 준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더 상식적이지 않겠습니까?”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던 대공의 얼굴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혈뇌의 말에 심기가 매우 불편해진 것이다.

“……그럼 혈교에서는 본 천에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잠시 생각하던 대공이 무겁게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혈뇌가 대답했다.

“원나라에 반대하는 장강 이남의 모든 문파를 없애드리지요.”

장강 이남에는 제갈세가와 점창파 등 정파를 대표하는 거대 문파가 열 곳이 넘었고, 구천마성이라는 마도의 절대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더구나 작은 군소 문파까지 더하면 최소한 수백 개의 문파가 있으니, 그것을 모두 없애겠다는 말은 실로 광오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대단한 것을 자신들이 맡겠다는 듯 내뱉은 그 말은 너무 속 보이는 수작이었다.

장강 이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림사, 무당파, 화산파 그리고 개방 같은 거대 문파들이 대부분 장강 이북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뇌의 머리가 아주 뛰어나다는 보고를 여러 차례 들었는데, 실망이구나.”

“실망하셨다니 송구스럽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바라는 것이 장강 이남이니 장강 이남만 책임지는 것은 상식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하의 혈뇌가 정말 몰라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연합을 할 때는 비슷한 희생을 담보해야 신뢰가 생기는 법이다.”

“그렇다면 생기는 이익도 비슷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강 이남과 장강 이북은 그 값어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현명한 판단을 할 줄 알았는데 실망이구나.”

대공은 더 이상의 대화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듯 몸을 일으켰다.

“대공 전하, 방금 재미있는 보고가 하나 들어왔는데, 들어보시고 가시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던 혈뇌가 슬쩍 떡밥을 던졌다.

“보고?”

“예, 대공 전하와 연관이 있는 보고입니다.”

원래의 대공이라면 이런 말에 걸음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번 말은 듣고 싶었다.

“말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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