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96화>
396화. 위상(2)
대공이 허락하자 혈뇌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양천의 무인 이백여 명과 태양십존 중 두 명, 그리고 소천주까지 전부 전멸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더군요.”
순간 대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밀던 황제가 암살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던 당시조차, 그는 이렇게 당황하지 않았었다.
“정말이냐?”
“본 교의 정보망에 들어온 정보가 잘못됐을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 짓이냐?”
“요새 천하가 제 집 마당인 것처럼 설치고 다니는 놈이 있지요.”
“악불군이냐?”
“대공 전하께서 당장 알아내시는 것을 보면 이미 염두에 두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혈뇌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대공의 비위를 거스르고 있었다.
순간 대공의 몸에서 강력한 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럴 줄 알았던 듯 십여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더니 혈뇌의 주위를 둘러쌌다.
혈우대마종이 특별히 엄선해 보내 준 혈뇌원의 원로들이었다.
‘이놈들 봐라?’
대공은 상당히 놀란 듯 중얼거렸다. 비록 열 명이었지만 그의 기를 받아냈다는 사실에서 그 경지가 대단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라기는 혈뇌원의 원로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마왕급의 초절정 고수인 그들 열 명이 합심해 막았는데도 조금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법이기는 하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이 모두 죽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천하의 대공 전하이신데 어련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마음을 안 먹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내가 마음을 안 먹을 이유를 말해 봐라.”
“절강은 장강 이남입니다. 저희 조건을 받아들이신다면 천호무적검과 천호방은 본 교에서 처리하게 됩니다.”
“군산 역시 장강 이남이다.”
대공의 말에 혈뇌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군산은 장강의 물줄기가 지나가는 곳으로 보기에 따라 이남도 되고 이북도 될 수 있었다.
대공은 지금 군산까지 혈교에서 맡아 준다면 조건을 받아들일 듯 말한 것이다.
군산이 중요한 이유는 무림맹이 군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대공 전하답습니다. 그런 소소한 것까지 다 염두에 두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공의 검미가 꿈틀했다. 무림맹을 상대하는 것을 소소하다고 표현한 것 자체가, 자신의 계산된 행동을 낮춰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혈뇌, 너는 그 입 때문에 편히 죽지는 못할 것 같구나.”
“대공 전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도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이미 죽는 것을 두려워할 나이는 지났지요.”
“대부분은 그렇게 말하지. 한데 죽을 때가 되면 살려 달라고 비는 놈이 대부분이었다.”
“저도 그때가 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궁금하군요. 그럼 우리의 계약은 성립이 된 것입니까?”
“서로 믿기 힘든 사이이니 서로 간에 하나씩 요구하는 방식으로 연합을 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실패하면 연합은 깨진다. 하겠느냐?”
“아주 재미있는 방식이군요? 좋습니다. 교주님께서 제게 전권을 주셨으니 그렇게 하지요. 그럼 제가 먼저 요구를 할까요, 아니면 대공 전하께서 먼저 하시겠습니까?”
“한 달 안에 악불군을 제거해라.”
“시작부터 대단히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군요?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좀 문제이기는 하지만, 대공의 요구는 사실 혈뇌에게는 받아들이기 쉬웠다. 이미 그에 대한 제거 명령이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본 교의 요구도 말하겠습니다.”
“말해 봐라.”
“대공 전하께서 한 달이라는 기한을 정하셨으니 저희도 한 달로 기간을 정하겠습니다. 한 달 안에 혈해사황을 제거해 주십시오.”
“혈해사황?”
소림의 탕마신승이나 개방의 사해신개, 무당의 무상진인 등 정파의 최고수들이 아니라 사파의 수뇌를 제거해 달라는 것은 대공에게도 의외의 제안이었다.
“무황 정도는 죽여 주셔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악불군과 혈해사황이 같은 위치라고 생각하느냐?”
“본 교에서는 악불군과 무황을 이미 같은 반열에 올려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혈해사계를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양천을 도울 세력인 새외 연합은 지금 혈해사계에 막혀 중원으로의 진군을 못 하고 있었다.
대공은 혈뇌를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한 달 안에 혈해사황을 제거하겠다.”
“본 교에서도 한 달 안에 악불군을 제거하겠습니다.”
태양천과 혈교의 불안한 연합은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 * *
“그런데 정말 가능할까?”
“사람 둘의 무게는 좀 힘들어도, 아가씨 혼자라면 거뜬할 것입니다.”
“소군도 같이 타야지. 나 혼자만은 싫어.”
“저도 같이 탈 겁니다.”
“둘은 어렵다며?”
“저는 됩니다. 무게를 줄이면 되니까요.”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깊은 산속에 형성된 바위산에 도착한 악불군과 담수련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악불군은 백설의 옆에 달린 봇짐 속에서 대나무가 여러 겹 달려있는 끈을 꺼내 들더니 하늘을 향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자 잠시 후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로 커다란 그림자가 형성됐다.
“크르르륵!”
바위산에 내린 적설의 크기는 말 그대로 집채만 했다.
악불군은 적설의 목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작게 대화를 건네더니 끈을 그의 목에 걸었다.
잡아당겨도 목이 조이지 않도록 특별하게 매듭이 지어진 끈은 여간한 힘에는 끊어지지 않는 천잠사로 만들어져 있었다.
목에 건 끈을 날개 사이와 몸체 곳곳으로 돌리자, 적설의 등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대나무 의자가 만들어졌다.
악불군은 적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끈의 강도를 조절하더니, 됐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적설의 목과 쓰다듬어 주었다.
악불군은 보타산에서 거대한 학이 검후를 태우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는 적설도 사람을 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
보타산에서 본 학들도 대단히 컸지만 적설 역시 그들 크기에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틈틈이 적설의 크기를 재었고, 적설과 연결할 틀에 대한 설계를 담수련에게 부탁했다.
제작은 천호방 총단을 떠나기 전, 고철황에게 부탁했다. 하오문에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장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드디어 고철황이 방도를 통해 그에게 물건을 전달한 것이었다.
적설의 등은 보통 사람은 올라가기 힘든 높이였지만, 그 정도의 신법은 담수련도 펼칠 수 있었다.
악불군은 약간 겁을 먹은 듯 뒤로 물러서 있는 백설에게 다가갔다.
“넌 이제 적설이하고 친해질 만도 한데, 왜 여전히 겁을 내냐?”
백설도 영물에 가까운 말로, 호랑이도 겁내지 않을 정도의 용맹함과 속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적설은 백설로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최고의 포식자이니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악불군은 백설의 고삐를 빼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하고 아가씨는 적설을 타고 움직일 테니, 너는 편하게 우리를 따라와라.”
악불군의 말을 들은 백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설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적설을 쫓아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둘은 악불군에 의해 서로 감응하는 수준의 공감 능력을 공유했기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쫓아올 수 있었다.
백설의 목을 힘 있게 한 번 안아 준 악불군은 담수련을 안고는 적설의 등 위로 올라갔다.
담수련을 자신의 앞에 앉힌 악불군은 어떤 상황에서도 떨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몸에 안전띠를 꼭 묶었다.
“내가 조종해?”
뜻밖에도 악불군이 적설을 조종할 고삐를 그녀에게 쥐여 주자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적설을 타는 분은 아가씨이니, 당연히 아가씨께서 조종하실 줄 알아야지요.”
“처음 하는 건데.”
“저도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연습이지요. 아가씨께서 적설에게 가자고 말해 보십시오.”
혼자라면 몰라도 악불군이 자신을 안고 있었다. 담수련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소리쳤다.
“적설아, 날아!”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적설은 커다란 날개를 힘차게 흔들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히이이잉!”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백설이 커다랗게 소리를 내더니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적설을 따르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하나 오히려 태어난 후 처음으로 전력 질주를 하게 된 백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질주 본능이 깨어난 듯 신나게 달렸다.
* * *
‘확실히 적응 하나는 잘하신다니까…….’
처음 공중으로 올라간 담수련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고, 적설이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반 시진도 안 되어 바뀌었다.
지금 그녀는 적설을 조종하는 재미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심지어 적설이 회전을 하면 까르르 웃을 정도로 좋아했다.
“아가씨, 정말 잘하시네요.”
“진짜 잘하는 것 같아?”
“예, 그런데 무섭지는 않으세요?”
적설은 이미 땅에서 보면 점으로 보일 정도로 높이 떠 있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지금은 너무 시원해. 세상이 이렇게 크고 넓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야.”
“저도 여기서 보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네요. 인간은 정말 작은데 왜 그렇게 싸울까요?”
“인간은 작지만 욕심은 인간보다 몇십 배는 더 크니까. 어쩌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을지도 몰라.”
“우리가 그 인간의 욕심을 막을 수 있을까요?”
담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욕심은 타고난 본성이야. 그리고 욕심이 없었다면 세상은 발전할 수가 없어.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라는 거지. 하지만 막지는 못해도 그로 인한 양민들의 피해는 줄일 수 있을 거야.”
그때, 적설의 몸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돌풍이 분 것이다.
“소군, 진짜 재미있다. 그렇지?”
누구라도 가슴이 덜컥할 것 같은 상황임에도 담수련은 신난 듯했다.
악불군은 소심하던 그녀가 이렇게 빨리 적응한 것이 그가 바로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악불군만 있으면 그녀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 * *
“아직 못 찾았느냐?”
“강서성 접경에서 태양천과 싸운 것까지는 확인이 되는데 이후 행적이 묘연합니다.”
“먼저 총단에 도착한 것은 아니냐?”
“호위하던 놈들과 마차는 분명 천호방 총단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악불군과 담 군사란 계집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분명하냐? 돌아왔는데 못 본 것 아니냐?”
“첩자들이 천호방 총단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그놈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악뇌사심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악불군 놈을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본 전도 꽤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교주님께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러십니까?”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신지요?”
악뇌사심의 반문에 혈마종은 잠시 생각하더니 손을 저었다.
“됐다. 그만 나가 봐라. 악불군의 행적은 계속 찾고.”
“알겠습니다.”
악뇌사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가자 혈마종은 태사의를 주먹으로 탁 쳤다.
“예전 태양천과 부딪치기 전에 느낀 위험 신호도 이렇게 강렬하지는 않았는데……. 거기다 악불군 그 어린놈 때문에 이런 위험 신호가 나올 리가 있나?”
중얼거리던 혈마종은 자신이 좀 예민해졌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무슨 상관이야…….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모두 죽이면 끝이다!’
혈마종은 입술을 꾹 물더니 살광을 뿜어내며 중얼거렸다.
* * *
[적설아, 여기냐?]
깊은 산속 하늘에 도착한 적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돌기 시작했다.
적설이 도는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밑을 보면 상당히 넓어서 한 곳을 특정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적설이 더 안 움직이는 것 보면 이 근처인 거 같은데, 밑에는 숲밖에 안 보이는데 왜 여기를 왔을까?”
밑을 보던 담수련은 의아한 듯 물었다.
“이런 곳에 있으니까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군요.”
주위 수십 리가 오로지 숲만 이어진 깊은 산 속이었다. 이런 곳에 근거지가 있다면 누구라도 찾을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뭐가 보여?”
“숲속에서 작은 불빛이 보입니다. 아가씨는 잠시 기다리십시오.”
“어떡하려고?”
“내려가서 확실한지 알아보고 가야지요.”
“내려가? 어떻게?”
“뛰어내려야지요.”
“뭐?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담수련은 아래를 한 번 보더니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