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01화>
401화. 건곤일척(1)
탕! 챙! 타타타당!
일 장 가까이 떠오른 먼지로 인하여 시야가 매우 흐렸음에도 혈마종은 쉴 새 없이 먼지 안을 향해 도강을 날리고 있었다.
악불군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악불군은 도강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잠시 공격을 멈춘 혈마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사지주망을 펼치던 혈혼단은 반 이상 죽었고, 혈마원의 원로들 역시 여럿 죽은 데다 남은 이들도 대부분 내상을 입은 듯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혈마종은 소매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강력한 바람이 불며 먼지를 날려 버렸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악불군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상의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입가에는 피가 가느다랗게 흐르고 있었다.
철포삼의 시술을 받지 않았다면, 아니 금종조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아마 그 역시 죽었을지도 모를 엄청난 공격이었다.
혈마종이 가한 공격의 위력을 알 수 있듯 악불군의 발목은 땅으로 한 치 가까이 파고들어 있었다.
“호신강기까지 있는 놈이 철포삼까지 시술을 받았다니 놀랍구나.”
혈마종은 악불군의 모습을 보자, 놀람과 안도가 동시에 나타났다.
놀람은 자신의 공격까지 포함된 전체의 공격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이었고, 안도는 그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닐 겁니다.”
“아직도 입은 살아 있구나. 놀랄 일이 무엇일지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그것을 기다리느라 너를 살려 줄 생각은 없다.”
혈마종 덕에 다시 전열을 정비한 혈마전의 고수들은 악불군을 향해 다시 공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적이다!”
그때 무너진 담 밖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외침은 시작에 불과했다.
“으아악!”
“아악!”
혈마종의 표정이 구겨졌다.
적이라니…….
하필 왜 지금?
혈마단과 여러 명의 원로들이 혈마종의 눈짓에 무기가 부딪치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네가 무리를 하면서 홀로 이곳에 잠입한 이유가 이것이었느냐?”
“이제 눈치채셨다니 좀 실망이군요.”
“실망? 훗! 이제 눈치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오늘 본 전에 들어온 놈들은 한 놈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쳐라!”
남은 수하들이 악불군을 향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악귀사심.”
“예!”
“군사로서 이 정도의 예측도 못한 네 죄는 일을 끝낸 후 물을 것이다. 쳐들어온 놈들은 네가 지휘해서 모조리 제거해라.”
“목숨을 바쳐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귀사심은 그대로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쾅!
펑!”
채재재쟁!
“이놈! 좀 죽어라!”
힘겹게 방어하는 악불군을 향해 검붉은 독액이 뿌려졌다. 독광귀옹의 화혈독액은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강력한 독이었다.
순간 악불군의 몸에서 금빛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놈이 아직도……?”
이미 기력이 빠져 있는 듯 보였던 악불군이 금빛 강기를 뿜어내자, 혈마종은 깜짝 놀라 도를 휘둘렀다.
치지지지직!
“아악!”
“악!”
“독이다!”
금빛 강기에 튕겨진 화혈독액이 오히려 악불군을 공격하던 혈마전의 고수들을 덮치자, 주위는 순식간에 처절한 신음과 비명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펑!
커다란 폭음과 함께 금빛 강기가 혈마종의 검붉은 도강에 갈라졌다.
“음……!”
도강을 천륭검으로 간신히 막는 데 성공했지만, 악불군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침음성을 터뜨렸다.
독광귀옹의 화혈독액의 피해는 생각보다 컸다.
혈혼단원 수십 명이 독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몸을 비틀고 있었고, 원로들 과반수가 정좌한 채 독을 몰아내기 위해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독을 해독할 독광귀옹이 악불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혈마종은 도를 쥔 손을 터질 듯이 꽉 잡았다.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파천패혈도에도 버티다니?”
악불군은 올라오는 피를 꿀꺽 삼키며 말을 받았다.
“이 정도에 죽을 실력으로 여기에 홀로 들어왔겠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혈마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 때문에 내가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온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하지만 네놈을 죽인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만들 수 있겠지.”
“그래도 좀 실망은 했습니다.”
“실망?”
“혈교의 사대마종 정도 되시는 분이 협공을 하시니 말입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어르신 생각보다 제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혈마종은 아직 악불군이 문서고에서 기밀 서류들을 가져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 상관없겠지.”
“저와 일대일로 싸워 볼 자신은 있으십니까?”
“뭐?”
“계속 협공만 하시니 말입니다. 제가 두렵다면 수하들과 같이 협공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내가 너를 두려워한다고?”
“제가 보기에는 두려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혈마종이라면 이 정도의 격장지계(激將之計)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이미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네놈을 일찌감치 죽였어야 했어.”
혈마종의 몸에서 검붉은 강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혈류폭마강을 전력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악불군을 포위하고 있던 수하들이 부상자들은 끌고 급히 뒤로 분분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혈마종의 혈류폭마강이 펼쳐질 경우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 예상이 틀리면 죽을 수도 있다.’
혈류폭마강의 기가 점점 증가하자 악불군 역시 온몸의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혈마종이 자신의 주 무공인 도법을 사용하지 않고 내공의 대결인 강기를 뽑아 올린 것은 악불군이 상당한 내상을 입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강기의 대결이 될 경우, 내상은 매우 큰 위험 요인이었다.
하나, 그는 악불군의 무공이 상식을 벗어난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내상은 모든 내공을 단전에 담는 무림인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내상이 공력을 운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악불군의 내공이 단전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었다.
그를 상대한 고수들이 악불군의 내공이 약하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혈마종이 손을 들어 올리자, 혈마종 주위 일 장 가까이 형성되었던 혈류폭마강의 검붉은 강기가 악불군을 향해 뻗어 갔다.
악불군 역시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악불군의 금빛 강기와 혈마종의 검붉은 강기가 천천히 부딪치기 시작했다.
폭음도 없이 마주친 두 강기는 섞이기 시작했다.
그때 악불군의 뒤 쪽에 있던 철격마조가 악불군의 등을 향해 조를 찔러 갔다. 허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퍽!
철격마조는 악불군의 등 일 장도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철퍼덕-
“으으윽…….”
엄청난 충격에 땅바닥에 떨어져 버린 철격마조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가 공격했는지도 모르는 듯 서 있는 악불군을 보며, 철격마조는 악불군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더 생각할 수 없었다.
바닥에서 검이 쑥 올라오더니 그의 목을 관통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흑석영이었다.
정파 연합들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온 천호방의 방도 중 백인막 출신 살수들은 상처를 입은 자들을 중점적으로 암살하고 있었다.
‘역시 주군이시군…….’
철격마조를 제거한 흑석영은 금빛 강기와 검붉은 강기가 마치 금룡과 혈룡이 싸우는 것 같다고 느끼며 스르르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이, 이놈이…… 어떻게 된 거지?’
혈마종은 팔 성이 넘는 공력이 실린 자신의 혈류폭마강기면 악불군의 강기를 단번에 쓸어버리고 그의 몸을 찢어 버릴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달리 흐르고 있었다.
분명 악불군의 금빛 강기는 그의 혈류폭마강기에 비해 약했다.
아니 약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두 기가 부딪치자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밀리는 것이라면 악불군의 내공이 자신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런데 밀리는 것이 아니었다.
[네놈이 사술까지 익혔더냐?]
혈마종은 악불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하지만 지금 사용하는 수법은 사술이 아닙니다. 사술을 가미해서 제가 새롭게 만든 무공이지요.]
악불군이 지금 펼치는 무공은 천륭검보를 통해 얻은 신공에 배교의 차기미기흡기술을 혼합해 만든 새로운 무공이었다.
혈마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공을 만들었다고……. 네가?]
새롭게 무공을 만든다는 것은 무재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히 일대종사에 버금가는 재능과 그 그릇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힘들어서 더 이상 전음을 나누기가 힘들군요.]
악불군은 진짜 힘든 듯했다.
‘이게 힘든 놈이 맞는 거야?’
혈마종은 내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팔 성의 공력으로 제거하기가 힘들다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강기의 싸움에서 팔 성 이상의 공력을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십 성의 공력은 내공의 소모가 팔 성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로서는 찬물 더운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 * *
소걸아를 비롯한 연합 세력의 지휘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무너진 담장 안에서 그들을 맞아 튀어나온 자들의 무공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한 것은 정파인들이 태양천과 어찰단을 상대로 무수한 전쟁을 하면서 집단전에 상당히 익숙해졌단 것이었다.
그럼에도 놀라 경악한 것은 이들이 단지 강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악불군이 혼자서 이들을 모두 상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소걸아 소협, 천호방도들은 무림에 이름이 없는 분들인데도 대단히 강하군요?]
천호사기단의 무공은 천륭검가의 자손들답게 대단히 강했다. 거기다 숨어서 살수행을 벌이고 있는 천호특별단의 활약 역시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다 죽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격렬한 싸움이 멈춘 것은 그들에게 덮쳐 온 엄청난 강기의 격돌 때문이었다.
모두는 놀란 눈으로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뒤로 물러섰다.
‘서, 설마 저 강기가 악 방주가 펼친 거란 말인가……. 도대체 상대가 누구기에 저렇게 엄청난 강기를…….’
소걸아는 삼 장이 넘게 퍼져 있는 강기의 격돌을 보며 입을 벌어졌다.
“마, 마치 금룡과 혈룡이 싸운 것 같지 않습니까?”
남궁세가의 남궁영호가 탄복한 듯 중얼거렸다. 그의 묘사가 신기할 정도로 흑석영과 비슷했다.
* * *
십 성으로 공력을 올린 혈마종은 더욱 진기를 끌어올렸다.
‘이놈, 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 내가 죽더라도 네놈만은 꼭 죽이고 죽겠다!’
혈마종은 이제 악불군을 죽이겠다는 일념밖에 안 남은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혈류폭마강기가 스르르 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악불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한 적은 담무룡에게 시술을 받을 때뿐이었다.
‘결판을 보자는 것이군…….’
자신의 기를 뚫지 못하던 혈마종의 기가 한곳으로 모이자, 악불군은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참을성만큼은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그도 지금은 매우 힘든지 움직임이 매우 느렸다.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부상자들을 제거해 나가던 흑석영을 비롯한 호법들도, 점점 강해지는 강기에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흑석영, 주군께서 괜찮으실까? 적이 너무 강한 것 같다.]
사효조가 불안한 듯 전음을 보냈다.
[걱정 마라, 지금까지 어느 한 번 쉬운 싸움이 있었느냐. 주군께서는 우리가 위기라고 생각했던 상대로 항상 승리해 오셨다. 믿어라.]
흑석영의 답은 희망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와아!”
그때 혈마전의 무사들 사이에서 경탄의 웅성거림이 나타났다.
검붉은 기가 공간을 가르며 악불군을 향해 떨어진 것이다.
“아미타불!”
“원시천존!”
순간 정파에서도 탄복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금빛 강기가 덩어리를 이루며 앞으로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밀리는 쪽은 그대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모두는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