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02화>
402화. 건곤일척(2)
실로, 절대 고수들의 이런 격돌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평생 한 번 있기 어려웠다.
그때, 소걸아를 비롯한 근처에 있던 정파의 무사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그 와중에 악불군이 그들에게 피하라고 전음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쿠콰콰광!
땅까지 울릴 정도의 엄청난 폭음이 터진 후 드러난 광경은 실로 참혹했다.
“아아악!”
“피해라!”
“아악!”
기의 폭풍에 휘말린 자들은 그대로 공중으로 말려 올라가며 찢어져 죽었고, 간신히 기의 폭풍을 피한 사람들도 발로 밟은 두부처럼 부서진 담장과 무너진 전각의 파편으로 인해 상당수가 큰 부상을 입었다.
특히, 악불군의 경고를 받은 정파보다는 어떤 경고도 듣지 못한 혈마전의 무사들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다.
허겁지겁 뒤로 물러난 모두는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격돌이 일어난 장소를 중심으로 무려 십 장 가까이가 완전히 초토화돼 있었다.
일단 산발적으로 퍼져 나가던 기의 폭풍은 멈췄다.
하지만 사방을 짙게 덮어 버린 먼지로 인하여 안의 광경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소걸아 소협! 지금이 기회입니다. 남은 적들을 빨리 공격하십시오.]
그때 흑석영의 전음이 소걸아의 귀에 들려왔다.
지금 혈마전은 정파의 연합 세력에 비해 훨씬 큰 피해를 입은 상황으로, 하나같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퍼득 정신이 든 소걸아는 급히 모두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들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에 공격합시다.]
* * *
“……지금 사용한 무공이 무엇이냐? 그것도 네가 만든 것이냐?”
“만들었다는 것은 좀 그렇고, 여러 무공을 장점만 골라서 제가 사용하기 편하게 혼합했습니다.”
“우리가 너를 잘못 판단한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아직 교주님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이번 일이 알려지면 너는 물론 너와 연관이 있는 자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악불군이 진짜 감사하다는 듯 포권을 하자 혈마종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초마 단계에 들었다 하여 기뻐했는데, 어리디어린 너보다 내 성취가 낮다니…….”
혈마종은 도를 자신의 앞에 박더니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악불군은 끝까지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죽은 혈마종을 보고 포권을 했다.
강자에 대한 예우였다.
“욱!”
그제야 피를 한 움큼 토해 낸 악불군은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기긴 이긴 것 같은데, 피해가 너무 크구나…….’
그가 문서고에서 빼낸 서류에 의하면 이곳은 혈교의 산하 사대마전 중 한 곳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전력에 그는 처음으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 * *
“이 서찰을 믿을 수 있겠느냐?”
만통광심이 가져온 서찰을 읽은 구천마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가 일 갑자에 걸쳐 수집한 혈교에 대한 정보와 천호무적검이 보낸 정보가 상당히 비슷합니다.”
“아수마종은 본 성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저도 그래서 판단을 계속 숙고했습니다. 하지만 아수라마전 외에는 남무림에서 화룡세가를 도울 수 있는 세력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구천마황은 턱수염을 손으로 한 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수마종 그놈이 우리와 한 약조를 먼저 깼단 말이지……?”
“어차피 원나라 때 한 약조일 따름입니다. 무림이 새롭게 재편된 이상, 그들과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사료됩니다.”
“아수라마전은 고수들이 상당히 많다. 정면충돌한다면 본 성의 피해가 매우 심할 수 있다.”
“어차피, 본 성을 먼저 공격한 곳은 아수라마전입니다. 제 생각에 혈교에서 본격적으로 무림 공략에 나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뜻밖에도 구천마황과 만통광심은 이미 혈교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듯했다.
“흠…….”
구천마황이 답이 없자 만통광심이 다시 말했다.
“아수라마전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남무림을 제패한다 해도 계속 불안할 것입니다.”
“무림맹이나 정파들은 움직임이 없는데 굳이 우리가 먼저 혈교와 싸울 필요가 있겠느냐? 우선 정파에서 혈교에게 어떤 대응을 하는지 먼저 본 후에 우리도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때 호법 모대립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성주님, 군사전의 한혈흑의존이 급히 보고를 드릴 것이 있다고 배알을 청했습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만통광심이 급히 말했다.
자신이 성주님과 독대 중임을 알면서도 굳이 요청한다는 것은 대단히 급한 일이란 의미였다.
“들어오라고 해라. 어차피 네가 듣고 또 내게 보고해야 할 터, 직접 듣겠다.”
“알겠습니다.”
만통광심은 급히 밖으로 나가더니 한혈흑의존과 함께 들어왔다.
한혈흑의존은 구천마황을 보자 그 앞에 부복했다.
“예는 치우고 보고부터 해라.”
구천마황이 살짝 손을 흔들자 한혈흑의존의 몸이 저절로 펴지며 일어섰다.
상당한 고수인 한혈흑의존을 손짓 한 번으로 일으켰다는 것은 구천마황이 왜 무황 중 한 명인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천호무적검과 정파의 세력들이 혈교의 중요 근거지 한 곳을 없애 버렸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중요 근거지면 어디라고 하더냐?”
“혈마전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구천마황의 얼굴이 변했다.
“정말 혈마전이냐?”
“예!”
“혈마전을 천호무적검과 정파의 세력들이 없앴다고? 정파의 세력이면 무림맹이냐?”
“무림맹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누구냐?”
“거기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잠시 생각을 하던 구천마황은 만통광심을 보며 말했다.
“천호무적검이 혈교를 상대하려는 마음이 진심인 것 같다. 만통광심.”
“예!”
“화룡세가와 아수라마전을 없앤다. 혈교의 간세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모든 작전은 극비로 진행해라.”
“존명!”
드디어 남무림의 패권을 두고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혈마전의 혈투는 악불군이 지금까지 벌인 어떤 싸움보다도 치열했지만 태양천을 몰살시킬 때보다는 소문이 크게 나지 않았다.
혈마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혈마전 혈투에 참가했던 문파들의 놀라움은 실로 대단했다.
적설을 타고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 초조해하던 담수련은 적설이 내려갈 때쯤에야 간신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땅에 내린 후 악불군의 모습을 본 그녀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가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싸움이 끝난 후 뒤처리를 부탁하고 다급히 한적한 곳으로 달려간 것도, 걱정할 그녀의 마음을 알아서였다.
“소군, 많이…… 다쳤어?”
악불군의 앞에 쪼르륵 달려온 담수련은 갈기갈기 찢어진 옷 사이로 많은 상처가 보이자 곧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렸다.
‘옷을 갈아입고 올 것을…… 실수했구나.’
악불군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육관에서 수련받을 때는 더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정도는 아주 경미한 것입니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육관에서 수련할 때도 이런 상처를 계속 입었었다는 말이야?”
그녀는 처음 듣는 말에 더욱 놀라 반문했다.
그동안 악불군은 육관의 수련이 아주 쉬워서 힘들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입은 것은 아닙니다. 이따금…….”
말하던 악불군의 입이 닫혔다.
담수련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어 꽉 안았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담수련의 어깨가 조그맣게 들썩거리자 마음이 안 좋았다. 그녀가 우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살포시 안아 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아가씨, 전 특이한 체질이라 아가씨께서 기뻐하고 웃어야 빨리 낫습니다. 이렇게 우시면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습니다.”
“누가 운다고 그래? 난 안 울고 있거든!”
“그럼 얼굴 한 번 들어 보세요.”
“싫어.”
“우시니까 들지 못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나 지금 웃고 있어. 그러니까 빨리 나아.”
여전히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떼쓰듯 말하는 담수련이 너무 사랑스러운 듯,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더욱 세게 안고 말았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각.
하늘의 별과 달까지 둘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교주님! 교주님!”
꽃을 다듬고 있던 혈우대마종은 혈뇌의 다급한 목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 대공과 만족한 거래하고 돌아온 후, 혈뇌는 본격적인 무림 공략을 위한 세부적인 계획을 점검한다며 며칠째 집무실에 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다급함이라니…….
“혈뇌답지 않게 웬 호들갑이냐?”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혈뇌의 얼굴은 창백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는 혈우대마종의 말을 듣자마자 앞으로 엎어지더니 울기 시작했다.
“교주님…… 흐흐흑…….”
“혈뇌, 무슨 일인지 당장 말해라!”
혈우대마종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끼자 책망하는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혈마종께서 죽었습니다. 으흐흐흑…….”
순간 혈우대마종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본격적인 무림 공략을 시작하려는 지금, 혈교의 가장 중요한 전력 중 하나인 혈마종이 죽다니…….
혈우대마종은 꽃을 자르던 소검을 내려놓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마종답지 않게 언제나 온화하던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울음을 그치고 자세히 말해 봐라.”
“그게…….”
마음을 안정시킨 혈뇌는 급보로 들어온 정보를 자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 되느냐? 공격한 자들의 대부분이 후기지수였고, 최고 고수급들도 소림의 사대금강이나 무당칠검 정도인데, 어떻게 혈마전이 그런 놈들에게 전멸한단 말이냐?”
그의 말대로 혈마원의 원로들은 마왕급의 마두들로, 사대금강이나 무당칠검이 일대일로는 이길 수 없는 고수였다.
더구나 혈마종의 무공은 무황이나 한 수 정도 앞설 뿐, 백대고수급들은 상대할 수 없는 절대 고수였다.
“아무래도 악불군의 경지가 더 높아진 것 같습니다.”
“……악불군 한 놈 때문에 혈마전이 전멸했다는 것이냐?”
“전력 분석상 그 이유 외에는 절대 질 수가 없습니다.”
“저번 분석에서 처음 출도할 때보다 최소한 두 배에서 세 배는 강해졌다고 했지?”
“예!”
“그때가 겨우 한 달 전이었는데, 지금 네 말이 맞다면 그새 최소 두 배가량 강해졌다는 말이 아니냐?”
“저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 결과가 그러니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대공, 이놈이 뭔가 아는 것이 있었구나.”
혈우대마종은 대공이 내건 첫 번째 조건이 악불군의 제거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악불군이 스스로 천륭검가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검황의 무공을 익힌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혈우대마종이 경험한 검황의 무공은 정종 무공으로, 이런 식으로 무공이 급속도로 늘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놈이…….”
혈우대마종은 악불군처럼 빠르게 무공이 늘어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굳어진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혈뇌.”
“예, 교주님!”
“마종들에게 명을 하달해라. 분산시킨 전력을 전부 소집해 전력을 강화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악불군 그놈에게 혈마종을 죽인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똑똑히 알려 줄 것이다.”
“존명!”
* * *
혈마전 소식은 측천무후궁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악불군이 혈마종을 혼자 죽였다고?”
“예, 그곳에 있었던 본 궁의 제자 말에 의하면 엄청난 싸움이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정파의 후기지수 안에도 측천무후궁의 간세가 있는 듯했다.
측천무후는 간세가 보내 온 당시 싸움을 묘사한 보고서를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갈수록 욕심나는 놈이군. 본 무후의 호위로 삼으면 딱일 것 같은데. 묘묘.”
“예, 궁주님.”
“악불군은 지금 어디로 갈 것 같아?”
“천호방 총단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지금 담무룡은 어때?”
“혈도가 폐쇄된 채 너무 긴 시간을 보내서, 시간이 좀 걸리고 있습니다.”
“본 궁에 공청석유가 한 병 있지?”
“있긴 있습니다만…….”
“그거 오늘 담무룡에게 줘라. 그럼 당장에 원래 공력을 찾을 수 있을 게다. 더 기다리기가 싫구나.”
“궁주님, 공청석유 한 병이면 공력을 찾는 것을 떠나 최소한 삼십 년 이상 공력이 더 높아질 수 있습니다.”
“상관없다. 당장 먹여.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 빨리 보고 싶다.”
측천무후의 얼굴에는 미묘한 미소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