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05화>
405화. 충돌(1)
“어서 오세요.”
측천무후는 담무룡이 들어서자 미소를 지으며 맞았다.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소?”
담무룡은 옆에 있는 연무장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성격이 급하다고 하더니, 정말 급하시네요? 그래도 일생에 다시없을 중요한 비무인데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시작하시지요. 비무가 끝나면 다시는 나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기회는 없을 테니까요.”
순간 담무룡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그가 아는 천하제일 고수인 대공조차도 그를 일 초에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측천무후는 이미 담무룡은 자신의 수하로 삼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얼굴을 볼 이유도 더 이상 없을 것 같소이다.”
말은 차갑게 했지만 담무룡은 그녀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듯한 차가 놓여 있었다.
측천무후는 담무룡의 앞에 앉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특별히 친한 사이가 아닌 경우 초대한 사람이 먼저 차를 마시는 것은 일종의 예의였다.
차에 아무런 수작도 벌이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은 차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귀한 차인데 좀 음미를 하시지, 좀 아깝네요.”
“이제 차를 마셨으니 시작합시다.”
담무룡은 몸을 일으키더니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뒤따라 측천무후가 일어서자 시녀 둘이 나타나 그녀의 겉에 걸친 궁장을 받아들였다.
가뿐한 경장 차림을 한 그녀는 무기대로 가서 여인들이 사용하는 얇고 짧은 경검(輕劍)을 골랐다.
담무룡의 앞에 도착한 측천무후는 검을 한 번 가볍게 휘두르더니 말했다.
“일 초에 그대로 패배하면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담 가주께 마음껏 공격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십 초 정도면 충분하시겠지요?”
고수가 하수에게 삼 초를 양보하는 경우는 꽤 있었다. 하지만 십 초를 양보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수라 해도 십 초나 양보하는 것은 위험이 있어서였다.
하물며 상대는 무림 십대고수 중 한 명인 담무룡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쌍월검을 교차하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괜한 자존심 부리다가 패배하여, 그녀의 하인이 된다면 그것이 더욱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은 조금도 경시하는 모습 없이 자신의 진기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건천이화신공이 최고로 올라오자 그의 쌍월검이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화염검으로 변했다.
“검에는 눈이 없소이다. 하지만 궁주가 스스로 제안했으니 후회는 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담무룡이 드디어 공격에 들어갔다.
그의 쌍월검에 움직이자 뜨거운 불길이 측천무후의 어깨를 노리며 날아갔다.
“이 정도 위력으로는 저를 당하기 어렵습니다. 좀 더 힘을 내셔야겠네요.”
담무룡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자신의 구성의 공력이 깃든 이화(理火)가 그녀가 가볍게 흔든 검에 너무 쉽게 튕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오.”
말을 마친 담무룡이 몸을 날렸다. 단지 검을 휘두른 것과는 위력의 강도가 달랐다.
거기다 담무룡의 쌍월검은 연환검식이었다. 마치 바람개비가 돌 듯 상대를 공격하는 그의 선풍연화검식은 상대가 방어할 틈을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자신의 전력이 깃든 검을 측천무후는 단지 검끝을 살짝살짝 움직이는 정도로 모두 막아 내고 있었다.
담무룡의 쌍월검이 동시에 측천무후를 갈라갔다. 그의 전력이 들어간 검의 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검은 그녀의 검에 막히고 말았다.
“이 정도면 십 초는 지난 것 같군요? 이제 공격을 할 테니 잘 받으세요.”
놀란 눈으로 물러선 담무룡에게 미소를 지으며 경고한 측천무후는 검을 들어 올렸다. 아니, 올리는 것 같았다.
순간 그대로 공격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은 작전을 바꿨다.
그가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을 안 이상, 이제 일 초는 버텨야겠다고 바꾼 것이다.
쌍월검의 검막이 그의 주위를 완벽하게 감쌌다.
거기에 호신강기까지 뿜어냈으니 일 초 정도는 당연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오산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분명 하나의 검이었다. 그러나 그를 찔러 온 것은 수십 아니 수백 개의 검이었다.
그의 완벽한 검막은 그대로 해체되었고, 호신강기까지 뚫어 버린 검은 그의 전신 요혈을 무려 여덟 곳이나 찔렀다.
만약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일 초 만에 그는 시체로 변했을 것이 분명했다.
“담무룡, 일 초에 패배한 것을 인정하느냐?”
평생 무공을 수련했고 수백 번의 싸움으로 단련된 그는 너무 허무하게 패하자 넋을 잃은 듯 허탈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측천무후는 완전히 달라진 말투로 그에게 소리쳤다.
“패했소.”
“인정하다면 당장 부복을 하고 나를 주인으로 섬겨라.”
담무룡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남에게 부복을 받기만 하던 그에게 부복이라니…….
“패한 것도 모자라 이제 약속까지 어길 생각이냐?”
몸을 부르르 떨던 담무룡은 털썩 무릎을 꿇더니 부복을 하고 말았다.
그로서는 평생 처음 당하는 치욕의 순간이었다.
* * *
“적설이 진짜 싸우겠다고 했어?”
항주 외곽의 산길을 천천히 내려오며 담수련이 물었다.
“적설과 보타검각의 새들은 천적 관계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저쪽은 두 마리인데, 적설 혼자 이길 수 있을까?”
“준비를 해야지요.”
“준비?”
“적설을 보호할 방호물(防護物)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방호물이라…….”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리 둘을 태우고 다닐 정도면 여간한 무게는 견딜 수 있을 테니까, 방어에다가 공격까지 할 수 있는 방호물을 만들면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어떻게 만들지?”
“아가씨께서 설계하시면 제가 만들겠습니다.”
“알았어. 그럼 그 문제는 결정됐으니까, 이제 뭐하지?”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이만 총단으로 돌아가야지요.”
악불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담수련의 입이 살짝 튀어나왔다. 뭔가 불만이 있다는 의미였다.
“하하~ 아가씨 입술이 또 왜 이러실까요?”
악불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지 실소를 터뜨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원에서 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악양과 소주 그리고 항주를 꼽는데, 난 항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아직 항주의 야경을 제대로 본 적이 없거든!”
한마디로 놀자는 뜻이었다.
담수련의 아기 같은 모습에 악불군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같이 야경 구경하지요 뭐.”
“정말!”
금세 표정이 환해지는 담수련이었다.
“예, 어디 가보고 싶으십니까?”
“뇌봉탑!”
“뇌봉탑이요?”
“거기서 바라보는 서호의 야경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그럼 가 보지요.”
둘은 백설의 고삐를 뇌봉탑 쪽으로 돌렸다.
* * *
“항주가 아름답다고 하더니 헛소문은 아니군.”
해가 떨어지고 뻘건 노을이 작게 드리운 서호에는 사방에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뇌봉탑의 삼 층에 올라선 학사 차림의 청년은 섭선으로 얼굴을 살살 부치며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혈강한테 이런 낭만적인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네?”
섭선으로 얼굴을 부치던 청년은 옆에 나타난 여인을 보자 미소를 지며 물었다.
“혈미, 빨리 왔네? 그래 알아는 봤어?”
혈미라 불린 여인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여기서 그리 멀지는 않더라고. 신법으로 달리면 한 식경 안에 도착할 수 있겠어.”
둘은 혈교의 혈공자와 혈낭자였다.
혈우대마종이 혈교의 다음 대 간부로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무공을 가르친 그들은 천년마교의 성골 가문의 자손들이었다. 진골 가문의 자손들은 각자 따로 수련을 하는데, 그들 중에서 나온 자들이 바로 사대마종이었다.
“혈강, 오랜만이네?”
그때 또 한 청년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혈검이었다.
“한 달 전에도 봤는데 오랜만은 무슨, 모두 잘 왔냐?”
“혈공자 삼십 명, 혈낭자 이십 명이 백 명의 혈교전사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천마전에서도 천마원 원로 다섯 명과 천마전사 백 명을 보내기로 했다.”
혈검의 말에 혈강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드디어 악불군의 신화가 사라지는 날이 되겠군.”
혈교의 사망부 첫 장에 이름이 오른 후 본격적인 악불군 제거 작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전격적으로 기습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하고 있을 거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로 택한 곳은 뇌봉탑이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 해도 삼백 명에 가까운 무리가 이동하는 것은 천호방의 눈에 띌 수가 있었다.
하나, 뇌봉탑은 수백 명의 선남선녀와 장사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수가 움직여도 의심받지 않을 곳이었다.
“호호~ 혈요가 온 것 같네.”
밑을 보고 있던 혈미가 반가운 듯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뇌봉탑을 향해 여덟 명의 남녀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며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혈낭자와 혈공자였지만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혈요였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했는데 저렇게 요기를 뿌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혈강은 보이는 남자마다 추파를 흘리는 혈요를 보며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그때 서호의 중간에 한 놀잇배에서 한 줄기 빛이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터지며 화려한 불꽃을 만들었다.
서호에서는 부잣집 공자들이 기녀들과 함께 놀이를 나오면 이따금 벌이는 유흥으로,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는 모습이었다. 하나 뇌봉탑에 모인 혈공자와 혈낭자들에게는 달랐다.
천마전에서 이번 기습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자들이 도착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뇌봉탑에 또 한 여인이 나타났다.
“혈란 왔구나!”
그녀를 보자 제법 친한 듯, 혈미가 제일 반가워했다.
악불군에게 죽은 혈공자와 혈낭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모인 자들 중 악불군의 얼굴을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
혈강의 질문에 그녀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악불군을 봤어.”
“어디서 봤다는 거냐?”
“이쪽으로 오고 있었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그럼 천호방에서 눈치챘다는 거야?”
혈강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만약 그들의 행적을 천호방에서 눈치챘다면 이번 기습은 포기해야 했다.
그때의 상황을 잠시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자세히 좀 말해 봐라.”
“혈운하고 같이 오는데, 뒤쪽에서 말을 타고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오더라고. 챙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분명 악불군이었어. 그래서 나만 먼저 신법으로 달려왔고, 혈운은 모른 척 둘의 뒤를 따르고 있어.”
“그럼 얼굴은 못 봤다는 거야?”
“얼굴은 못 봤지만 확실하다니까!”
혈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천호방을 감시하는 혈교의 첩자는 악불군이 천호방 총단에 들어갔고 이후 나온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혈란이 이렇게 확실하다고 하니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두 명이라고 했지? 또 한 명은 누구였는지 알아?”
혈미가 물었다.
“계집은 분명한데 누군지는 모르겠어.”
“계집이 분명해?”
“응.”
“그렇다면 말이 되는데? 악불군의 나이가 젊잖아. 피가 끓는 남자인데 여자 생각이 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방도들한테 보이기는 좀 그러니까 혼자 빠져나와서 여자를 만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혈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만약 악불군이 정말 혼자 이곳에 온 거라면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든 거나 마찬가지다. 젊은 놈이 주체할 수 없는 명성을 얻더니 드디어 방심한 모양이다. 혈검, 악불군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고 그쪽으로 모두를 모이게 해라.”
“알겠다.”
혈강이 이번 계획의 지휘자인 듯 혈검은 즉시 몸을 날리려고 했다.
“갈 필요 없어.”
밑을 보던 혈란은 혈검을 막았다.
“왜?”
“악불군이 이곳으로 오고 있어.”
그녀의 눈에는 하얀 백마와 검은 말을 타고 천천히 뇌봉탑을 향해 오는 악불군과 담수련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