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06화>
406화. 충돌(2)
“저놈이 악불군이라는 말이지……? 소문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일류급 정도의 무공을 지닌 것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구나.”
“겉모습에 속으면 안 돼. 혈루와 혈성이 저 모습에 방심했다가 그대로 당했다.”
혈란은 당시 생각이 나는지 분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마신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 같다. 모두 완벽하게 저놈의 주위를 포위할 때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지켜보기만 한다.”
말을 마친 혈강은, 뇌봉탑 주위에 퍼져서 야경을 구경하는 양민으로 변장하고 있는 혈공자와 혈낭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 * *
뇌봉탑이 지어진 것은 대략 오백 년 전이었다. 수많은 전화로 여러 번의 중건(重建)은 있었지만 여전히 거대했고 아름다웠다.
“소군은 뇌봉탑의 전설에 대해서 알아?”
뇌봉탑이 보이자 담수련은 신난 표정으로 물었다.
“뇌봉탑에 전설이 있습니까?”
“옛날 옛적에 아미산에 백사와 청사가 살았대…….”
담수련은 송나라 때부터 야사로 전해져 내려오는 뇌봉탑에 얽힌 전설을 말해 주기 시작했다.
“비록 미물인 뱀 요괴지만, 정인에 대한 일편단심은 다른 사람들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되네요.”
“역시 소군도 그렇게 느꼈지? 사화에게 얘기해 주니까 요괴가 예뻤냐는 둥, 딴소리만 하더라고. 역시 소군과 나는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
통한다는 말이 괜히 기분이 좋아진 악불군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그래서 나도 그 백사처럼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할 거야.”
“아가씨라면 충분히 그러실 것입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담수련의 입술이 슬쩍 나왔다. 분명 칭찬이었건만 담수련에게는 충분치 않았던 듯했다.
“……소군은 내가 누구와 그런 사랑을 할 건지 궁금하지도 않아?”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정말 안 궁금해?”
악불군이 답이 없자 담수련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제가 궁금해해야 하는 거지요?”
“안 궁금해도 돼!”
바보 같은 대답을 들은 담수련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대답하지 않을 것처럼 고개를 돌렸지만 악불군의 부름에 금방 담수련이 답했다.
“왜?”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누구랑 그런 사랑을 하시려고요?”
“……몰라!”
막상 악불군이 묻자, 담수련은 잠시 악불군의 눈을 보더니 얼굴이 붉어지며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씨! 묻는 게 아니었는데 실수했어.’
막상 묻자 답을 못하는 그녀였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전설이 맞다면, 뇌봉탑의 어딘가에 그 백사 요괴가 갇혀 있겠군요?”
악불군이 슬쩍 화제를 돌리자, 곤란한 상황을 벗어난 그녀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말을 받았다.
“책에 의하면 청사가 수십 년을 수련해 결국 법해 법사를 이기고 백사를 구했대. 정말 대단하지.”
“그랬군요. 역시 언니를 구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법사의 법력을 이겼군요.”
“소군, 우리 올라가자.”
뇌봉탑 앞에 도착한 그녀는 금방 신이 나서 말했다. 뇌봉탑 위에서 보는 서호의 풍경은 천하절경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 그러지요.”
악불군은 잠시 멈칫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뇌봉탑까지 오는 동안, 아주 미약하게 그를 노리는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적들은 최대한 살기를 감추려고 했지만 악불군의 감지 능력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 느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명성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 자신을 노리는 자들도 늘어나고 있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나, 살기를 보이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좀 거슬렸다.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너무 좋아해서였다.
‘그래, 위험 신호도 없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악불군은 백설의 고삐를 풀어 목에 걸어 자유롭게 해 주고는 담수련을 보호하며 뇌봉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놈이 진짜 뇌봉탑에 오르고 있다. 천마전의 원로들까지 오기 전에는 절대 건드리지 마라.]
혈강은 악불군의 말에서 내려 뇌봉탑 안으로 들어서자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느끼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혈강, 너 정말 횡재했네?]
그의 귀에 혈미의 전음이 들려왔다.
[무슨 의미야?]
[악불군을 죽이게 되면 네 입지가 혈공자 중 최고가 될 것은 자명하지 않겠어?]
혈우대마종은 공(功)과 과(過)가 확실했다. 혈마종을 죽이고 사망부의 첫째 장에 이름을 올린 악불군의 제거에 성공한다면, 혈강의 위상이 수직으로 올라갈 것은 분명했다.
[그건 제거에 성공한 후에 생각할 문제다.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혈뇌에게 악불군에 대해 자세히 듣고 온 그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혈강! 악불군이 네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혈강의 귀에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하필 왜?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혈강은 약간 불안했지만 곧 혈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최대한 연인처럼 행동해.]
혈미는 함박 미소를 지며 혈강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살짝 기댔다. 혈강은 연기인지 몰라도 혈미는 아닌 것 같았다.
“와! 여기 너무 좋다.”
그사이 계단을 올라온 담수련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탄성을 지르며 난간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말대로 훤하게 보이는 서호의 야경 광경은 실로 아름다웠다.
슬쩍 고개를 돌리던 혈강의 눈이 커졌다.
담수련은 오랜만에 역용을 하지 않은 본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확한 얼굴도 아니고 단지 옆모습만으로도 혈강은 가슴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저 계집은 너무 예쁘네! 호호~ 여자 좋아하는 혈강, 오늘 여러 가지로 운이 좋네. 그런데 어쩌지? 난 저 계집을 죽이고 싶으니.]
[저 계집은 내가 가져야겠다. 건드리지 마라.]
[뭐래? 진짜 첫눈에 홀딱 반했나 보네.]
혈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며 다시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봐도 예뻤다.
‘혈요는 온갖 요기를 뿌려 남자를 유혹하는데 저 계집은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로 유혹이 되니, 진짜 요녀는 저 계집이네.’
자신을 보는 눈길을 의식한 듯 담수련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그녀를 보고 있다가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그녀의 진면목을 보면 언제나 보이는 눈길이기에,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서호로 눈길을 돌렸다.
“좋으세요?”
“응,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항주에서 사시면서 왜 한 번 놀러 가지도 않으셨을까?”
“가주님께서는 천하를 경영하신 분입니다. 이런 소소한 일까지는 생각하실 여력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담수련이 어릴 때부터 보아 온 담무룡은 언제나 바빴다.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항주조차 놀러 간 적이 없었다.
담수련은 그런 아버지의 삶이 행복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소군은 이런 게 소소한 일 같아? 스스로의 행복도 찾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행복도 모르는 법이야. 그래서 아버지는 권력을 가지고도 남들에게 원망만 들으신 거야.”
담수련은 아버지이기에 반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담무룡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 소군하고 둘이만 살면서 매일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예전에 그녀는 악불군과 함께 농사라도 지으면서 그냥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망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다 같을 수는 없겠지요. 가주님께서 지향하시는 바가 저희랑 다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군은 아버지를 이해하나 봐?”
“이해는 못 합니다. 그렇다고 가주님을 비난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군 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 무슨 일 있어?”
말하던 담수련은 악불군의 표정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제가 좀 방심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희를 노리는 자들을 느꼈는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별거 아닌 줄 알았다는 말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고수야?”
“고수이기도 하지만, 그 수가 생각 외로 많습니다.”
“몇 명이나 되는데?”
“지금 느껴지는 수만도 백여 명은 되는데,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아?”
“예.”
순간 담수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우리의 허를 완전히 찌를 생각이었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총단을 공격할 생각이었어. 상당히 똑똑한 자가 세운 계획이야. 뇌봉탑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고 항주성 밖에 있으니 천호방의 감시망을 피하기도 쉽고, 막상 달리면 총단까지 한 식경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잖아.”
“혈마전이 당한 복수를 하려는 것이군요?”
“그들밖에 없잖아? 그런데 그렇게 수가 많으면 빨리 피해야지, 이렇게 계속 여기 있으면 어떡해?”
“오랜만에 아가씨께서 즐거워하시는데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담수련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악불군이 판단하기에 안전하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아무리 자신이 좋아한다 해도 그냥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만 가자.”
“예, 그러지요.”
순간 그는 혈강과 혈미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만 갈 생각입니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다고 생각하고 혈미와 함께 연인인 척 연기하고 있던 혈강은, 갑작스러운 악불군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 예. 그럼 잘 가십시오.”
“내 말을 이해 못 했구나? 너희를 죽이고 가겠다는 말이다.”
[들켰다!]
이어지는 악불군의 말에 혈강과 혈미는 깜짝 놀라 무기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준비하고 있던 악불군의 쾌검을 피할 방법은 이미 없었다.
“어, 어떻게…….”
목울대가 갈라진 혈강은 간신히 한마디를 꺼냈다. 혈미는 이미 즉사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니까 전음을 조심해야지. 아가씨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말을 함부로 한 벌이다.”
‘혈뇌께서 방심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거늘…….’
혈강은 자신의 실수가 너무 원통한지 눈도 못 감고 엎어지고 말았다.
이번 계획만 성공하면 그의 앞은 탄탄대로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의 자만심으로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말았으니, 원통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아가씨, 그럼 가야겠습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을 한 손으로 안더니 밑으로 뛰어내렸다.
“죽여라!”
이미 뇌봉탑 전체를 포위하고 혈강의 명령만 기다리던 혈공자와 혈낭자들은, 악불군과 담수련이 꼭대기에서 백설의 등으로 뛰어내려 그대로 달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듯 악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악!”
“으악!”
백설의 앞을 막아 가던 자들은 단발마를 터뜨리며 죽어 나갔다.
악불군의 천호단궁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지 않았다.
“추격해라!”
이중삼중의 포위망은 너무 쉽게 뚫렸다.
혈강이 안 보이자 지휘를 맡은 혈검은 악불군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그에게는 아직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었다.
악불군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천마전의 원군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군, 지금 우리 도망가는 거 맞아?”
악불군의 품에 꼭 안긴 담수련은 고개를 살짝 내밀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가 아는 백설의 속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뇌봉탑에 양민들이 너무 많아서, 거기서 싸울 경우 죄 없는 사람들의 피해가 생길 것 같아서 싸우기 편한 장소로 갈 생각입니다.”
“너무 많은데 괜찮겠어?”
“언제든지 도망은 칠 수 있을 테니, 총단 기습은 아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이고 도망칠 생각입니다.”
“소군이 알아서 하겠지 뭐.”
담수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악불군의 허리를 손으로 꼭 껴안았다. 분명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그와 같이만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악불군이 꼭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