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07화>
407화. 국면 전환(1)
“염라혈도 장로님, 혈검 공자님께서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천마단 유장필의 말에 염라혈도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받았다.
“다 와 간다고 해라!”
그는 재촉하는 신호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게 아니라, 악불군이 지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매우 빠른 말을 타고 가고 있으니 퇴로를 차단해 달라고 합니다.”
“혈교전사를 백 명이나 끌고 있으면서 놓쳤다는 거냐?”
“지금의 신호 체계로는 간단한 내용만 보낼 수 있어서,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습니다.”
“그럼 빨리 막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염라혈도, 좀 이상하지 않아?”
그때 듣고 있던 일로음살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
“그놈이 도망을 치는 거라면, 최대한 빨리 항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더욱이 말을 타고 달린다면 대로를 타는 게 맞을 거고. 그런데 지금 이 길은 서호의 으슥한 곳으로 통하는 작은 숲길이잖아? 그놈이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일로음살의 말에 염라혈도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지금 그들은 천호방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배로 이동한 후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서호의 외진 곳에 내려 이동하고 있었다. 더구나 뇌봉탑에서 항주 성내로 가는 길과 방향도 달랐다.
“뭘 깊이 생각해? 항주로 가는 길이 혈교전사들과 혈공자에게 막히니까 급한 대로 이 길을 타는 거겠지. 설마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쪽으로 오겠냐?”
듣고 있던 쌍면마군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말하자 같은 원로인 적포노괴가 거들었다.
“오면 죽이면 되지, 이쪽으로 오건 딴 쪽으로 가건 무슨 상관이야?”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염라혈도였지만 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다른 곳으로 도망쳤으면 쫓아가야 할 판이었는데 잘된 거다. 곧 도착할 텐데, 놈을 맞이할 준비나 하자.”
* * *
“아가씨, 곧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겁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악불군이 으슥한 숲길로 들어서자 이미 예상을 한 터였다.
“제가 몸을 날리면 백설이 숲길로 뛰어들 겁니다. 절대 내리지 말고 백설이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고삐만 잡고 계십시오.”
백설의 감지 능력은 인간보다 수십 배는 더 뛰어났다. 그리고 이들이 노리는 것은 자신이니 백설을 굳이 추적할 리도 없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빨리 도망쳐.”
“예, 걱정 마십시오. 백설아, 부탁한다.”
악불군은 앞에서 수십 명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자 고삐를 담수련에게 넘기고는 몸을 날렸다. 그러자 백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향을 바꿔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염라혈도 장로님, 말이 방향을 바꾼 거 같습니다.]
앞의 상황을 살피던 유장필은 자신들의 방향으로 달려오던 말이 방향을 바꾼 것을 감지하자 급히 전음을 보냈다.
[놈이 말만 보내고 직접 움직이고 있다. 말을 신경 쓰지 말고 놈만 죽인다.]
염라혈도는 초절정 고수답게 악불군이 단신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악!”
“악!”
털썩! 툭!
나무 위에 매복하고 있던 수하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들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모습에, 모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기어검?”
검 하나가 소리도 없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숨어 있는 수하들을 죽이고 있자, 쌍면마군은 경악한 눈으로 소리쳤다.
그들 역시 악불군의 절기가 이기어검이라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감지한 악불군은 아직 오십 장 밖이었다. 어떤 고수도 오십 장 밖에서 이기어검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염라혈도가 급히 몸을 날리며 그의 혈도를 천륭검을 향해 내려쳤다. 하지만 천륭검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그의 도를 교묘하게 피하고는 또 다른 수하들을 뚫고 지나갔다.
오십 장은 악불군에게는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나타난 악불군은 숨어 있는 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혈마전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였던 분광혈영(分光血影)은 이번에도 그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붉은 인영이 보이는 곳마다 천마전사들은 무기도 휘두르지 못하고 시체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악불군이 쏜 천호단궁이 박혀 있었다.
분명 매복은 그들이 했거늘 죽어 나가는 자들은 혈교의 무인들뿐이었다.
“이놈이 살수 무공을 쓴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는 곳은 무조건 공격해라!”
날아다니는 천륭검을 떨어뜨리기 위해 쫓던 염라혈도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다급히 소리쳤다.
하나, 그의 외침은 공염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림자나마 볼 수 있는 자들은 다섯 명의 원로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악불군을 쫓아온 혈공자와 혈낭자들이 도착했다.
‘뭐야? 이 잠깐 사이에 이렇게 많이 죽였다고?’
혈검은 아비규환으로 변한 전장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악불군의 무공이 혈뇌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혈운과 혈채는 우선 주위에 혈교전사들과 함께 귀역무간진(鬼域無間陣)을 펼쳐라, 지금 상태로는 그놈을 못 잡는다.]
[알았다!]
혈검의 명이 떨어지자 백 명의 혈교전사들과 십여 명의 혈공자들이 여러 형태의 몽둥이들을 박더니, 그 사이사이에 무기들과 방패를 들고 주위를 에워쌌다.
[난 총단의 혈공자요. 천마전의 원로들이시오?]
혈검은 커다란 적포를 입고 있는 적포노괴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물었다.
[맞습니다. 저놈의 무공이 이렇게 대단할지는 몰랐습니다.]
적포노괴 역시 대단히 놀란 듯 얼굴이 벽돌같이 굳어져 있었다.
[그래도 한 놈인데 이렇게 당하고 있는 것은 우왕좌왕했기 때문이오. 빨리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소.]
혈검의 말에 적포노괴도 정신이 든 듯 입에 호각을 물더니 짧게 다섯 번을 불었다.
그러자 보이지도 않는 악불군을 잡는다고 주위를 무차별 공격하던 천마전사들이 빠르게 모이기 시작했다.
캉카캉!
그때 드디어 염라혈도가 천륭검을 쳐 내는 굉음이 들렸다. 이 갑자의 내공이 깃든 혈도에 맞자 천륭검은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붉은 그림자가 허공에 나타나더니 검을 낚아챘다.
“이놈! 잡았다.”
염라혈도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붉은 그림자를 공격해 들어갔다.
하나, 혈마종에 비해 두 수 이상 낮은 무공을 지닌 그가 악불군과 정면으로 붙은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번쩍하는 검광이 혈도를 받아치는가 싶더니, 도와 염라혈도의 허리까지 같이 잘라 버린 것이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악불군을 본 모두는 덤비지도 못하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천마전에서 온 자들 중 최고의 고수가 제대로 활약도 못 하고 그대로 죽어 버리자 모두의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백 명에 가까운 자들이 남아 있었고, 거기다 염라혈도 덕분에 전열까지 다시 가다듬었으니 그대로 물러설 리 없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전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네놈이 악불군이냐!”
쌍면마군이 친했던 염라혈도의 시체를 보더니 울부짖듯 물었다.
사실 너무 많은 적의 등장에 이기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한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말한 대로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고는 도망을 칠 생각이었다.
하나 싸움을 시작해 보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니, 혈교가 좀 미련한 것 같구나. 준비가 끝났으면 들어와라!”
악불군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더욱 열을 받은 혈검이 크게 소리쳤다.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공격해라!”
그러자 열 명씩 공격진을 이룬 천마전사들이 먼저 공격에 들어갔다.
“귀역무간진도 발동해라!”
이어진 혈검의 외침에 혈교전사들의 움직임도 변하기 시작했다.
훗날, 무림사에 서호 침사림의 혈투라고 불린 대 전투의 시작이자, 악불군에게 또 하나의 영웅담이 추가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평소 손님이 없어 장사를 접어야 하나 고민까지 하던 오삼의 입에 귀에 걸려 있었다.
그는 안휘성과 접한 절강의 작은 현 주루의 주인이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갑자기 손님들이 세 배 이상 늘었기 때문이었다.
서호 침사림의 혈투 이후 천호방이 있는 절강으로 이동하는 무림인들이 부쩍 늘자, 장사꾼들 역시 같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수경 대사님!”
주루 이 층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년인이 몇 명의 스님이 올라오자 반갑게 소리쳤다.
“아미타불, 남궁 시주님을 여기서 뵙는군요?”
수경대사와 옆에 있는 다른 스님들도 안면이 있는지 반갑게 반장을 했다.
“이렇게 만난 김에 합석하시지요.”
“그러지요.”
그들이 지금 향하는 곳은 천호방의 총단이 있는 항주였다. 마치 여행하는 듯 편한 모습들이었지만 사실은 악불군의 소집령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남이 듣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자리에 앉자 전음으로 바꿨다.
[수경 대사님께서는 이번 소집이 무엇 때문인지는 아십니까?]
[빈승이 알 리 있겠습니까? 악 시주님께서는 여전히 간세를 극구 경계하고 계십니다.]
[하긴, 지금 무림맹은 물론 전 정파가 시끌벅적하더군요.]
[남궁세가에서는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다행히 본 세가에서는 아직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악불군이 침사림에서 홀로 이백 명이 넘는 혈교의 무리들을 전멸시킨 후, 얼마간 무림은 시끄러웠다. 엄청난 쾌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 만에 이어지는 소문으로 천하는 다시 술렁였다.
첫 번째는 구천마성이 화룡세가를 전격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다.
부역자 세력 중 핵심인 화룡세가는 그 싸움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구천마성 역시 완벽하게 멸문시키지는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또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
여러 문파의 핵심 간부들은 물론 무림맹의 간부까지 최소한 이십 명이 넘는 무림의 중추급 인물들이 암살당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죽인 암살자들의 정체였다.
전부 잡힌 것은 아니지만, 잡힌 자들의 면면이 죽은 자와 가장 지근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측천무후궁의 위험성을 천하가 확실하게 자각한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악불군이 소집했으니 모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이는군요?]
밖으로 잠시 눈을 돌렸던 남궁원태는 무당파와 화산이 같이 오고 있는 모습을 보자 반가운 듯 말했다.
혈마전의 대승을 맛본 그들은,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사기는 상당히 충천해 있었다.
악불군의 엄청난 무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 *
천호방이 있는 항주는 몰려오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특히 무림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혈마전의 대승에 이어 침사림의 혈투까지 악불군의 명성이 끝 간 데 없이 높아지자, 사람들은 천호방을 무림맹에 버금가는 정파의 구심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천호방에 가입을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불군과 한번 겨뤄 보고 싶어 온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어떻게든 천호방과의 친분을 만들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당연히 천호방은 쉴 새 없이 통행하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하나 그 안으로는 또 다른 이유로 매우 바빴다.
비록 악불군에게 전멸을 당했지만, 만약 그들이 천호방의 총단을 기습했다면 승패를 떠나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은 자명했다.
그 바람에 천호방은 때아닌 증축과 재건축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래 잠룡세가였으니 상당한 방어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담수련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하고는, 그녀가 아는 최고의 방어진을 이용해 구조를 변경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사방 곳곳에 함정까지 만들었다.
“이러다가 아가씨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데…….”
축시가 중간쯤 지난 시각, 밖을 나온 악불군은 담수련의 방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소군입니다.”
악불군의 목소리를 들은 담수련은 즉시 문을 열었다.
“어서와. 오늘 많이 바빴지?”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도 방주의 임무였다.
“예, 오늘따라 중요한 분들이 많이 왔습니다. 아가씨께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 나도 바빴거든. 이거 봐 봐.”
악불군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담수련은 자랑스러운 듯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가리켰다.
“이게 뭡니까?”
“적설에게 입힐 방호복 설계도야. 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어. 그런데 돈이 좀 많이 들 것 같아. 쇠를 모두 만년한철로 만들어야 해.”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악불군의 표정이 갑자기 확 변했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경우는 담수련이 쓰러졌을 때 빼고는 진짜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담수련 역시 놀란 듯 급히 물었다.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