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09화>
409화. 아버지(1)
“아가씨, 가주님은 아가씨의 아버님이십니다. 절대 아가씨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버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해 주신 것은 알아. 하지만 아버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이야.”
“아가씨께서는 효녀십니다. 자꾸 가주님과 각을 세우신다면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겁니다.”
“소군은 내가 아버님과 각을 세우는 것 같아? 난 지금 아버님께 효도하기 위해 이러는 거야. 더 욕심을 부리신다면 명예까지 잃을 수 있어. 난 그것을 지켜 드리고 싶어.”
“휴우~”
악불군 역시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키워 준 담무룡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이 그에게는 절대 쉽지 않았다.
“소군, 나랑 약속을 하나 해 줘야겠어.”
“말씀하십시오.”
“명령이라는 말은 좀 미안하지만, 이번만 사용할게. 소군은 나와 아버님이 서로 다른 명령을 내리면 누구 말을 들을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담무룡과의 비교이니 조금이라도 머뭇거릴 만했지만, 악불군의 답은 단호했다.
“전 아가씨를 위해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주님의 명이십니다. 당연히 전 아가씨의 명만 듣습니다.”
“아버님께서 분명 나 모르게 소군에게 어려운 명을 내릴 거야. 그때 내게 반드시 말해 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대답과는 달리 담시 뜸을 들이자 담수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말했다.
“왜 이번 답은 늦어? 나한테 말해 주는 거 확실하지?”
“예, 그러겠습니다.”
측천무후나 담무룡은 예상하지 못한 담수련의 당찬 대응에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담무룡이 천호방 총단에 거처하고 있는 그 자체가 폭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담수련이 이런 상황까지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악불군조차 모르고 있었다.
* * *
“담무룡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묘묘선자의 말에 측천무후는 비소를 그리며 말했다.
“전대 궁주님께서는 남자는 절대 믿지 말라고 하셨지. 하지만 이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하라고 하셨다. 담무룡은 이용물일 뿐이다.”
“그자는 효웅이라고 알려진 자입니다. 궁주님께 충성을 맹세했다고는 하지만 분명 뒤통수를 칠 것입니다.”
“그래도 당장은 아니겠지. 얼마간은 약속을 지킬 정도의 자존심은 가진 자니까.”
“그리고 각 문파의 중견무인들이 후기지수들을 이끌고 천호방으로 모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놈이 뭔가 또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
“본 궁의 간세들은 그 안에 있겠지?”
“예, 있습니다. 하지만 후기지수 위주로 소집을 한 터라,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간세가 없습니다.”
“전력이 약한 것을 무릅쓰고라도 최대한 간세들을 배제하겠다는 건데……. 뭐, 우선 두고 보자. 담무룡 때문에라도 골치가 아파서 지금은 당장 아무런 짓도 못 할 거다.”
“알겠습니다.”
측천무후의 머리는 여간한 책사들을 능가했다. 하지만 그녀는 담수련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 * *
며칠간 천호방은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악불군과 혈맹지약을 맺는 모든 문파에서 제자들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수가 오백 명을 상회했으니, 천호방 총단 전체가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내원 역시 손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가주님!”
누진봉과 양호철을 비롯한 잠룡밀과 잠봉밀의 간부들은 담무룡을 보자마자 즉시 부복을 했다.
담무룡의 요구를 받은 담수련이 모두를 부른 것이었다.
부복은 하지 않았지만 눈물을 보이며 서 있는 종리화를 본 담무룡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종리화는 그의 눈에서 ‘그동안 수고했다.’는 칭찬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앉아라.”
모두는 자리에 앉더니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 잠룡세가 시절이 생각난 것이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너희들도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정말 좋구나.”
먼저 치하를 한 담무룡은 양호철을 보며 다시 말했다.
“수운이는 태산 종가로 갔다고?”
“제가 부족해서 소가주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된 것인데 어찌 너를 탓하겠느냐? 그런데 천신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용히 지나고 있다고 하던데, 맞느냐?”
“그건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종리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종리 단주가 말해 보거라.”
“예, 아가씨께서 잠룡세가를 나온 후, 계획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종리화는 그동안 그들에게 일어난 일과, 악불군과 담수련이 어떻게 무림에 명성을 높여 갔는지를 자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악불군이 그렇게 강해졌다고……?”
듣던 담무룡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악불군에게 시술한 수법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하나, 무황급에 달하는 고수를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천륭검보밖에 없는데…….
하나, 그 역시 말이 안 됐다.
검황 구문황 역시 악불군의 나이 때는 악불군 정도의 성취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보거라.”
악불군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살피기로 결정한 담무룡은 화제를 바꿨다.
“혈교와 측천무후궁은…….”
또다시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담무룡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측천무후의 무공은 그가 이미 경험했으니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혈교 역시 측천무후궁의 전력에 비교해 절대 낮지 않음을 설명만으로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측천무후궁과 혈교를 악불군이 상대하겠다고 천하에 공표했다는 것이냐?”
“예.”
“이런 무지한 놈!”
담무룡은 탁자를 손으로 탁 쳤다.
“그게 무슨……?”
“이 정도 세력을 구축했으면 정중동 하며 천하의 상황을 살펴야지, 어찌 미련하게 스스로 전면에 나선단 말이냐? 병법을 안다면 그런 무지한 짓을 벌였겠느냐?”
담무룡의 말에 종리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그녀는 담무룡의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일을 뒤로하고 달려왔다. 여전히 담무룡은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흥분이 가시자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담무룡의 성정상 악불군과 담수련이 구축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파란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휴우~ 어쩌시려고 이러시는가…….’
* * *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천호방 정청에 모인 정파의 지휘자들은 악불군이 포권을 하자 황급히 같이 포권을 했다.
혈마전에서 악불군의 신위를 본 그들에게 이미 악불군은 영웅을 넘어 신인으로 보이고 있었다.
“아미타불, 악 방주님께서 천하의 평화를 위해 악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렇게 수고하고 계신데, 여기까지 오는 것이 무에 고생이 되겠습니까?”
수경 대사가 모두를 대표해서 말하자 악불군은 다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번 전투에서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각 파의 어르신들께서 또다시 이렇게 저를 도우라고 사람들을 보내 주셨으니, 저로서는 이 고마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치하하는 덕담이 오가고 드디어 본론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공격할 곳은 측천무후궁의 아주 중요한 근거지입니다. 제가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측천무후궁의 재정의 상당수도 이곳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목표가 측천무후궁이라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비장하게 변했다. 지금 무림에서 벌어지는 많은 암살 사건이 측천무후궁에 의해 벌어졌다고 모두 믿고 있어서였다.
“측천무후궁이라면 무림의 암적인 존재입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세력이지요.”
남궁영표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암살된 자들 중 남궁세가의 어른도 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언제 공격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늘 밤이 그믐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공격 시점으로 잡았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공격 시점이 예상보다 너무 빨라서였다.
“빨리 제자들에게 준비를 시켜야겠군요?”
“아닙니다. 이번 싸움은 여기 있는 분들과 본 방의 최고 고수들만 갑니다.”
“제자들은 안 데리고 간다는 것입니까?”
“이번 싸움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 은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온 각 문파의 제자들 중에 측천무후궁의 간세가 한 명이라도 있을 경우, 우리가 오히려 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총 삼십 명 정도였다. 악불군이 사람들의 면면을 들은 후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들만 선별해서 부른 것이었다.
“…….”
모두가 답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보자 악불군이 부언했다.
“그들의 힘이 혈마전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 다행인 점은 상주하는 사람의 수가 혈마전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돕기 위해 대단하신 분이 오늘 도착합니다.”
“도우러 오는 분이 또 있다는 것입니까?”
“예,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아시는 분이 있으실 겁니다.”
“우리만 간다면 남은 제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어딘가로 연락하려고 할 겁니다. 이번 기회에 어떤 자들이 간세인지까지 잡아내야겠지요.”
그들이 이끌고 온 정파의 무인들이 묵는 곳은 담수련이 이번에 심혈을 기울여 지은 곳으로, 모든 방위가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그 기운이 공간까지 미치고 있어서, 누군가 나가는 것은 물론 전서를 날린다 해도 즉각적으로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희들도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닙니다. 여기 계시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저와 함께 떠날 것입니다.”
악불군은 믿을 수 있는 자들만 선별해서 불렀음에도 이들조차도 조심하고 있었다.
모두는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해한다는 듯 곧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담수련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종리화는 악불군이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무안하게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악불군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악불군에게 조언자이자, 그가 자라오는 과정을 다 본 어른이었다.
“악 방주의 위상이 달라졌는데 예전 같은 대우를 하면 되겠습니까?”
말까지 존대하자 악불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주님과 아가씨께서도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오늘 확실하게 회포를 푸십시오. 전 회의가 많아서 자주 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주님 때문에 심려가 크지요?”
종리화의 말에 악불군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겐 은인이자 너무도 고마우신 분일 뿐입니다. 심려가 클 이유가 무에 있겠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종리화는 탄복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부모조차도 권력과 재물을 위해 죽이는 세상이었다. 황실에서조차 그런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의 악불군에게 담무룡은 정말 떼어 내고 싶은 혹 같은 존재일 터인데, 그는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악 방주를 보니 저도 악 방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점이 많았다는 것을 느끼겠습니다.”
“제가 회의 끝나면 또 들를 것이니, 그때까지 단주님께서 아가씨와 같이 계셔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생각입니다.”
종리화의 말에 악불군은 안심하는 표정으로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그럼 아가씨,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다치고 오면 안 돼.]
그런 그를 보며 담수련은 아련한 눈빛으로 전음을 보냈다.
적설이 직접 싸움에 끼어들기 때문에 그녀의 신변보호는 악불군에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데 담무룡과 종리화의 등장으로 그 문제는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담무룡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는 몰라도 담수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 * *
[악 방주, 총단에 언제 이런 걸 만들어 놨어?]
모두를 이끌고 예전 자신이 담수련을 데리고 빠져나갔던 비밀통로로 들어온 악불군은 소걸아의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그냥 유비무환의 의미로 만들어 둔 거다. 원래는 위험할 때 도망을 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디로 가는 거야?]
악불군은 아직 모두에게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고 있었다.
[나가서 배를 타면 그때 말해 주마.]
[배? 우리 배 타고 가?]
소걸아는 놀란 듯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