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12화>
412화. 보타검각(2)
살혼루는 이름 그대로 보타검각에서 살인을 위해 키운 조직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무공은 살인만을 위한 살수 무공으로 무림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부류였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무공이 악불군에게는 가장 상대하기가 쉬웠으니, 그들로서는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무림의 고수들은 살수 무공을 익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악불군은 거리낌 없이 추명호에게 백인막의 살수 무공을 배웠다.
더욱이 거기에 배교비전의 사술과 환술을 가미시켜 더욱 완벽한 살수 무공으로 발전시키기까지 했다.
당연히 무공까지 약한 살혼루의 무인들이 상대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아우, 정말 대단하시지 않냐?]
동정어옹은 자신들은 싸울 필요도 없을 정도로 파죽지세로 적을 제거해 나가는 악불군을 보며 감탄한 듯, 천수옹을 보며 말했다.
[주구께서 이렇게 직접 싸우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정말 놀랍군요. 그런데 대형, 주군의 무공이 본 가의 무공과 너무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천수옹은 악불군의 무공에서 천륭검가의 무공을 볼 수 없자 의아한 듯 반문했다.
[내가 처음 뵀을 땐 천륭검가의 무공만 사용하셨다. 하지만 이제 천륭검가만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다른 무공을 사용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무공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신 것 같다.]
동정어옹은 악불군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무공이 발전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주군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가만히 있는 모습에 월화옹이 이건 아니라는 듯 말하자, 동정어옹은 고개를 저었다.
[주군께서 우리에게 싸움에 끼지 말고 힘을 비축하라고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거네.]
동정어옹은 산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산 위에서 풍기는 엄청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끝나신 것 같다.]
드디어 악불군의 모습이 나타나자 무림사기는 급히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동정어옹의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에 당한다면 이곳에 들어오지 말았어야지요. 가시지요. 이번에는 힘 좀 쓰셔야 할 겁니다.]
[본 가의 제자들이 천호방에 입방한 이후 주군께 제대로 인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주군의 수하들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보십시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가시지요.]
미소를 지은 악불군은 앞장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살혼루에서 보타검각까지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긴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 * *
“까아악!”
불리한 와중에도 버티던 태붕은 적설의 발톱에 배를 찔리자 처절하게 울었다. 검에도 상처 하나 나지 않는 질긴 피부를 자랑하는 태붕이었지만, 만년한철로 만든 조(爪)까지 장착한 적설의 발톱만은 막아 내지 못했다.
이번 공격은 태붕에게 상당히 치명적이었는지, 버티던 그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심지어 날갯짓까지 약해지며 서서히 고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캬악!”
드디어 적설의 부리가 목에 박히고 말았다.
아무리 전설적인 태붕이었지만, 목에 구멍이 뚫리자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카카카칵!”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 빙빙 돌면서 떨어지는 태붕을 보며 커다랗게 소리를 내지른 적설은 승리를 만끽하듯 공중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 * *
“놈들이 올라오고 있다……. 준비해라.”
성후는 계단 밑을 보더니 긴장된 목소리로 명했다.
살혼단은 그녀의 직속으로,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그 말은 살혼단이 전멸했다는 말이야…….’
전멸할 때까지 조용했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강자라는 의미였다. 더욱이 청운루에 나타난 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금방 합류할 것으로 생각했던 무후는 여전히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보타검각을 맡은 이후 이렇게 불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 멀리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무엇인가 보였다.
명혼파파도 보았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후님, 저거 혹시 태붕 아닙니까?”
명혼파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상당히 먼 거리이긴 했지만 분명 태붕이었다.
온 깃털이 벌겋게 물들어 떨어지고 있는 태붕.
순간 모두의 얼굴이 공포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보타검각의 성물인 태붕이 죽는 날이 보타검각이 사라지는 날이라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전설은 전대의 조사들이 보타검각은 절대 멸문하지 않는다고 제자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만든 말이었다.
태붕이 절대 죽지 않는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태붕이 지금 피투성이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힘없이 빙빙 돌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아하건대 이미 죽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태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적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야…….”
성후는 믿기지 않는 듯 망연자실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태붕이 땅에서 다쳤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름을 뚫고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하늘에서 싸웠다는 의미였다.
천하에 태붕을 하늘에서 죽일 수 있는 동물이 있기나 하단 말인가…….
혹시나 하는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태붕은 바다로 떨어지더니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명 총관.”
“예, 성후님.”
“지금 상황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총궁으로 전서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명유경은 침통한 표정으로 답하고는 검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옥 대장.”
“예!”
“넌 당장 수하들 열 명을 데리고 기밀고로 달려가 발화 준비를 하고 있어라. 그리고 내가 신호를 보내면 즉시 불을 붙인다.”
“성후님, 그렇게까지…….”
“명령이다!”
비장한 성후의 말에 옥소정은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몸을 물리더니 곧 수하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성후님, 저희가 최대한 막아 낼 것이니 성후님께서는 우선 몸을 피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명혼파파 역시 상황의 심각함을 감지한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타검각에는 비밀 통로 같은 것은 없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저놈들을 다 죽이는 것뿐이다. 모두 듣거라. 오늘 본 각은 대단한 위기 상황이다. 죽기로 싸우는 자는 살 것이요,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저희는 목숨을 걸고 검각을 지킬 것입니다!”
“놈들이 나타나는 순간 대화는 없다. 즉시 공격에 들어간다.”
“예!”
“명혼파파.”
“예, 성후님!”
“천검방호진을 펼쳐라.”
* * *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종리화는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만 보고 있는 담수련이 안쓰러운지 옆에 다가와 앉았다.
“아무 생각 안 해.”
“제가 보기에는 악 방주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종리화를 보며 말했다.
“사실 소군은 생각한다고 하기도 어려워.”
“왜요?”
“그냥 내 머릿속에 계속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너무 소군에게 집착해서 소군이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겁나.”
“제가 보기에 그건 집착이 아닙니다.”
“그럼 뭐야?”
종리화는 자신을 보는 담수련의 큰 눈을 주시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리화는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지금 담수련이 겪는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담수련은 종리화가 답은 하지 않고 쳐다만 보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선을 창밖으로 다시 돌렸다.
어떤 답을 원했을까…….
그녀는 종리화에게 어떤 답을 듣건 해결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가슴이 더 답답했다.
“누구냐!”
그때 밖에서 연화의 외침이 들려왔다.
“너희는 아가씨를 밀착 호위하여라.”
얼굴이 굳어진 종리화는 추국과 흑란을 보며 명을 내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수십 명의 잠봉단과 그녀들을 이끄는 연화와 매향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누군가의 앞을 막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종리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타난 사람은 담무룡이었다.
연화나 매향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예전 같으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인데, 지금 이들은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보고 있는 종리화의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을 정도이니, 담무룡의 심정은 어떨지 짐작이 갔다.
“감히 가주님의 앞을 막다니, 너희들 정신이 있는 거냐?”
하지만 사화는 예전의 사화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종리화에게도 강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방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누구도 아가씨의 방에 출입을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연화야! 가주님이시다. 너희를 키워 주신 분이야. 이런 행동은 배은망덕이나 마찬가지다.”
“단주님, 저희는 가주님이 아니라 아가씨를 위해 키워졌습니다. 방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아가씨의 명이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단주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지금 그걸…….”
“종리단주. 됐다.”
담무룡은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종리화의 말을 끊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내가 도착한 날부터 뭔가 이상하다 느꼈는데, 이제 보니 악불군과 내 딸아이가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믿고 못 믿고는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만, 가주님께 그런 잣대를 대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럼 네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느냐? 내가 보니까 잠룡세가의 모든 주도권은 이미 악불군에게 다 넘어간 것 같은데?”
“악 방주는 주도권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악불군이 너 같은 여자라면 네 말을 믿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악불군 역시 야망이 있는 남자다. 권력을 앞에 두고 가만두고 본다는 것은 믿기 어렵구나.”
그때 방문이 열리며 담수련이 나타났다.
“죄송해요. 들어오세요.”
담수련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연화와 매향은 이끄는 잠봉단과 함께 좍 갈라지며 담무룡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잘 컸구나. 너희들은 너희들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니 혼을 내거나 하지는 않겠다. 너희도 내가 배신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것은 잘 알 게다. 절대 수련이는 배신하지 말거라.”
담무룡은 매향과 연화에게 칭찬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전하고는 담수련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추국과 흑란까지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방주님께서 우리 중 둘은 무조건 아가씨를 밀착 경호하라고 그렇게 당부하고 가셨는데, 너희들까지 나오면 어떡해?”
연화가 화들짝 놀라 묻자 추국과 흑란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가씨께서 나가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버텨?”
연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품에서 작은 폭죽을 꺼냈다.
“어떡하려고?”
“이거를 날리면 장로님들께서 이곳으로 모일 거라고 하셨잖아?”
“방주님께서 그것은 진짜 어쩔 수 없을 때만 사용하라고 하신 거 기억 안 나? 더욱이 아직 아무 일도 나지 않았고 단주님께서도 안에 같이 계신데 그것을 날리기는 좀 이른 것 같아.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날리자.”
어차피 대부분의 최고 고수들이 보타검각으로 갔기 때문에 담무룡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천호방에 없었다.
거기다 싸움이 일어난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담무룡이 안에 있다는 것을 정파에서 알게 된다면 그건 정말 큰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추국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을 보더니 모두에게 말했다.
“어차피 가주님께서 마음을 먹으면 우리는 모두 이십 초 안에 죽는다. 우선 주천오행진세(週天五行陣勢)를 펼쳐 최대한 방비하자.”
추국의 말에 다른 사화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년 전까지 그들의 주인이었고, 그들이 모시는 아가씨의 아버지이시기도 한 담무룡이 왜 이렇게 그녀들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그녀들은 알 수가 없었다.
* * *
“이, 이놈이!”
악불군 일행이 계단에 모습이 드러나자 보타검각의 제자들은 동시에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공격하는 자들을 간단하게 제거하며 악불군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제거되지 않은 자들은 뒤를 따르는 무림사기를 비롯한 천호방도들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네놈이 악불군이냐?”
대화 없이 공격하라고 한 성후였지만 막상 악불군이 앞에 나타나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천호방주 악불군입니다.”
“정파를 표방한다는 자가 정파의 성지인 보타검각을 공격하다니 강호의 도의가 권력욕에 다 무너져 내렸구나!”
“권력욕이 아니라 천하의 안정을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그러게 가만히 검각만 지키시지, 뭐 하러 측천무후궁이라는 요녀들과 친분을 유지하신 겁니까.”
“그럼, 오늘 기습한 이유가 측천무후궁 때문이라는 것이냐?”
“그 이유 아니면 제가 무슨 배짱으로 보타검각을 치겠습니다.
“한 가지만 묻자. 태붕은 어떻게 유혹한 것이냐?”
그녀에게는 태붕의 죽음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짐짓 모른 척하며 반문했다.
“태붕이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