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14화 (414/472)

<천검지애 414화>

414화. 영웅(2)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당금 천하에서 백 공자님까지 믿지 못한다면 세상이 너무 삭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악불군의 말대로, 잘못하면 오히려 반격받을 수 있는 이런 큰 작전을 행하기에는 좀 이상한 이유이기는 했다. 그러나 백천학은 그 말에 이상하게 감동을 받았다.

그 말에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백천학은 다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악 방주를 실망시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다음 대 무림을 이끌어 갈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동시에 떠올랐다.

* * *

제갈우명은 날아드는 급보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문 총책.”

“예, 군사님!”

“구천마성이 예속산에 들어가 하루 밤낮을 있다가 나왔다는 곳은 조사해 보았나?”

“죄송합니다. 아직 구천마성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예속산은 우리의 정보망에 전혀 들어있지 않던 곳인데…….”

“원나라 때도 예속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제갈우명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로군.”

“혈교입니까?”

“구천마성이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인 적이 그동안 없었다. 화룡세가를 칠 때도 이렇게 많이 움직이지는 않았어.”

“그렇다면 구천마성에서 이미 혈교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같은 마도인데 모르고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나? 아마 물밑으로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을 걸세.”

“그럼 그렇게 많은 인원이 이동한 이유가 뭘까요?”

“우리 눈에 띄게 움직인 걸 보면 당연히 공격이었겠지. 천호방의 활약이, 구천마성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봐야겠지.”

“그럼 새외연합의 갑작스러운 침공은 의미가 뭘까요? 분명 군사전에서는 새외연합의 침공이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새외연합은 태양천의 지배를 받던 조직들이 모인 것이다. 그들은 중원 무림과는 달리 태양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세력이 더 커졌다.”

“하지만 결국 태양천을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배신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침공이 더욱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우리와 척지는 건 그들의 이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될 텐데요?”

“처음 새외연합은 사천의 서쪽에서 자신들이 활동하게 해 준다면 태양천과 태룡세가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며 당가와 청성파 그리고 아미파에게 따로 접근했다. 물론 거절당했지. 그럼 그들이 중원에 거점을 만들려는 야망을 포기했을까?”

“설마……?”

“지금 혈해마계는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새외연합으로서는 상대하기 껄끄럽지. 그럼에도 그들이 사천이 아니라 감숙으로 침공한 걸 보면, 누군가 도움을 주기로 했음이 분명하다.”

“새외연합과 혈교가 연계하기로 했을까요?”

“혈교가 아니다. 태양천이다.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갈우명의 말에 우문상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도 태양천이 이대로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사방이 난리군요. 공자님도 순찰단의 최고 고수들만 데리고 외유를 떠나면서 행선지를 밝히지 않아서 맹주단에서도 지금 난리던데……. 이거, 사방에서 이렇게 큰일이 펑펑 터지면 부역자 제거가 될까요?”

우문상일의 말에 제갈우명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 또 나라를 배신하는 자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앞서 나라를 배신한 자들을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제갈우명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무성궁의 모든 부역자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는 방식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배신하고 이익을 취한 자들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한 자들은 제거해야 하지만, 그들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따른 자들까지 제거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부역자 제거에는 시기가 있었다. 만약 제거가 차일피일 미뤄질 경우 민심은 달라질 것이었다. 싸움보다는 화합하자는 여론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민심의 변화는 부역자 제거의 동력까지 덩달아 떨어지게 할 것이 분명했다.

“사천에서 보낸 온 소식은 없느냐?”

“당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감숙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아직 특별한 변화는 없다는 보고였습니다. 다만 공동파에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공동파로서는 애가 타긴 하겠지…….”

감숙과 섬서의 경계인 공동산에 위치한 공동파는 혈해마계가 중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정파의 보루였다. 그래서 혈해마계에게 공동파의 영역을 침범할 경우 무림맹에서 나설 것이라고 경고를 보내며 간신히 균형을 맞춰 왔다.

그런데 사해연합의 침공으로 인해 간신히 맞춰 오던 균형이 깨질 경우, 공동파가 그 파편을 맞을 수도 있었다.

“군사님, 얼마 전 혈해마계의 나백귀왕이 천호방의 악 방주를 직접 찾아와 만났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한번 알아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악 방주는 무림맹의 구성원이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알아본다는 말인가?”

“공자님과 악 방주께서 비밀리에 만난 것 같던데, 공자님을 통하시면…….”

“쉿! 그 문제는 무조건 모른 척하라고 했잖은가!”

“죄송합니다.”

우문상일을 질책하기는 했지만, 제갈우명 역시 실타래와 같은 현 정국을 풀어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악불군이 생포한 운우각주 등을 무림맹으로 이송하는 것을 가짜 명령서를 통해 방해한 자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을 추포하기는커녕 조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사라는 지위로도 증거 없이는 건드리기 어려운 고위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덕분에 측천무후궁의 간세들이 정파에 얼마나 뿌리 깊게 많이 박혀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지금 무림맹 아니, 정파 전체가 안팎으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영웅대회는 제갈우명의 운신의 폭을 심대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지금 감숙이나 남무림에서 급변이 발생할 경우 파견할 무력대는 충분한가?”

“두 곳만 보낸다면 충분하지는 않아도 불가능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또 다른 곳에서 일이 안 터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군사님께서도 보셔서 알겠지만 불안한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상황이 어렵고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좋게 생각하면 단번에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맹주님께 다녀올 것이니, 총책은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즉시 내게 가져오게.”

“저, 그런데…….”

우문상일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닫자 제갈우명은 검미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뭔데 그러나?”

“……지금 맹 내에서 맹주님과 군사님 사이에 불화설이 돌고 있습니다.”

“불화설은 무슨? 그래서 문제라도 있나?”

“몇몇 부서에서 협조를 안 해 주고 있습니다.”

제갈우명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사파는 배신으로 망하고 마도는 욕심으로 망하며 정파는 질투로 망한다는 무림인들의 속담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오늘 밤에 협조를 안 하는 부서의 수장을 군사전으로 부르게.”

“어쩌려고요?”

“부서의 책임자가 군사전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수장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정리가 필요하면 정리해야지.”

제갈우명은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 드디어 닥쳤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천제무황의 권위 덕에 큰 잡음 없이 운영되어 오던 무림맹에도, 결국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가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휴우~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랄 일이 아닙니까?”

보타검각의 기밀고에서 발견한 수많은 기밀 서류를 발견한 악불군과 백천학은, 서류를 살펴본 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 공자님, 우선은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판단하에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발표했다가는, 천하는 또 혼란에 빠질 겁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한 악불군은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저를 믿으신다고 하셨지요?”

“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악불군은 잠시 백천학을 보았다. 상당히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 듯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기밀 서류들을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이걸 전부 다 말입니까?”

“보타검각이 측천무후궁의 하부 조직이었다는 증거들은 공자님께서 가져가십시오. 어차피 무림맹과 정파에게 보타검각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 드려야 할 테니까요. 제가 가져가겠다는 것은 측천무후궁의 조직도와 정파에 심은 간세들에 관한 서류들입니다.”

“……설마 공표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까?”

“방금 공자님께서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이것을 공표하면 무림맹은 물론 정파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다고요?”

“그래도 이 일은 매우 중차대한 정보입니다. 우리 둘만의 의견으로 숨긴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욱이 숨겼다가 저번처럼 각 파의 중요 인물들이 암살을 당하는 상황이 오면 어찌 책임지시려고요?”

“측천무후궁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충성했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측천무후궁의 실체를 알고 나서 그들을 배신하고 제게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들 중에도 그런 자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분명 자신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전 그들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습니다.”

“그런 자를 무슨 잣대로 알아낸다는 말입니까?”

“이런 분석을 아주 잘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분명 선별해 내실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측천무후궁을 제거하는 데 전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렇다 하여도 사문을 배신한 자들입니다.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측천무후궁을 제거한 후 그들을 제가 모두 직접 찾아가 만나 볼 생각입니다. 그중 진짜 모르고 한 자들에 한 해 숨겨 주고 싶습니다. 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알고 있거나,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은 당연히 그 문파에 알려 문파에서 처리하도록 해야겠지요.”

악불군의 말에 백천학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악불군이 나쁜 마음을 먹고, 간세로 적혀 있는 자들을 협박해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림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들이 발견한 기밀 문서에는 엄청난 사실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대로 공표한다면, 너무 많은 간세에 무림은 혼란을 넘어 또다시 극도의 불신으로 백 년 전 상황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악 방주께서 이곳에 저와 둘이만 들어가겠다고 한 이유가 이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까?”

“심각할 것이라고는 짐작했습니다. 하나,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만약 제가 필요하다고 할 경우 언제라도 무림맹으로 가져오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분석을 끝내는 대로 정보도 공유하겠습니다.”

백천학은 자신의 결정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악불군을 한 번 믿어 보자는 데 패를 걸기로 했다. 자신보다 악불군의 판단을 믿기로 한 것이었다.

“그 분석을 잘한다는 분이 천상신녀 그분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묻는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악 방주께 사적인 물음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천상신녀와 악 방주께서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

악불군이 너무 뜻밖의 질문에 멍한 표정으로 답을 하지 않자 백천학이 다시 말했다.

“답하기가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천상신녀와 저는…….”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으며 답을 이어 가던 악불군은 결국 말을 맺지 못했다. 자신이 그녀의 호위 무사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때와 달라진 것이다.

절대 자신의 명성이 높아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녀의 호위 무사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명예에 누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 말하지 않으셔도 두 분이 어떤 관계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럼 결정을 했으니 이만 나가시지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뭘 알았다는 거지?’

악불군은 의아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생각 못한 큰 고민이 새로이 나타났다.

담수련과 자신이 무슨 관계인지를 생각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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