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15화>
415화. 격변(1)
혈해사황을 비롯한 혈해사계의 간부들은 종이 한 장을 가운데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주군, 태양천주가 이런 서찰을 보낸 것은 전대 천주가 예전에 벌였던 음모의 연장선상입니다. 똑같은 음모에 또다시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혈해사황의 말에 수하들은 감히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사인 뇌혼광뇌는 달랐다. 그는 절대 반대한다는 듯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예전에는 음모인 것을 몰라서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이미 수십 년 전 일이다. 본 좌는 그 당시보다 두 배 이상 강해졌고, 지금 내게 도전한 대공은 전대 천주의 제자일 뿐이다.”
“주군, 싸움에 이겼을 경우와 졌을 경우의 손익을 따져 보십시오. 주군께서 이긴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태양천주를 이겼다는 명예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패하시거나 심지어 무승부가 된다 해도 혈해사계의 위상은 땅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만약 피한다는 느낌을 줄 경우, 무황인 내 체면은 어떻게 되겠느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말해 봐라.”
“제가 주군의 허락을 받아 나백귀왕을 천호무적검에게 보내 그의 의중을 떠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분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지 않느냐?”
“당시 그의 대답이 모호했기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그는 태양천 소천주와 함께 수백 명의 태양전사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주적을 태양천과 혈교 그리고 측천무후궁으로 상정한 것은 확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태양천주가 주군과 만나기로 한 곳을 은밀히 알려 주는 것입니다.”
“나 대신 천호무적검을 보내자는 말이냐?”
“그는 어차피 정파입니다. 지금 하는 전쟁이 끝나면 그의 검 끝은 결국 본 계에게 향할 것입니다. 전 새외연합이 갑자기 옥문관을 시끄럽게 하는 이유와 주군을 불러들인 것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와의 결투를 청했는데 천호무적검을 보낸다면 그것 역시 조롱을 받을 수 있다.”
“천호무적검에게 굳이 그 사실을 알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태양천주가 어느 날 어디에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만 흘리면 그만입니다.”
“태양천주가 그때 나타날까?”
“전대 태양천주도 결투장을 보낸 후에 약속대로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주군께서 가겠다고 답장을 보내면 분명 나타날 것입니다.”
혈해사황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손으로 적을 제거한다라……. 좋다. 한번 해 봐라.”
“예!”
악불군에게는 서로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의논해 보자며 초청까지 했던 그들이었지만, 사파답게 그 와중에도 뒤통수를 칠 생각을 먼저하고 있었다.
* * *
“악불군은 어디 갔느냐?”
담수련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특별한 진척이 없자, 담무룡은 악불군에게 대해 물었다.
“소군은 방에 일이 있어, 잠시 외유를 나갔어요. 곧 돌아올 것입니다.”
“솔직히 악불군이 저렇게까지 일취월장 강해질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아버지, 전 아버지를 어려서부터 존경했고 지금도 사랑해요. 다른 분들에게는 어떻게 대하셨건 제게만은 언제나 자상하신 아버지셨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대충은 짐작이 갑니다. 하나, 세상 모든 일에는 순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지나 버렸고, 이제 다시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세요.”
“내 시대가 지났다고 하기에는 난 아직 너무 젊다. 천제무황의 나이는 나보다 반갑자는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하거라.”
“시대란 나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간 아버지께서 중원 무림을 탄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어요. 이제 아버지께서 다시 나선다면 아마 천하 모든 사람들의 공적(公敵)이 되실 겁니다.”
“예전에도 천하는 내게 적이었다. 이 아비는 수십 년을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매진해 왔다. 결국 꺾이고 말았지만 지금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겼다고 난 믿는다. 넌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다. 악불군을 설득해 다오. 아니, 최소한 네가 방해만 하지 않으면 악불군은 내 말을 따를 것이다.”
“……죄, 죄송해요. 아버지.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그것만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 얼마간 태산종가에 가 계세요.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더 이상 아버지를 추적하는 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다시 기회를 만들어 봐요.”
“이 아비는 평생을 승부사로 살아왔다. 그리고 기회가 생기면 놓친 적이 없지.”
“아버…….”
말을 하던 담수련은 갑자기 앞으로 푹 쓰러지고 말았다.
“가주님!”
옆에 있던 종리화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그녀 역시 순식간에 마혈을 짚이고 말았다. 초절정 고수인 그녀였지만 너무 방심했고 담무룡을 그만큼 믿었기 때문에 어이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종리화, 미안하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악불군이 오면, 수련이는 내가 잠시 데리고 있을 것이니 연락을 기다리라고 해라. 그리고 수련이는 무사할 것이니 걱정 말고.”
말을 마친 담무룡은 담수련을 안고는 훌쩍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도 생각 못 했던 것이 있었다.
태붕을 제거한 적설은 싸움이 끝나자 그대로 천호방 총단으로 날아갔다. 배를 타고 반나절 이상 움직여야 갈 수 있는 주산군도였지만 적설에게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이미 반 시진 전에 도착한 적설은 담수련을 주시하고 있었다.
담무룡이 신묘한 수법으로 천호방의 경계까지 가볍게 뚫고 나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적설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 * *
“백 공자님 덕에 오늘 전쟁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항주 포구로 돌아온 악불군은 배에서 내리자 백천학에게 포권을 하며 치하했다. 그러자 백천학 역시 포권을 하며 받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측천무후궁은 저희 공통의 적이 아니겠습니까? 저야말로 악 방주님께서 악적들을 제거하는 데 솔선수범하시니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무림맹은 제가 잘 설득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 안목을 크게 넓혀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감히 공자님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천호방도들이 부상자와 시신들을 바삐 옮기는 장면을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무당의 송죽진인은, 악불군과 백천학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걸아 도우, 악 방주와 백 도우께서 상당히 친해진 것 같지 않으시오?”
다음 대 절대자의 자리를 약속한 듯한 둘의 훈훈한 모습은 이곳에 모인 정파인들에게는 상당히 다행스러운 모습이었다.
소걸아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불안한 듯 말을 받았다.
“저 둘이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무림이 평온할지 혼란할지가 결정된다는 것이 좀 두렵긴 합니다.”
정파의 구심점이자 실질적으로 가장 강한 전력을 지닌 천무성궁의 다음 대 궁주이자 무림맹의 총순찰인 백천학과, 이미 무림십왕의 지위를 받고 세상이 놀랄 무위를 선보이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있는 악불군. 누가 뭐래도 현 무림의 젊은 무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자들임에 분명했다.
하나, 그 둘이 만약 경쟁 관계로 빠지게 될 경우 정파는 둘로 갈라지게 될 것이었다.
정파끼리 반목하면 마도와 전쟁하는 것을 방불할 정도로 치열해진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검의 성지로 떠받들며 정파의 존경을 받던 보타검각이 측천무후궁의 일원이었다니……. 내일 천하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경악할 것인데, 그게 참 걱정이외다.”
검의 종가로서 이름이 높은 남궁세가의 남궁영표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 제자들이 우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걱정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우선 빨리 돌아갑시다. 악 방주 말이, 오늘 보타검각이 멸문한 사실을 측천무후궁에서 알게 된다면 정파에 대한 공격이 더욱 거칠어질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각 문파에 보고도 빨리 하고 경계 태세를 높이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이오.”
수경 대사의 말에 모두는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악불군과 백천학을 한 번 보고는 그들의 처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에게는 실로 긴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혈마전과 보타검각의 혈투로 인하여 비록 사랑하는 사형, 사제를 잃고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무림의 흉적들을 제거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들의 무공도 한층 발전한 것만 확실했다.
무림인들의 무공은 생사투를 통해 가장 빨리 발전하기 때문이었다.
* * *
동정어옹에게 비밀 서류를 은밀하게 천호방 총단으로 옮기게 한 악불군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담수련에게 달려갔다.
분명 천호방 총단으로 보낸 적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것은 그가 무림에 나온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 악불군은 수백 명의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보다 담수련이 사라진 것이 가장 두려운 상황이었다.
“단주님 정도 되시는 분이, 밖에 있는 사화가 눈치도 못 챌 정도로 당하셨다는 것입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종리화는 불만이 생겼다. 그의 말투에서 의심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황상 그녀라도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악 방주께는 정말 면목이 없네. 솔직히 가주님께서 아가씨에게 손을 쓸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 했네.”
종리화의 말에 악불군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담무룡이 담수련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녀를 두고 외유를 나갔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짐작이 가십니까?”
“가주님께서는 친구도 없으셨는데 어디로 가신 것인지 이해가 안 가네.”
“사화 너희들은 가주님께서 빠져나가시는 것을 전혀 눈치를 못 챘느냐?”
나 죽었소 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던 사화는 악불군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닫고 있었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휘익!”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악불군은 밖으로 나오더니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그러자 백설이 담을 넘어 뛰어 들어왔다.
악불군의 백설의 목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백설아, 적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있겠느냐?]
악불군의 마음이 통했을까 백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눈을 번쩍 뜬 악불군은 흑석영을 불렀다.
“흑석영!”
“예! 방주님.”
“내가 잠시 나갔다 오겠다. 좀 늦을 수도 있으니 고 수석 장로님과 추 태상호법님께 상황을 전하라. 내가 없는 동안 습격이 있을 수도 있으니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해라.”
“존명!”
말을 마친 악불군은 백설의 등에 올라타더니 다시 담장을 넘어 빠르게 사라졌다.
백설의 움직임은 마치 하늘을 난다는 천마(天馬)같았다.
* * *
“그 아이가 악불군이 신줏단지 모시듯 아낀다는 담수련인가?”
측천무후궁의 원로 중 한 명인 자면신모는 담무룡이 안고 온 담수련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맞소.”
“그럼 우리에게 넘겨라.”
옆에 있던 극진파파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하자 담무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넘길 수는 없소. 명령대로 데려왔지만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있겠소.”
“담무룡! 지금 내 말이 무슨 부탁인 줄 아느냐? 그 아이를 넘기라는 것은 명령이다.”
“나와 약조한 사람은 궁주님뿐이오. 당신들의 명까지 받을 의무는 없소.”
“이, 이놈이!”
극진파파가 대노한 듯 손을 들자 담무룡의 주위로 이십여 명의 여인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이 끌고 온 수하들이었는데 무공이 하나같이 종리화를 능가할 정도로 강한 여인들이었다.
“약조를 했기에 궁주님의 명을 따르기는 하지만, 협박 따위로는 나를 움직이지 못하오.”
담무룡이 차갑게 소리치며 진기를 올리자 자면신모가 급히 끼어들었다.
“됐다. 어차피 우리의 임무는 담수련을 측천무후궁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럼 담무룡 네가 담수련을 안고 간다.”
말을 마친 자면신모는 나타난 여인 중 한 명을 보며 물었다.
“밀령각주.”
“예, 신모님.”
“추적은?”
“추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악불군이 바람처럼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