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18화>
418화. 귀환(2)
“소……군.”
악불군의 품에서 정신을 차린 담수련은, 눈을 뜨자마자 보인 악불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불렀다.
“예, 아가씨. 제가 늦어서 아가씨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가셨습니다. 무서우셨지요?”
“소군이 당연히 올 줄 알았는데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해치기야 하시겠어?”
“가주님께서 측천무후궁과 연계하셨던 모양입니다.”
“나를 측천무후궁에 넘기려고 했던 걸까?”
“설마 가주님께서 그러시겠습니까? 아마 다른 복안이 있으셨을 겁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소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잠시 멈칫했던 악불군은 곧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포근히 안았다.
“전 아가씨께서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난 소군만 옆에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힘들지 않아.”
둘의 사랑이 점점 깊어 가는 모습을 적설만이 보고 있었다.
* * *
보타검각의 멸문은 천하를 또 한 번 흔들었다. 더욱 천하를 경악하게 한 것은, 보타검각이 신비 조직으로 불리던 측천무후궁의 산하 조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악불군이 있다는 것에 천하는 더욱 열광했다.
이미 그는 천하인들의 우상이 되고 있었다.
“방주님 오시고 계십니다!”
총관 구여풍의 보고에 간부들은 모두 후다닥 뛰어나갔다.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방주 호법들과 외당당주인 마진우는 수하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간 후였다.
수많은 군중들이 따르고 있는 가운데 백설을 타고 나타난 악불군과 담수련을 본 간부들은 급히 앞으로 가 허리를 숙였다.
“이런 과한 예는 하지 마시라니까요.”
악불군은 말에서 내리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미 과한 예가 아니라 당연히 할 예로 변했습니다.”
고철황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방주님의 명성이 너무 높아져서, 저희들이 이러지 않으면 오히려 욕을 먹을 상황이란 의미입니다.”
“악 방주, 더 이상 예를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라. 황제가 되면 거기에 걸맞은 예를 받게 되는 법이다. 만약 안 그러면 반역으로 몰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때 소걸아가 나서며 말했다.
정파 연합의 지휘자들은 계속 총단에 있었는지 그들 역시 천호방 간부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우선 들어가시지요.”
악불군이 총단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뒤를 따르던 무리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흩어졌다.
그중에는 오로지 악불군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온 무림인들도 상당수 보였다.
담수련이 악불군과 함께 안채로 들어서자 종리화와 사화가 후다닥 달려나와 맞았다.
왔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기 어려웠던 그녀는 나올 수가 없었다.
“아가씨,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지요?”
종리화는 담수련의 손을 잡으며 급히 물었다.
“전 괜찮아요. 유모랑 사화가 많이 걱정하셨겠네요?”
“제가 너무 방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실 줄을 어찌 아셨겠어요? 유모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가주님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그 와중에도 종리화는 담무룡이 걱정된 듯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소군에게 넘기고 어디론가 가셨답니다.”
“지금 가실 데가 없으실 텐데, 어디로 가셨다는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아직은 저도 모르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담수련은 담무룡이 절대 포기할 성격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전 잠시 나가 보겠습니다.”
악불군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종리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악 방주가 아가씨께서 가주님께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사색이 되더군요. 지금까지 악 방주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종리화의 말에 담수련은 악불군이 나간 방향을 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갔는데 벌써 보고 싶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수련아, 정신 차려라.’
* * *
“동방 장로님, 서류들은 군사님 집무실로 다 옮기셨습니까?”
“예, 그리고 주위에 천호사기단과 천호특별단으로 하여금 철통같이 지키게 했습니다.”
동정어옹의 답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측천무후궁에서 기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고 장로님께 말해서 총단의 경계를 강화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도들 피해가 만만치 않지요?”
“삼십이 명이 죽고 이십 명이 넘는 방도들이 부상을 입어 치료 중입니다.”
악불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돈으로 보상이 되지는 않겠지만, 죽은 방도들에게 가족이 있으면 충분히 보상해 주십시오. 그리고 부상자들은 약재를 아끼지 마시고 완벽하게 치료해 주시고요.”
무림 문파에서 수하들이 죽거나 다치는 경우는 거의 일상이라고 할 정도로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악불군 같이 수장들이 신경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정파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악불군처럼, 죽었다 하여 보상해 주고 물심양면으로 치료해 주는 것은 비용이 너무 들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의 말에 동정어옹은 감격한 듯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그럼 저는 정파 연합 분들을 뵙고 오겠습니다.”
* * *
보타검각의 멸문은 측천무후궁의 모든 조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더 경악할 보고가 들어왔다.
“천후님, 악불군이 담수련과 함께 천호방에 돌아왔다는 보고입니다.”
도화각주의 보고에 천후의 얼굴이 확 변했다. 측천무후궁의 최고 간부인 그녀는 담무룡이 담수련을 납치해 자면신모와 함께 총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담수련이 악불군과 천호방에 돌아오다니?
“자면신모를 비롯한 원로들과 호위하던 밀령각은 어떻게 됐느냐?”
“그, 그게…….”
“빨리 말해라!”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담무룡까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천후는 주먹이 쥐더니 앞에 놓인 책상을 그대로 내려쳤다.
쾅!
큰 소리와 함께 책상이 그대로 가루로 변하자 도화각주는 머리를 급히 조아렸다.
“도화각주!”
“예!”
“악불군이 잠룡세가의 호위 무사 출신이며 현재도 담무룡의 딸을 은밀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무림맹과 각 문파에 포진한 본 궁의 간세들에게 악불군이 부역 세력의 중심 인물이니 배척해야 한다는 여론을 만들라고 해라.”
“궁주님께서 악불군에 대한 공격을 얼마간 자제하라고 하셨는데, 괜찮겠습니까?”
“궁주님께는 내가 직접 보고하겠다. 더 이상 이놈의 광란을 그대로 두고 보다가는 대계를 망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당장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천호방의 총단이 보이는 주루의 창가.
검은 머리를 묶고 얼굴에 면사를 두른 한 여인이 뭔가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앞에 음식들이 놓여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금후님, 소문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때, 그녀의 귀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정녕 보타검각이 멸문했다는 것이냐?]
[저희가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 답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언제나 보이던 대붕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는 보타검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공조차 포기한 보타검각을 어떻게……. 내가 악불군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던가?’
그녀는 금잔화였다.
그녀를 상징하는 금발은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고 벽옥색의 눈동자도 검게 바꾼 그녀는 악불군을 회유하기 위해 며칠째 항주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유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담수련과 비교할 만한 아름다운 외모에 섭혼금령제혼술이라는 전설의 미혼술까지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악불군과 일대일로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악불군이 한 시진 전에 담수련과 함께 총단으로 들어갔다던데, 확실한 정보냐?]
[항주의 백성 수백 명이 보았으니 확실할 것입니다.]
‘보타검각을 공격하고 돌아오자마자 둘이 어디를 갔다 왔을까? 아무래도 담수련, 이 계집을 먼저 제거해야 해…….’
태어나서 다른 여자를 부러워하고 질투가 솟구친 것은 그녀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을 잡으러 온 무사 수십 명을 눈짓 한 번으로 홀려 버리는 그녀가 악불군만은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는 잠룡세가에서 그를 만난 경험 때문이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과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눈동자는 그가 얼마나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하지만 보타검각까지 그에게 당한 지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결정을 한 듯 다시 전음을 보냈다.
[은령각주.]
[예, 금후님.]
[난 이곳 객잔에서 계속 머물고 있겠다. 너는 계속 천호방을 감시하고, 만약 악불군이 총단에서 나오면 내게 즉시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은령각주가 사라지자 금잔화는 뭔가 안 풀리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녀의 눈에 무엇인가가 띄었다.
‘요거 봐라……. 잘하면 방법이 있겠는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녀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 * *
[광괴도, 아이들은 몇 명이나 들어왔느냐?]
주루의 이 층 창가에 앉아 식사하던 장사꾼 행색의 노인은 중년 무인이 올라오자 시선을 돌린 채 전음을 보냈다.
[현재 이백 명쯤 들어왔습니다. 폭풍신마 님과 구혼사마가 들어오면 총 삼백 명 모두 들어오게 됩니다.]
[천호방에서 눈치채지 못했겠지?]
사실 다른 문파의 세력권에 몇백 명이나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지금 항주의 사정은 거의 무림맹 총단 수준으로 많은 무림인들이 모여들고 있어서 가능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악불군이 천호방 총단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위풍이 대단하더구나?]
[지금 절강에서는 거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그런 위상을 차지하다니, 솔직히 대단한 놈인 것은 인정해야겠군.]
천마전 호법인 색혈도황은 천마종을 제외하면 천마전에서 제일가는 고수였다.
[그런데 좀 의아한 게 있습니다.]
[뭐냐?]
[천호방이 보타검각을 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쉬쉬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더욱이 상당히 많은 정파의 무사들이 천호방에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보타검각을 쳤다면 정파에서 난리를 쳐야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 우리 임무하고 상관은 없다. 그 문제는 나 군사가 알아보겠지. 폭풍신마와 구혼사마까지 들어오면 곧 공격에 들어갈 것이니 계속 천호방 주위를 살펴라. 조금이라도 특이한 일이 벌어지면 곧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광괴도가 사라지자 색혈도황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가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그의 시선은 거리를 오가는 여인들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보기 시작했다. 그는 명호가 말하듯이 색을 매우 밝히는 자였다. 지금 같은 중요한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음욕을 충족시킬 만한 여인들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음흉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는 뭔지 모를 끈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있는 주루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주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루의 창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색혈도황은 자신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훔쳤다.
얼굴에 면사를 두르고 있는 여인.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색혈도황은 피가 머리로 쏠리며 참을 수 없는 음욕을 느꼈다. 도황으로 불리지만 상당한 수준의 색공까지 익힌 그를 단번에 홀려버린 벽옥색의 눈동자의 여인.
그녀는 금잔화였다.
‘누, 누구지?’
색혈도황은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흥분감에 그녀를 주시했다.
허나, 그녀는 그를 무시하듯 고개를 돌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금잔화의 신비한 유혹을 놓칠 수 없었던 색혈도황은 그녀를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급히 주루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