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21화>
421화. 격전(1)
[방주님, 예상보다 침입한 자들의 전력이 대단합니다.]
내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악불군은 흑석영의 보고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객청에 머물고 있는 정파에 알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세요.]
그냥 구경만 시키기에는 적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판단한 악불군은 정파 연합도 싸움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담 군사님 말씀이, 총단에 펼쳐진 진은 미로진으로 그다지 강력한 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수들이라면 진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니, 재빨리 공격하고 빠져나가는 방식을 사용해야만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간부들에게 이미 주지시켰습니다.]
흑석영이 사라지자 악불군은 눈을 감고는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주위의 자연기가 그의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자연의 기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위의 기를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총단 전체의 상황을 감지할 수 있었다.
‘혈교에서 작정을 한 모양이군?’
감지한 기를 통해 침입자들이 혈교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주 탁한 마기를 풍기기 때문이었다. 다만 침입자의 수가 그의 예상을 넘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악불군을 긴장하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총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단히 강력한 기가 몰려 있단 사실이었다.
‘이 기는 분명 측천무후궁인데…… 설마 혈교와 합공을? 아니야, 둘은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라서 서로 협조할 수는 없어.’
악불군이 멀리서 감지한 기는 검후가 이끄는 측천무후궁의 수하들이었다.
혈교가 끌고 온 전력도 만만치는 않지만 이미 그들의 공격을 눈치채고 준비까지 한 상황에서 천호방이 패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나 두 세력이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갑자기 측천무후궁이 뒤를 공격한다면 피해는 예상보다 더 클 수가 있었다.
[사 호법!]
[예, 주군.]
[총단 밖에 또 다른 적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만약을 위해 예비 방어조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로님들께 빨리 전하세요.]
[존명!]
사효조는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직감한 듯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최 호법!]
[예, 주군.]
[총단의 뒷담을 넘는 자들이 있습니다. 내원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천호사기단과 천호 특별단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누구도 담 군사님의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반드시 이겨야 한다!’
모든 명령이 끝나자 악불군은 천륭검을 꺼내 잡았다. 정체를 감춘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의해 계속 열세였던 중원 무림의 반격이 시작되는냐, 아니면 계속 밀리느냐의 향방이 오늘의 전쟁에 달려 있음을 악불군은 잘 알고 있었다.
* * *
[검후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백리옥빙은 다급히 달려온 민옥련의 전음을 듣자 아미를 좁히며 반문했다.
[안에 있는 간세들과 연락이 안 된 것이냐?]
[방금 전, 천호방 총단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기습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간세들과 연락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항주에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있는데 천호방을 공격하다니 완전 미쳤거나, 엄청난 전력을 동원했겠구나?]
[최소한 수백 명은 동원이 된 것 같습니다. 분석한 바로는 혈교일 확률이 팔 할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본 궁이 아니라면 팔 할이 아니라 혈교 놈들이 분명하다.]
[그럼 어찌할까요?]
지금 백리옥빙에게 두 세력의 싸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패구상(兩敗俱傷)하기를 바랬다.
문제는 서류였다. 원래 계획은 서류를 숨긴 장소만 알아내면 최대한 싸움을 피하면서 은밀하게 서류를 빼내거나 파기시키려 했다.
악불군이 이긴다면 어찌할까…….
그는 중요한 서류를 더욱 안전한 곳으로 옮길 확률이 높았다.
만약 혈교가 이긴다면…….
서류는 혈교의 손에 넘어가거나 천호방을 도우러 온 세력에게 넘어가 세상에 알려질 것이 분명했다.
[우리도 들어간다.]
[지금 말입니까?]
[싸움이 끝난 후에는 들어가기 더 어렵다. 우리는 싸움에는 끼지 않는다.]
[사방이 전투인데 싸움에 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피하면 된다. 민 대주.]
[예.]
[들어가서 본 궁의 간세와 만날 수 있겠나?]
[지금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리옥빙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천호방의 총단은 잠룡세가의 본가였다. 그리고 보타검각에서는 잠룡세가의 구조에 대해 이미 완벽하게 조사해 놓고 있었다.
[악불군이 기밀 서류들을 문서고에 갖다 놓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분석하고 있다고 했단 말이지…….]
[간세가 보낸 정보에 의하면 천호방에는 특별히 군사전은 따로 없고 담 군사가 모든 정보를 총괄한다고 했습니다. 분석 중이라면, 담 군사가 갖고 있을 것입니다.]
[담 군사가 어디서 거처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예, 이미 총단 구조도를 받았습니다.]
[그럼 담 군사의 거처로 간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다.]
[예, 그럼 준비시키겠습니다.]
서류가 담수련의 집무실로 옮겨졌으니, 백리옥빙이 매우 정확한 판단을 내린 것은 맞았다.
하지만 담수련이 이미 총단의 구조를 다른 문파에서 알고 있을 가능성을 짐작하고 사방에 진을 설치했다는 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어찌 됐건, 천호방의 총단이 아주 복잡한 싸움터가 되어 가고 있음은 확실했다.
* * *
내원의 정문 앞에 검을 들고는 눈을 감은 채 서 있던 악불군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내원은 총단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총단 내 어디든 달려가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악불군은 상대하기 버거운 고수가 나타나면 그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 번째 신호가 그의 귀에 들린 것이다.
* * *
이백 명의 수하를 이끌고 담을 넘은 폭풍신마는 단숨에 모두를 괴멸시키고 천호방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담을 넘는 순간 그는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먼저 들어와 교두보를 만들기로 했던 광괴도가 이끄는 천마단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또 다른 담만이 길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천호방도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앞을 막은 담을 보자 크게 외쳤다.
“당황할 필요 없다. 너희는 무조건 보이는 놈들은 모조리 죽이면 된다. 담을 넘어라!”
그의 외침에 수하들이 담을 넘었고 그 뒤를 따라 담을 넘은 폭풍신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곧, 왜 앞서 들어간 천마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다시 넘은 담장 안에는 또 다른 담이 그들을 막고 있었다. 다른 점은 아까와 달리 담 사이사이에 열 개가 넘는 좁은 골목이 사이사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처럼 많은 골목길을 나눠서 진입했다면 백 명 정도는 간단히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이놈들이 여기에 진을 설치했구나?’
폭풍신마는 그제야 자신들이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는 수하 한 명을 불러 나가서 색혈도황에게 지금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색혈도황 역시 천호방 안으로 들어온 후였다.
* * *
폭풍신마보다 먼저 담을 넘은 광괴도의 형편은 더욱 나빴다.
같은 담을 넘었음에도 그가 닥친 상황은 신기하게 폭풍신마가 처한 상황과 많이 달랐다. 다른 담이 그들의 앞을 막은 것까지는 같았다.
하나, 그다음은 달랐다.
담을 넘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화살 공격이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는데 쏟아지는 화살 공격은 순식간에 광괴도가 이끄는 수하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집단전에서 흩어진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광괴도 역시 백전노장이었다.
“간단한 미로진이다. 당황하지 말고 내 뒤를 따라라!”
그는 속절없이 쓰러지는 수하들에게 소리를 치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미로진에서 뭔가 날아온다는 것은 그곳이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진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우선 화살이 날아간 방향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천호방에 설치된 진은 미로진의 일종으로 순간적으로 적을 당황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진 자체가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진은 아니었다.
적들을 살피던 육관우는 광괴도가 진을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명령을 내렸다.
[궁수들은 뒤로 빠지고 천호삼대는 방어진을 쳐라]
전음을 보낸 육관우는 호각을 입에 물고는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을 불었다.
악불군에게 고수의 출현을 보고한 것이었다.
‘뭐야?’
갑자기 시야가 훤해지더니 삼십 명이 넘는 무인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이자, 광괴도의 눈에는 노기가 떠올랐다.
자신들이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끌고 온 백 명의 수하들은 아직도 진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자신은 혼자였다.
‘나 군사께서 완전히 오판을 했어…….’
당혹스러워하는 그의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고수가 나타났다는 육관우의 신호를 받은 악불군이었다.
“혈교에는 군사가 없는 모양입니다?”
“넌 누구냐?”
“본 방을 노렸다가 전멸당한 것이 그리 오래전이 아닌데 또 공격을 하다니, 어이가 없군요.”
광괴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앞에 나타난 청년이 악불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천하의 천호무적검이 이런 싸움에 직접 나서다니, 천호방에는 인물도 없구나!”
“굳이 당신 같은 고수들을 방도들이 상대하게 해서 다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말을 마친 악불군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듯 그대로 몸을 날렸다.
광괴도는 급히 자신의 최고 절기인 광마혈기도 펼쳤다.
하지만 악불군의 무공은 이미 그의 실력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은 상황이었다.
“육 단주.”
“예, 방주님.”
“적들이 진에서 빠져나올 겁니다. 그들이 모이기 전에 먼저 제거하세요.”
“알겠습니다.”
공격을 하자마자 곧 몸을 돌려 육관우에게 지시하는 악불군을 보고서, 방어진을 펼치고 있던 천호삼대의 방도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악불군이 사라지고 광괴도가 피를 뿜어내며 엎어지는 모습을 보자 모두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악불군이 무공을 사용하는 장면을 처음 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악불군이 달려간 방향은 마지막으로 본진을 이끌고 담을 넘은 색혈도황이 있는 곳이었다.
* * *
주위를 둘러보는 색혈도황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담을 넘은 그를 기다린 것은 또 다른 담이었다. 거기까지는 앞선 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담을 넘으면서 그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 삼백 명은 넘어 보이는 무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나타난 자들의 행색이 특이했다. 천호방도들도 있었지만 승도속의 복장을 한 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천호방의 객청에 머물던 정파 연합의 무인들이었다.
놀라기는 정파 연합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나타난 자들의 무공이 하나같이 일류급이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색혈도황은 일대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기를 풍기는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전부 죽여라!”
색혈도황은 먼저 침입한 수하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자, 크게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그의 명과 함께 그곳은 순식간에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이 친구는 왜 안 나타나는 거야?’
색혈도황과 싸우던 소걸아는 다급한 듯 중얼거렸다.
지금 색혈도황은 정파 연합의 최고수라고 할 수 있는 수경대사를 비롯해 무당과 화산 그리고 소걸아까지 무려 네 명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의 우세도 점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소걸아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소걸아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그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쉬이이이잉~!
악불군의 이기어검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