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22화>
422화. 격전(2)
퍽!
퍽!
퍽!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검은 단번에 천마단의 무사들 여러 명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기어검이다! 조심해라!”
대주 한 명이 소리쳤지만, 검의 속도가 너무 빨라 조심은커녕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또 여러 명이 죽어 나갔다.
‘이기어검을 사용한다고 말은 들었지만, 저렇게 능숙하게 사용하다니……. 도대체 어린놈의 내공이 얼마나 높기에…….’
이기어검을 시전한 고수는 많았지만 이런 집단전에서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 색혈도황이었다. 검의 조종이 어려워 아군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걸아를 비롯한 네 명의 합공을 비교적 여유 있게 받아치고 있던 그였지만, 갑자기 벌어진 상황은 그를 산만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당장 나타났다.
공격을 더 많이 하던 그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려 방어만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불군의 검이 언제 그를 노리고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수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문제는 그가 도의 고수라는 점이었다. 도는 태생적으로 공격에 특화된 무기였다.
무게가 많이 나가고 면이 넓어 방어에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한번 수세에 몰리자 다시 공격으로 전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악불군의 검이 불안한 파공음을 날리며 수하들을 죽이면서 점점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사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사방에서 협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집중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제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쉽게 처리하려면 악불군이 협공에 끼어들면 간단했다. 하지만 그는 혈교의 마두를 정파에서 죽이는 공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의도된 공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절정 고수인 색혈도황조차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이니, 그보다 약한 천마단원들의 상황은 더 악화일로였다.
공간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리면 한 번에 서너 명씩 죽어 나가니, 겁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천마단원들은 하나씩 연합 세력의 공격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으면서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던 정파와 천호방의 연합 세력들은, 적들이 무너지자 사기가 충천한 듯 공격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저자는 무공이 매우 높다. 아무래도 조금 더 강한 충격을 줘야 할 것 같아.’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색혈도황이 버티는 듯하자 악불군은 소매에서 천호궁을 빼냈다.
손가락으로 활시위를 세게 당긴 악불군이 시위를 놓자, 손가락 굵기의 천호시는 소리조차 없이 색혈도황을 향해 날아갔다.
“크윽!”
보법을 밟던 색혈도황은 무엇인가 날카로운 무기가 자신의 발뒤꿈치의 근육을 뚫고 지나가자 침음성을 토해 냈다.
무엇이 지나갔는지는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네 명의 공격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뒤꿈치 근육은 발을 움직이는 데 가장 핵심적인 근육이었다. 색혈도황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고 자세마저 흐트러져, 근근이 버티던 보법까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으윽!”
무당의 송죽진인의 검이 그의 어깨를 베고 연달아 화산의 운양자의 검이 허벅지를 찌르자 색혈도황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하나 도망을 칠 기회는 없었다.
소걸아의 타구봉이 그의 허리를 때렸고 그 뒤를 이어 수경대사의 곤이 그의 머리에 떨어지자, 색혈도황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끝난 것 같구나.’
악불군은 천륭검을 회수하더니 다시 몸을 날렸다.
아직 싸움이 끝난 상황은 아니지만 더 이상의 반전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 * *
주루에 앉아 있던 금잔화는 분에 못 이긴 듯 술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마셔 버렸다.
싸움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를 기다려 안으로 침입해 담수련을 납치한 후 악불군을 불러내려던 그녀의 계획이 단숨에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색혈도황의 천호방 공격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색혈도황을 조종함으로써 그녀의 운신은 매우 편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최소한 혈교의 공격은 받지 않고 침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검후가 이끄는 검봉각의 고수들과 외부 영주 십여 명이 천호방에 침입했다는 금령각주의 보고를 듣자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섭혼금령제혼술은 남자의 색욕을 이용해 제어하는 미혼술로, 아름다운 여인이 펼칠수록 그 효과는 더 컸다. 그러나 큰 단점이 존재했다. 여인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금잔화는 무공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검후라면 그녀가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금후님, 아예 검후님을 돕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잔화가 지금 측천무후궁의 명령을 은근히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금령각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검후를 도와 공을 세운 후 총궁으로 들어간다면 그동안 들어오라는 명을 계속 어긴 것을 무마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잔화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악불군을 자신의 노예로 삼는 것밖에는 없었다.
‘악불군을 내 심복으로 삼지 못한다면 난 허울뿐인 금후로 다른 후들의 무시를 당하며 지내야 한다. 난 절대 그렇게 살 수는 없어…….’
대공에게 이미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고, 총궁으로 들어오라는 측천무후의 명까지 뭉개고 있는 지금 그녀가 살 길은 악불군을 자신의 수하로 삼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 * *
총단의 뒷담을 책임지고 있던 최욱걸은 생각 외로 강력한 구혼사마와 천마단의 공격에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일류급의 무공을 지닌 천호사기단과 백인막 출신의 천호특별단의 살수 무공 덕에 버티고 있었지만, 천호 일대는 이미 삼십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터였다.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구혼사마를 상대하고 있던 최욱걸은 점점 힘에 부침을 느끼고 있었다.
특급 살수로 백인막 열 번째였던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살수 무공을 사용하며 그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다행히 은신술 덕에 아직 행적이 걸리지 않아 버티고 있지만, 들키는 순간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호각을 불어 악불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지……? 천호방에 이렇게 고수들이 많았단 말인가?’
최욱걸을 공격하던 구혼사마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강력한 살기를 느끼자 즉시 멈추고는 방어 태세를 갖췄다.
[수련을 매일 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니, 고생한다.]
최욱걸은 전음을 듣자 반색을 하며 말했다.
[뭐 하다 지금 나타난 거냐? 나 죽을 뻔했다!]
[주군께서 네가 죽게 놔둘 분이더냐? 나보고 네 뒤를 봐주라고 하시더라. 준비해라. 백인막이 왜 천하제일의 살수 집단인지 혈교 놈에게 보여 줘야지.]
구혼사마의 공격을 멈추도록 살기를 보내 최욱걸의 숨통을 트이게 한 자는 흑석영이었다.
[당연한 말이다. 저놈의 숨통은 내가 끊게 해 다오.]
최욱걸은 힘이 나는 듯 답을 하고는 자신의 무기인 단창을 세게 잡았다.
* * *
[검후님. 총단 곳곳에 미로진이 설치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에 숨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내원에 도착해 숨어 있던 백리옥빙은, 민옥련의 전음을 듣자 이미 짐작한 듯 아미를 살짝 좁혔다.
백리옥빙은 잠입보다 서류를 찾은 후 퇴각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빠져나갈 때 뒤를 받쳐 줄 수 있도록 수하들을 배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잠룡세가의 구조도와 지금의 천호방 총단의 구조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특히 진이 설치되면서, 백리옥빙이 지정해 준 장소를 찾아 매복하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장원 전체를 미로 진으로 만들다니, 오음절맥에 걸린 계집은 천재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구나.]
[어찌할까요?]
[이곳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다. 경계를 서는 자들의 무공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자들이야. 안으로 잠입은 나 혼자 하겠다.]
[검후님 홀로 움직이시는 것은 안 됩니다.]
[너까지 같이 움직였다가는 적에게 우리의 동선만 걸릴 뿐이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 서류를 회수한 후 즉시 나올 것이니, 여기서 기다려라.]
[전 검후님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각 안에 나오지 않으시면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그 안에 나올 것이다.]
말을 마친 백리옥빙은 훌쩍 몸을 날려 우선 내원의 전경이 보이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내원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다섯 개의 전각 사이사이에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져 있었고, 연못과 구름다리 그리고 정자까지 매우 공들여 세심하게 꾸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담무룡의 딸이 너무 호강하고 있군.’
백리옥빙은 자신도 모르게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지며 중얼거렸다.
사실 악불군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죽었거나, 살기 위해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었다.
전각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한 전각에 꽂혔다.
‘거기 있구나…….’
백리옥빙은 담수련의 기를 느끼자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악불군이 옆에 없는 담수련.
그녀를 죽인다면 가장 좋은 기회였다. 하나, 그 순간 악불군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녀를 납치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서류를 빼내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의 납치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녀의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악불군,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보타검각을 공격한 것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한다.’
백리옥빙은 검을 빼 들었다.
악불군에게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 * *
“얘들아.”
“예, 아가씨.”
“내원에 침입자가 있다.”
담수련의 말에 사화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틀림없습니까?”
“주위에 펼쳐 놓은 방어진이 흔들렸어. 누군가 은밀하게 침입한 것이 분명해.”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연화가 신기한 듯 묻자, 담수련은 창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진을 설치하며 세워 놓은 나뭇가지들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저걸 보면 알 수 있어.”
“아가씨, 빨리 구석으로 가세요.”
추국은 말하는 담수련을 일으키더니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히고는, 이미 준비된 듯 밑에 뚫려 있는 구멍에 준비한 대나무들을 꽂기 시작했다.
그러자 담수련의 모습이 사라졌다.
담수련을 숨긴 추국은 무기를 빼 들고는 흑란을 보며 말했다.
“흑란아, 빨리 나가서 신호 보내. 평상시처럼 행동해라. 우리가 눈치챘다는 것을 알면 안 돼.”
“알았어.”
대답한 흑란이 밖으로 나가자 추국은 창가로 가 문을 열고는 호각을 짧게 세 번을 불었다.
악불군을 부른 것이다.
* * *
전각의 그림자에 숨어 경계하고 있던 대독관은, 밖으로 나온 흑란이 손을 이마에 대고는 하늘을 살피자 긴장된 표정으로 전음을 날렸다.
[내원에 침입자가 있다. 모두는 주위에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고 보고해라.]
[예, 지붕은 이상 없습니다!]
경계를 서던 방도들이 한 명씩 보고를 시작했다.
‘이것 봐라? 움직임이 달라졌다는 것은 나의 침입을 알았다는 말인가?’
은폐물을 이용하며 전각으로 다가가던 백리옥빙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에도 상황을 금방 눈치챘다.
그녀는 전각의 주위를 살피더니 비릿한 비소를 지었다.
지금 담수련이 있는 전각은 천호사기단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은신술로 몸을 숨긴 천호특별단이 매복하고 있었다. 하나 백리옥빙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제법이군…….’
그녀의 몸이 스르르 사라졌다. 다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난 곳은 전각의 지붕 위였다.
지붕 위를 지키던 네 명의 천호사기단원과 두 명의 천호특별단원은 백리옥빙을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모두를 제거한 백리옥빙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붕의 기와들이 소리 없이 밀리더니, 곧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