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26화>
426화. 격랑(2)
“소군, 회의는 잘했어?”
“수석장로님과 태상호법님들께서는 좀 불안해하시더군요.”
“비록 전대 태양천주지만 무황들을 패배시켰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로 대공은 전대 천주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어. 당연히 불안하실 만하지, 뭐.”
“그래도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이해하셨습니다.”
“지금 퍼지는 소문은 측천무후궁에서 퍼뜨린 걸 거야. 이젠 소군을 대놓고 적대시하기로 결정한 것 같으니, 지금은 소문이지만 그들이 깔아 놓은 간세들까지 합세해서 침소봉대하기 시작한다면 사실로 변할 수도 있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악불군의 단호한 말이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은 담수련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제 새롭게 얻은 것은 있었어?”
소호봉의 혈투가 끝난 후, 총단에 돌아온 악불군은 하루 밤낮을 자신의 방에서 운기조식을 했었다.
담수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직 확실히 깨우친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가 모자라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렇게 강했어?”
“둘이 합공을 했다면 제가 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담수련의 얼굴에 불안감이 나타났다.
“대공은 진짜 강하다고 하던데, 괜찮겠어?”
“피할 수 없는 일을 지금 걱정해서 뭐하겠습니까? 다만 아가씨께서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절 일대일 대결에서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에 담수련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녀가 없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나만 아니면 소군은 거칠 것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담수련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자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없으셨다면 저는 아마 지금쯤 거지로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아가씨를 만난 것은 최고의 행운입니다. 그리고 지금 아가씨를 위해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진실된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 *
안양은 하남과 하북의 경계선에 위치한 물류의 중심지였다. 특히 그곳이 유명한 이유는 중원 사대상단 중 하나인 만물상단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슬 퍼런 원나라 시기에도 영향력을 전혀 잃지 않았을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지니고 있던 만물상단은 지금도 북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상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자님, 모두 도착했다고 합니다.]
만물상단의 총단이 보이는 주루의 이 층에 앉아 태극검자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백천학은, 광룡신검 여형권의 전음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광룡신검 영형권은 무림맹 최정예 무력 집단인 천무단의 단주로, 여간해서는 무림맹 총단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인다면 천무단이 움직인다는 의미였고, 그 자체로 무림이 동요할 정도였다.
[저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룡단과 정의단에게도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고 다시 한번 주지시키십시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천학이 몸을 일으키자 태극검자가 곧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그 둘이 주루를 나가자 사방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순찰께서 드디어 움직이신 모양입니다.]
그러자 다른 주루에 앉아 있던 개방의 십목신개가 앞에 앉은 네 명의 무인에게 전음을 보내고는 무엇인가를 공중으로 날렸다.
십목신개는 눈이 열 개가 달렸다는 그의 명호처럼 남을 감시하고 찾아내는 데 최고의 능력을 지닌 개방의 추적 책임자였다.
[십목신개, 소림사와 팽가에서도 왔나?]
그의 옆과 앞에 앉아 있던 네 명의 무인 중 가장 덩치가 큰 무인이 물었다.
개방의 장로급인 십목신개에게 하대하고 있는 그는 천무성궁의 수호자로 일컬어지는 천무사왕 중 한 명인 태웅왕이었다.
[자신들의 턱밑에 혈교가 떡 자리 잡고 언제라도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냥 가만 있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담수련의 조언을 중시한 사해신개는 십목신개로 하여금 만물상단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두 달에 가까운 정밀 감시 끝에 그는 만물상단이 혈교의 천마전 총단이라는 것을 알아낸 상태였다.
그 정보는 곧장 악불군에게 전해졌고, 악불군은 보타검각의 혈전 이후 백천학에게 만물상단에 대한 공격을 무림맹에서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만약 만물상단이 진짜 혈교의 천마전이라면, 그동안 명성에 비해 아무런 공적도 없었던 무림맹에게는 대단한 호재였다.
백천학은 또다시 자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넘겨주는 악불군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천제무황을 설득하여 믿을 수 있는 무력대를 끌고 은밀하게 안양까지 온 것이었다. 백천학은 모르고 있었지만, 천마전의 상당한 전력이 천호방을 치기 위해 항주로 향한 것은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 * *
“총수님, 무림맹의 중원 총순찰인 백천학 대협께서 총수님께 배첩을 보내셨습니다.”
총수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만물총단 총수 한이백은 총관이 올린 배첩을 보자 눈에 이채를 띠며 집어 들었다.
배첩에는 일필휘지로 무림맹 재정에 관해 의논할 일이 있으니 배알을 청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이백은 글을 읽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백천학의 방문에 약간 긴장하긴 했지만 글귀를 보고는 약간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무림맹 재정에 관해 의논하자는 말은 간단하게 말해 돈을 좀 뜯자는 수작이었다.
“정청으로 모셔라.”
“예!”
‘무림맹에서 우리 상단에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민 적이 없었는데……?’
돈을 요구하는 것은 만물상단에게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 거기다 무림맹과 인연을 맺게 되면 들인 돈 이상의 이익을 얻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문제는 그가 알기로 무림맹에서 어떤 상단에게도 대놓고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한이백은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반각쯤 지나자, 벽이 열리며 중년 문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백천학에 대해서 조사해 놓은 것이 있느냐?”
“악불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다음 대 정파의 지도자로 모두가 손에 꼽는 자였습니다. 천제무황의 손자이자 무림맹 총순찰로서, 현재도 무림에서의 영향력이나 명성은 후기지수 중 악불군을 제외하고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공 수위는 어떠냐?”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본 사람이 아주 극소수라 정확한 수위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젊을 적 천제무황을 능가한다고 하니 무시 못 할 수준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이백은 배첩을 문사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런 자가 갑자기 이런 배첩을 들고 와 나를 만나자고 한다. 이상하지 않느냐?”
문사는 배첩에 적힌 글귀를 자세히 읽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주군,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무림맹은 직접적으로 상단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백천학은 아주 고고한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자가 돈 문제로 직접 온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가 않습니다.”
“나채현, 그럼 우리의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놀랍게도 중년 문사는 나채현이었다. 그리고 천마전의 군사인 나채현이 주군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천마종밖에 없었다.
만물상단의 총수 한이백이 천마종이라니…….
만물상단을 치기 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배첩을 보낸 백천학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며칠 전부터 개방의 거지들과 소림의 중놈들이 안양에 많이 출몰한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하나, 우리의 정체까지는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배첩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기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채현의 말대로, 만물상단이 천마전 총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개방의 거지와 소림사의 중들만 올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백천학이 무림맹의 무인들을 데리고 왔다면 그들의 간세에게서 이미 연락이 왔어야 했다.
군사인 나채현은 이들이 혈교의 간세를 배제하기 위해 목적지도 모른 채 아주 은밀하게 이동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천학이 내게 배첩을 보낸 것은 뭔가를 알아내기 위한 포석이라고 봐야겠구나?”
“제가 총수님을 대신해 직접 만나 보겠습니다. 진짜 돈 때문에 왔다면 원하는 액수를 그냥 내주고, 떠보기 위해 왔다면 최대한 거스르지 않도록 잘 설명해서 보내겠습니다.”
백천학을 죽이는 것은 만물상단이 혈교라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는 일이니, 마지막에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천마전과 무림맹 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던 그 시각.
남무림에서는 이미 구천마성과 아수라마전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점창파와 제갈세가에서 화룡세가를 맡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만통광심의 보고에 구천마황은 뜻밖이라는 듯 반문했다.
“악불군이 약속대로 정파를 설득한 모양입니다.”
“어린놈이 정말 대단하군. 꽉 막힌 정파 놈들이 본 성을 돕도록 설득하다니…….”
태양천과 원나라의 공격을 받아 천하가 유린될 때도 정파는 마도나 사파와는 절대 협력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구파일방 중 하나인 점창파와 오대세가 중 한 곳인 제갈세가에서 스스로 구천마성을 돕겠다고 나섰으니, 구천마황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느냐?”
“아수라마전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때 화우성이 화룡세가의 잔당들을 이끌고 저희의 후방을 노린다면 곤란할 수 있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잡아 주시지요.”
구천마성의 기습으로 정천보에 이어 화룡세가까지 무너졌지만, 화룡세가 역시 대단한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우성을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모아 구천마성을 기습하며 귀찮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천마황은 시립하고 있는 간부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정파는 마도가 언젠가는 배신하고 뒤통수를 친다며 마도와 협력하는 것을 극구 경계했다. 하지만 마도 역시 정파가 마도를 대놓고 경멸하고 무시한다며 정파와 연계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상황이 구천마성에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간부들도 아는지 대놓고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만통광심이 부언했다.
“아수라마전만 제거하면 남무림은 본 성이 완전 장악하게 됩니다.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혈교의 다른 세력까지 남무림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좋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아수라마전에 대해 총공격을 준비해라.”
“예!”
* * *
감숙과 령하의 경계에 있는 월아봉은 아주 특이한 곳이었다.
드넓은 황야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봉우리는 멀리서 보면 마치 달빛이 반사된 늑대의 송곳니를 보는 듯하다 해서 월아(月牙)라는 이름이 붙었다.
월아봉은 많은 무림 고수들의 일대일 결투 장소로 유명했다.
사방이 탁 트여 누구든 나타나면 즉시 알 수 있었고, 사방이 깎아지르는 듯한 바위 절벽을 이루고 있어 매복할 장소도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일대일 대결을 약속하고 함정을 파려고 해도 팔 수 없는 장소였다.
“천주님, 월아봉이 보입니다.”
이십여 명의 수하들과 함께 나타난 대공은 월아봉이 보이자 주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그들이 멈춘 둔덕은 월아봉 주위 오십 리가량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혈해사황은 지금 어디쯤 와 있다고 하더냐?”
“약 백 리 밖에 오십여 명의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고 있다고 합니다.”
“백 리 밖이면 딱 시간에 맞춰 도착하겠다는 심산이군. 사파 주제에 그래도 체면은 차리겠다, 그 뜻이군.”
생사결에서 누가 먼저 와서 기다렸느냐는 그리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인들 중에는 그 문제를 체면과 연관지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다.
“월아봉은 조사했느냐?”
“예,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계속 감시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월아봉으로 가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이곳에서 기다려라.”
“예!”
월아봉 주위 오십 리 안으로는 수하들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기로 약속한 터라, 대공은 수하들만 남기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샅샅이 주위를 감시한 그들이었지만, 월아봉 위로 한 점이 돌고 있는 것까지 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