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27화 (427/472)

<천검지애 427화>

427화. 생사결(1)

거대한 편전, 높은 상단 위 커다란 용상에 앉은 주원장은 상소문 몇 개를 읽더니 한 신하를 불렀다.

“호유용!”

“예, 황상!”

“이런 상소문을 올린 이유가 무엇이냐?”

호유용은 승상인 이선장을 보좌하는 중서성의 관리로, 주원장이 원하는 것을 재빠르게 파악해 대안을 제시하며 총애를 받기 시작한 떠오르는 권력가였다.

“여러 현에서 보고가 들어오기를, 지금 천하 곳곳에서 무림인들 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공포에 젖어 산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기틀을 잡아 가는 지금, 무림인들의 이런 횡포를 그냥 두고 본다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질까 저어했습니다.”

사실 그의 말대로 명나라가 세워진 후, 잠시 유지됐던 중원의 평화는 무림과 혈교, 그리고 측천무후궁의 전쟁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비록 군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은 아니었지만 당장 나라의 안정을 바라는 주원장에게는 그리 좋은 보고는 아니었다.

“계속 말해 봐라.”

“지금 무림의 모든 참사에는 무림십왕으로 봉해진 악 왕야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를 제어할 방비책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악 왕야와 내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는 것은 알고 하는 얘기냐?”

“황상은 무연(無緣)이며 무치(無恥)이십니다. 천하의 누가 있어 천자이신 황상께 호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소신은 악 왕야 역시 황상의 신하임을 주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호유용의 발언은 악불군을 아끼는 주원장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주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패황이자 권력욕의 화신인 그에게, 근래 보이는 악불군의 행태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양민들에게 신처럼 떠받들린다는 보고는 그의 심기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나 악불군은 사적으로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고, 공적으로는 신하가 보는 앞에서 이미 아우라고 공표된 자였다.

그런 탓에 그가 먼저 악불군을 내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호유용이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악불군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상소를 과감하게 올린 것이었다.

“유백온.”

“예!”

“호유용의 상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림 세력은 모든 황조에서 골머리를 앓게 하는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을 너무 찍어 눌러 힘을 빼 버리면 국력이 약해집니다. 실지로 군부의 수많은 장수들을 배출하는 곳이 무림입니다. 송나라 말기, 무림 세력을 홀대하고 그들을 박해하면서 원나라에 힘없이 무너졌던 전력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들을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기에는 황실을 위협하는 위험한 조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의견은 뭐냐?”

“지금 무림은 혈교라 불리는 사교(邪敎)와 측천무후궁이라 불리는 역적의 무리들과 전쟁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여러 부작용이 있지만, 그 둘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황실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악 왕야가 그들 제거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본다면, 황실의 위협을 제거하고 무림 역시 전쟁의 와중에 저절로 전력이 손실될 것입니다. 지금 황실에서 굳이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태사령, 네 의견을 받아들여서 지금까지 봐준 것이 아니더냐? 한데 갈수록 전쟁의 양상이 커지고 너무 잦다는 생각은 안 드느냐?”

“그들을 제어하신다면, 그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상께서 직접 황명으로 지시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영웅대회가 끝난 후, 우승자들을 따로 모아 황상에 대한 명령 복종 약조를 하도록 하고, 더 이상 천하를 어지럽히는 전쟁은 하지 말라고 교시를 내리는 것이 그들의 불만도 야기하지 않고 무림도 제어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반군 시절부터 무림을 담당해 왔던 유백온의 말에 주원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 영웅대회도 몇 달밖에 안 남았으니 우선 그때까지 기다리자. 그래, 대회 준비는 잘되고 있느냐?”

“이번 무림 영웅대회는 그동안의 비무 대회와는 달리 매우 어려운 대회가 될 것입니다.”

“호유용.”

“예, 황상.”

“태사령의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이런 상소문은 괜히 무림인들에게 불안감만 심어 줄 수 있다. 영웅대회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무림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말거라.”

호유용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소신 호유용, 황상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유백온 덕에 지금은 어떻게 무사히 지나갔지만 언제든지 주원장의 마음이 바뀌면 무림과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원 무림 세력에게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주원장은 전혀 고맙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 *

“뇌혼광뇌, 네 생각을 말해 봐라.”

혈해사황의 행렬이 멈춘 곳은 월아봉이 보이기 시작한 한 평원이었다.

그가 뇌혼광뇌에게 전한 것은 악불군이 보낸 서찰이었다.

서찰을 여러 번에 걸쳐 자세하게 읽은 뇌혼광뇌는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분석이 안 되느냐?”

“악 방주 이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겠습니다. 다만, 본 계에 손익 계산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서찰에는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맡겠다는 허락의 뜻이 적혀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따른 조건이었다.

악불군의 조건은 악마전을 제거해 달라는 것이었다.

구천마성이 아수라마전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혈해사계 역시 혈교의 사대마전이자 서무림을 책임지고 있는 악마전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 담수련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대로 혈해사황은 악마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원나라 시절, 두 세력은 정보 공유는 물론 직접적인 협력까지 하며 세력을 보존해 왔었다.

“손익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감숙은 새외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 때문에 태양천은 본 계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숙과 태양천이 물러난 원나라의 고토(古土)는 실로 가까워서, 말을 달리면 반나절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제거해 준다면, 그들로서는 가장 큰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니 분명 큰 이익이었다.

거기다 태양천주를 죽인 자가 악불군이니 태양천의 복수도 악불군에게 집중될 것이었다.

문제는 악마전의 전력이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뇌혼광뇌는 태양천의 위협에서 벗어난 이익과 악마전과 싸움으로서 생겨 날 피해 중, 어느 것이 혈해사계에 더 이익일지 계산이 안 되고 있었다.

그때 부군사인 양뇌잔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악불군은 곧 싸울 것입니다. 우선 누가 이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벌써 그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악불군이 진다면 당연히 모른 척하면 될 것이고, 이긴다 해도 우리가 약속을 안 지키면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양뇌잔심의 생각은 전형적인 사파인들의 생각이었다.

“부군사.”

“예, 군사님.”

“지금 악불군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 제거된 고수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 있나?”

“아, 알고는 있습니다만…….”

양뇌잔심은 갑자기 뻔한 질문을 하는 뇌혼광뇌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한마디에 정파인들 수백이 순식간에 모인다는 것도 알고 있나?”

“듣기는 했습니다.”

“그럼 그런 자가 확답을 안 받고 먼저 싸운다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분명히 이길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군요?”

“그렇다. 악불군은 이길 자신이 있는 거다. 그리고 지금 중원 무림은 혈교와의 전쟁으로 사방이 난리다. 본 계만 빠질 수는 없다.”

“그럼 악마전을 치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로 치느냐? 아니면 공격을 하기 전에 악마전에 알려 피할 시간을 주느냐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거다.”

전력을 다해 악마전을 공격한다면, 혈해사계는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은 불을 보듯 분명했다. 하지만 악불군과는 계속적인 친분을 가지게 될 것이고, 아직까지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불거질 부역에 대한 문제도 무마할 수 있었다.

하나, 악마전에 상황을 알리고 싸우는 척만 하다가 악마전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간다면, 혈교를 상대로 싸웠다는 명분도 얻고 감숙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던 악마전을 다른 지역으로 몰아내는 일거양득이 될 수 있었다.

그럼,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될 텐데, 무엇을 고심하고 있는 것일까…….

악불군이 보낸 서찰은 매우 예의 바르고 정중했지만 배신한다면, 자신과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것이라고 명시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대응을 한다면 악불군이 분명 눈치챌 것을 걱정한 것이다.

뇌혼광뇌가 양뇌잔심과의 대화가 끝나고도 일각이 넘게 의견을 말하지 않자, 혈해사황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다시 물었다.

“일각이나 지났다.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겠느냐?”

혈해사황의 재촉에 뇌혼광뇌는 결국 허리를 숙이며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전을 진짜로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 *

여간한 고수는 올라오기 어려운 월아봉 정상을 몇 번의 발차기로 가볍게 올라온 대공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정상의 공터는 생각보다 넓었다.

대공은 정상의 테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 자신의 수하들이 보였다.

그때, 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반대쪽에 모여 있는 또 다른 무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혈해사계였다.

눈으로 보이지만 막상 가려면 상당한 먼 거리였다. 그와의 결투 시간에 맞추려면 혈해사황이 평야를 달리는 모습이 보여야 했다.

하지만 혈해사계가 모인 곳에서 월아봉으로 오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대공의 고개가 살짝 갸웃했다.

생사결을 펼치기 싫었다면 거절했으면 됐다. 무림인들이지만 일방적인 결투 제의를 거절하는 것은 흉이 아니었다.

하나 허락을 했고 월아봉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는데 오지 않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대공은 검미를 좁히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월아봉 정상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혈해사황이 보냈느냐?”

대공은 한쪽에 우뚝 서 있는 청년을 보자 약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혈해사황 선배께서 보낸 것이 아니라 제가 자진해서 왔습니다.”

“어찌 됐건 혈해사황이 이곳을 알려 준 것은 사실이지 않느냐?”

“천하의 태양천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만은 맞습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느냐?”

“천주님께서 올라오기 직전에 왔습니다.”

대공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악불군이 그보다 먼저 왔는데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떻게 감시에 걸리지 않고 이곳에 도착했느냐였다. 살수 무공 같은 은신술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계속 은신술을 사용하며 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재주가 좋은 놈이군. 심지어 치아 색을 보니 어린 나이로 보이는데, 벌써 자연경의 경지까지 오른 것 같구나.”

숨지도 않고 그냥 서 있었는데도 당장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악불군이 자연경의 경지에 올랐음을 뜻한다고 그는 판단했다.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어르신도 자연경의 경지에는 이미 오래전에 오르신 것 같은데, 아닙니까?”

감히 자신이 태양천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서는 악불군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대공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네가 악불군이구나.”

“빨리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전 천호방의 방주이자 천호무적검으로 불리는 악불군입니다.”

“철무정이 수백 명의 태양전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네게 패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그럴 만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사실 오래전부터 대공 전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설마 나를 존경해서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테고, 이유가 있느냐?”

“어르신을 죽여야 제 앞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한 번에 치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령군주가 그러더구나, 네가 잠룡세가의 호위 무사였다고? 천하 무림을 유린한 태양천주를 죽인다면 네가 안고 있는 태생적인 불리함을 단번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지금 제게는 가능하냐 안 하냐는 문제가 안 됩니다. 무조건 어르신을 죽여야만 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악불군은 천륭검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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