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29화>
429화. 결과(1)
“주군, 악 방주의 정보가 정확했다고 합니다.”
집무실에 앉아 난을 닦고 있던 천제무황은 현기수사의 보고에 고개를 돌렸다.
“만물상단이 정말 혈교의 사대마전 중 하나였다는 말이냐?”
“예.”
대답하는 현기수사의 얼굴에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진격아.”
“예, 주군.”
“싸움은 어떻게 됐느냐?”
“대승하긴 했지만, 적의 저항이 생각보다 아주 거셌다고 합니다.”
“그럼 피해가 꽤 있었다는 말이구나.”
“예.”
“악불군은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만 데리고도 혈마전을 큰 피해 없이 없애 버렸는데, 무림맹에선 천학이와 천무사왕까지 나섰는데도 피해가 컸다면 뭔가 잘못됐단 생각이 들지 않느냐?”
“…….”
현기수사는 즉답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네 말대로 악불군이 자신의 명성을 올리려고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고 대척점을 만들려고 한다면 보타검각을 칠 때 천학이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천마전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지금 무림에는, 악불군이 잠룡세가의 호위 무사였고 지금도 담무룡의 딸을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악불군이 무슨 이유로 천마전에 대한 정보를 공자님께 주고 무림맹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나도 보고를 받았지만, 천호방이 장악한 절강에서는 그 소문을 믿지도 않거니와, 만약 사실이라 해도 상관없이 천호방을 지지할 것이라고 한다더구나. 자신이 장악한 구역에서 그런 지지를 받는다면 확실한 증거 없이 소문만으로는 건드릴 수 없다.”
“주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부역자를 눈감아 준다면 무림맹이 존립할 명분이 사라집니다. 제가 반드시 증거를 찾아내겠습니다.”
“……꼭 그래야겠느냐?”
“다른 세력도 아니고 잠룡세가입니다. 잠룡세가는 오룡세가 중 가장 악질적으로 중원 무림을 괴롭혔습니다. 악불군이 정말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악불군이 수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현기수사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현기수사를 보며 잠시 고심하던 천제무황은 결정한 듯 밖을 향해 소리쳤다.
“호위대장 거기 있느냐?”
“예!”
장비수염에 네모난 턱을 지닌 중년인이 크게 답하며 뛰어왔다.
“제갈 군사에게 내가 천호방의 악 방주를 직접 보고자 하니 정중하게 초청하라고 전해라.”
천제무황의 지시에 현기수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군, 악불군이 배첩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맹주님께서 먼저 초청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사옵니다!”
“내가 보기에 악불군은 절대 먼저 나를 만나겠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쉬운 내가 먼저 청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내가 직접 만나 알아볼 것이다.”
현기수사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갈수록 악불군의 위치가 자신이 견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 * *
생사결은 비무와 달리 고수일수록 승패가 빨리 나는 편이었다.
내공이 강한 대신 초식마다 그만큼 많은 내공을 사용하기 때문에 내공의 소모량도 많고, 받는 충격 역시 매우 크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고수들의 일 초식은 하수들의 일 초식과는 달랐다.
하수들의 한 초식에는 많아야 세 번의 변식이 포함되지만, 고수들의 절정 무공은 한 초식에 열 번 이상의 변식이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공 수준이 거의 같은 경우 삼십 초식 이상 싸우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오십 초식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긴 싸움이었다.
오십 초를 넘긴 대공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했다. 오 갑자가 넘는 내공을 지닌 그조차도 지칠 정도이니, 얼마나 대단한 결투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앞 악불군의 몰골은 단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대공과는 달리 매우 처참했다.
내상을 입은 듯, 입에서는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몸에도 여러 곳에 상처를 입은 듯 피투성이였다. 누가 보아도 악불군이 매우 밀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너 같은 아이가 있다니 정말 놀랍구나.”
먼저 입을 연 대공은 진심으로 탄복한 듯 말했다. 만약 둘의 결투을 계속 본 사람이 있다면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의아한 장면이었다.
오십 초를 넘게 싸운 상대였다. 승기를 잡았다면 당연히 더욱 몰아쳐서 상대의 목숨을 끊어 버려야 하는 것이 생사투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말을 하는 것은 악불군에게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저 역시 오늘 눈을 새롭게 떴습니다. 왜 태양천주를 천하제일 고수라고 하는지 알 것 같군요.”
뜻밖에도 이기고 있는 대공보다 더 힘이 남아 있는 듯 씩씩하게 대답하는 악불군이었다.
대결을 시작하고, 악불군은 대공의 강력하고 너무도 빠른 공격에 계속 밀렸다. 더구나 내공까지 대공이 우위에 있으니 반격의 기회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대공의 태양천멸강기는 악불군의 호신강기를 흔들며 내상을 입혔고, 그의 태양무극환도는 악불군의 검을 무력화시키며 몸 곳곳에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생사결은 우위를 지켜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결과적으로 악불군은 대공의 모든 공격을 막아 냈고 아직 살아 있었다.
“너를 좀 더 빨리 제거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저로서는 어르신을 빨리 만나지 않은 것이 행운이었군요? 아무래도 하늘이 제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가 지금 사용하는 무공이 천륭검보의 무공이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공은 두루뭉술한 악불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싸우면서 자신이 사부인 전대 천주에게 들었던 구문황의 천륭검법과 악불군의 수법이 많이 달라서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처음 초원의 전사들이 위대하신 칭기즈 칸을 따라온 세상을 점령해 나갈 때는 모두가 하나였고, 최고의 역량을 모았다.”
갑작스런 대공의 회상에 악불군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저도 그 당시의 얘기를 듣고 감탄했습니다.”
“하나, 권력이란 것이 참 유혹적이면서도 지저분한 면이 있더구나. 그렇게 굳건하던 초원 전사들도 권력에 맛이 들고, 서로가 그것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면서 서로를 배척하고 죽이기 시작했다. 어제의 가족이 원수처럼 변해 갔지.”
“그것을 아시는 분께서 어찌 다시 중원을 도모하시겠다는 생각하신 것인지…… 안타깝군요. 이미 지나 버렸고 되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하신 행동 역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니었을까요?”
악불군의 말에 대공은 허탈한 미소를 짓거니 다시 구환도를 들어 올렸다.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시간 끌지 말고 직접적인 내공의 대결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당연히 거절해야 할 악불군의 대답은 너무 선선했다.
“그러지요. 저도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은 시간만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악불군의 답이 끝나자, 즉시 대공의 몸에서 태양과 같은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악불군의 몸에서도 금빛 강기가 뿜어졌다.
처음 대결을 시작할 때를 그대로 다시 재연하는 듯했지만, 다른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대공의 태양천멸강기가 악불군의 금빛 강기를 압도했지만 지금은 그런 기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공은 두 손에 든 구환도를 가볍게 던졌다. 그러자 구환도는 마치 륜(輪)이 돌듯 맹렬하게 회전을 하며 악불군에게 날아갔다.
순간 악불군의 검도 두 개로 분리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천륭검과 구환도가 공중에 부딪치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날아가더니 둘의 장이 마주쳤다.
이기어검과 이기어도로 내공을 사용하면서 장과 장을 통해 직접적인 내공의 결투를 벌이는 것은 내공이 사 갑자 이상 되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각쯤 지나자 대공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싸움을 시작하고 반 시진쯤 지났을 때, 대공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었다. 악불군의 천륭검법이 강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태양절기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지녔다면 당연히 내공이 높은 그가 우세할 것은 분명했고, 실지로도 반 시진 동안 악불군은 입으로 피를 흘리고 온몸이 상처로 피투성이로 변했다.
하지만, 반 시진이 더 지나가 대공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맹공을 퍼부었지만, 내공만 소모하고 결정적인 한 방은 모두 악불군이 피하거나 방어해 냈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치 자신의 수법을 읽어 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반 시진이 흐르자, 대공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내공의 소모가 심한 것은 분명했다. 하나 그것은 상대가 피할 때 이야기일 뿐, 공격을 직접 받아 낸다면 내공 사용량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악불군은 대공의 공격을 거의 다 받아 냈다.
그럼에도 악불군의 내공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공과 악불군의 내공의 차이는 대략 반 갑자 정도였다. 절대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를 정도로 꽤 큰 차이였다.
하나, 대공은 악불군을 죽이지 못했고, 지금 거의 반 갑자 이상의 내공이 소모된 상황이었다. 더 이상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싸우다가는 먼저 탈진할 것 같았다.
대공이 잠시 싸움을 멈추고 악불군에게 내공으로 결판을 내자고 제안한 이유였다.
장심이 붙은 둘은 자신의 공력을 상대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대공의 손은 마치 태양이 타듯 이글거리기 시작했고 악불군의 손은 금광으로 덮였다. 서로를 향해 쏟아진 강력한 강기는 밀리는 즉시 혈맥이 타고 내장으로 들어가 완전히 으스러뜨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반각도 지나지 않아 대공은 자신이 오판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직까지는 악불군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제안한 내공 대결이 파멸로 끌고 들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도대체, 이놈의 내공의 끝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악불군은 단전에 공력을 모아 놓지 못했다. 천륭검보의 무공이 공력을 단전이 아닌 온몸의 근육에 퍼뜨려 놓기 때문이었다.
공력을 단전에 모아 놓았다 해도 싸움이 시작되면 내공을 끌어올려 퍼뜨려야 했다. 하지만 천륭검보는 끌어올릴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몸에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그의 몸은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공격을 받을 때도 공력을 보낼 필요 없이 그대로 방어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약한 자들과 싸울 때는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보일 수 있었지만, 대공 같이 자신보다 공력이 강한 자를 만났을 때는 취약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대공은 공격을 가할 때 공력을 더 집중시킬 수 있었지만 악불군은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림사에서의 기연 이후 악불군은 내공을 단전에 모으면서 온몸에 퍼진 공력까지 단전으로 모으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대공과 싸우면서 점점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악불군 역시 계속적인 싸움으로 내공이 소모되었지만 그것을 보충할 수 있었고, 내공 대결로 싸움이 전환되면서 그는 나머지 몸에 퍼져 있는 공력들을 모두 끌어올 수 있었다.
대공이 악불군의 내공이 마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핼쑥해진 대공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내공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구환도에서부터 나타났다.
천륭검과 맹렬하게 공중에서 싸우던 구환도 중 하나가 천륭검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더 이상 구환도를 조종할 공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사라진 천륭검은 빠르게 대공을 향해 날아갔다.
대공은 위기를 직감하고 몸을 빼고 싶었지만, 악불군과 딱 붙은 손바닥은 아예 처음부터 하나인 듯 떨어지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