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31화 (431/472)

<천검지애 431화>

431화. 비상(1)

“태양천주의 목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무기인 구환도고요.”

“서, 설마…… 지금 태양천주와 싸우고 오신 겁니까?”

모두는 경악한 듯 소리쳤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증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목을 잘라 왔습니다. 비록 적이지만 태양천주는 함부로 모욕을 받을 분이 아니니, 최대한 정성 들여 처리하십시오.”

말을 마친 악불군과 담수련이 안으로 사라지자 모두는 스르르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깊게 고개 숙이며 포권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존경심의 발로였다.

* * *

검후는 치명상을 입었고 사도비류까지 죽었다는 보고를 들은 금잔화의 표정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악불군만 내 치마폭에 감쌀 수 있다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녀는 측천무후궁의 금후로서 최고직에 있었지만 상당히 불만이 많았다.

지위만 후(后)일뿐 다른 후들과는 격이 달랐다.

태생 자체가 진골이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차별이었다. 더구나 금잔화는 야망이 큰 여자였고, 자신보다 위에 사람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반골 기질이 강했다.

언제나 측천무후궁을 자신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는데, 악불군에게서 그 가능성을 보았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불군을 생각할수록 점점 애가 타는지,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하나, 한참을 걸으며 생각을 해도 악불군과 단둘이 만날 특별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검후, 그 계집만 아니었다면 기회를 만들 수 있었건만…….”

악불군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정해지자 그 소망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태어나서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손에 넣었던 그녀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 뭔가 중요한 것을 갖기 위해서는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지.”

그녀는 악불군을 빨리 손에 넣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붓을 들더니 종이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글의 첫머리에는 천호방 방주 천호무적검 악불군 친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 * *

“태양천주를 방주님께서 제거한 것은 무림 백 년 동안 최고이자 최대의 치적입니다. 그런데 공표를 보류하라니요?”

간부 회의를 시작한 천호방의 간부들은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제거했다고 공표하면 천호방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갈지를 놓고 저마다 기대에 찬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몸을 씻고 나타난 악불군은 태양천주 제거에 대한 공표를 잠시 미루라고 한 것이다.

고철황의 말을 동정어옹이 받았다.

“맞습니다. 태양천주는 중원 무림의 자존심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 때문에 무림인들은 일 갑자 넘게 크나큰 패배감과 함께 태양천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주님께서 태양천주를 제거했습니다. 이것은 쾌거를 떠나 중원 무림의 자존감을 한껏 올릴 큰 사건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공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공표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조금만 보류하자고 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들이 이번 일로 얼마나 고무되어 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일개 신생 방파가 단 일 년 만에 한 지역의 패자가 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만약 이번 일까지 공표된다면 천호방의 위상은 거의 모든 정파의 연합인 무림맹까지 넘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흥분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보류하자는 것은 숨기자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은…….”

악불군은 자신이 대공과 싸우게 된 이유와 끝에 혈해사황이 보인 행동에 대해 설명한 뒤, 그에게 경고를 남겼음을 말했다.

“하여간에 사파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요! 명색이 무황 소리까지 듣는 사람이 그런 치졸한 행위를 하다니!”

분노한 고철황이 터뜨리듯 말하자, 악불군이 부언했다.

“그래서 진짜 저를 죽이려고 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며칠만 기다려 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먼저 공표하는 것보다는 혈해사계에서 먼저 공표하는 것이 더 신빙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공표한다면 그렇긴 하지만, 또 잔머리를 굴려 방주님의 공적을 자신들이 가로채려 할까 그게 걱정이 됩니다.”

추명혼은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태양천주의 목과 그의 무기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때, 천수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주님, 제가 감히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감히라니요? 저는 나이로나 경험으로나 여기 계신 분들의 후배입니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셔야겠지만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시오.”

악불군의 말은 겸손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모두에게 충성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게…….”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방금 감숙의 월아봉에서 싸우셨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제가 생각해도 하룻밤 사이에 갔다 올 거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천수옹의 질문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죽인 사실보다 월아봉까지 다녀왔다는 말이 더 놀라게 했었다.

백설 같은 최고의 명마를 타거나, 전설의 축지비행술을 쓴다 해도 며칠 밤은 걸려야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묻지 못한 것은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죽였다는 사실까지 의심하는 모습으로 비출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자세한 얘기는 드릴 수 없지만, 먼 곳을 빠르게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이 제게는 있습니다. 그 정도로만 알아 두십시오.”

결국 답이 없는 두루뭉술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모두에게, 악불군이 진짜 신인(神人)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방주님, 중요한 보고가 있습니다.”

내당당주 상경호가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다가, 잠시 조용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보고하세요.”

그는 봉서 하나를 공손히 건넸다.

“무림맹에서 보냈군요?”

악불군은 봉서의 겉에 찍힌 직인을 보자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맹주의 직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주의 직인 찍힌 것으로 보아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다른 간부들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약간 궁금한 표정으로 말했다.

봉서를 뜯은 악불군은 내용을 읽더니 의아한 눈빛을 한 채 서찰을 고철황에게 넘겼다.

“모두 읽어 보시고 무슨 의미인지 의견을 말씀해 보십시오.”

서찰을 읽은 고철황도 내용이 뜻밖인 듯 고개를 갸웃하며 추명혼에게 넘겼다. 그렇게 모두 서찰을 읽자 악불군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의견을 말해 보시지요.”

그러자 정파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경험도 많은 동정어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 서찰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정파의 최고 어른인 천제무황은 그 명성을 떠나 무림맹의 맹주입니다. 저같이 제법 높은 배분을 가지고 있는, 소위 명숙들조차 만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신 분이지요. 그런데 먼저 방주님을 만나자고 초청했다는 것은 방주님의 위상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안 좋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정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맹주님이 직접 초청한 이상, 신변에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 무림의 정세와 천호방의 움직임에 대한 해명과 압박이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추명혼 역시 단순한 초청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 잠시 생각하던 고철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단지 제 의견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제 경험상 언제나 아쉬운 사람이 먼저 연락을 하더군요.”

“무림맹주님께서 제게 아쉬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그래서 경험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럼 고 장로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초청을 거절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철황의 말에 모두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무림맹주가 직접 보낸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당한 후폭풍을 감수할 생각이 아니라면 누구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고 장로님, 비록 천호방의 위상이 높아졌고 방주님의 명성이 무황들에 비견이 된다고 하지만, 천제무황은 맹주 이전에 무림의 어른이고 최고 어른입니다. 그런데 거절한다면 정파의 여론이 많이 안 좋아질 겁니다.”

묵죽도옹의 말에 고철황은 안다는 듯 부언을 했다.

“그래서 제안이라고 한 겁니다. 그리고 거절한다 해도, 방주님께서 태양천주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비난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듣고 보니 고 장로님의 말도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밀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선 먼저 초청장을 보낸 것은 아쉬운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뭔가 방주님께 원하는 것이 있을 텐데, 가서 맹주님께서 직접 요구했는데 그때 거절하는 것보다는 급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끝내고 방문하겠다고 양해를 구하시고, 맹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후에 방문하시는 것이 더 나을 듯싶습니다.”

천수옹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늦겠다고 양해를 구한다면, 어른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거절했을 때의 역풍을 생각하자면 훨씬 좋은 방법이었다.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여러분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회의 파하지요.”

말을 마친 악불군이 몸을 일으키자, 간부들도 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를 굽혔다.

과한 예가 싫다고 악불군이 계속 강조했지만 갈수록 오히려 더 공손해지는 간부들이었다.

저절로 우러나오는 공경인지라 그들 역시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아가씨, 월아봉까지 어떻게 하룻밤 만에 다녀오셨어요?”

사화는 악불군이 대공을 죽였다는 말에 기함을 토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녀들은 대공의 무서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몰라도 돼.”

“아가씨, 저희와 아가씨께서는 같이 자라다시피 했잖아요?”

“그래요. 언제는 우린 자매라고 하시더니 그렇게 신기한 일을 비밀로 하시면 어떡해요?”

‘아! 얘들 또 귀찮게 하네…….’

수하는 주인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것은 사화도 담수련 못지않았다.

“이거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면 안 돼.”

“그럼요! 절대로 우리끼리의 비밀로 할게요.”

사화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 주위로 모였다.

“소군이 하늘을 날아. 됐지?”

“바, 방주님께서 하늘을 나시면…… 그럼 신선이 되신 거예요?”

연화의 놀란 외침에 담수련은 급히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말했다.

“지금 해 준 말은 천기를 누설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커다랗게 말하면 비밀이 유지되겠니?”

“죄, 죄송해요.”

사화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길 때, 밖의 경계를 맡고 있는 잠봉단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악불군이 나타나자, 사화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사화가 왜 저러는 겁니까?”

인사도 그렇고 마치 황제라도 만난 듯 얼굴도 들지 않고 나가는 사화를 보며 악불군이 의아한 듯 말하자, 담수련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놔둬, 자기들끼리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나 보지 뭐! 그래 회의는 잘 끝냈어?”

“예, 그런데 무림맹에서 맹주님의 직인이 찍힌 초청장이 왔더군요.”

“맹주님의 직인이 찍힌 초청장?”

담수련은 눈을 살짝 크게 떴지만 그리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의논을 좀 했습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바빠서 지금은 못 간다고 연락해. 그럼 누군가 직접 올 거야. 그때 맹주님이 뭘 원하는지 알아보고, 소군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가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같으면 또 좀 미루는 게 좋아.”

듣자마자 나오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짐짓 놀란 듯 말했다.

“역시! 아가씨의 생각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간부들과 한참 의논해서 나온 결론을 그냥 단번에 그대로 말하시네요.”

악불군의 칭찬에 담수련은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숙이고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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