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34화>
434화. 새로운 별호(2)
전서구의 뒤를 따르던 악불군은 금령각주가 전서구를 보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안전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군…….’
악불군은 절벽을 유심히 살피더니 전서구에게 전음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곧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악불군의 존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금잔화는 전서구가 갑자기 공중에서 빙빙 돌며 헤매는 것 같자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러는 거냐? 훈련이 덜된 것을 사용한 것이냐?”
“아닙니다. 가장 말을 잘 듣는 놈으로 가져갔는데, 이상하네요?”
금령각주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작은 호각을 하나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사람은 듣지 못하지만 동물들은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호각을 통해 전서구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전서구는 몸을 돌리더니 다시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향은 맞았지만 고도가 맞지 않았다. 전서구가 너무 높이 올라가 버린 것이다.
“금령각주!”
“예!”
“예전에도 전서구가 저런 적이 있느냐?”
“전서구가 도착한 것만 봐서, 날아오면서 저런 짓을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금잔화는 높이 올라가 다시 공중을 빙빙 돌고 있는 전서구를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악불군이 전서구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은령각주.”
“예, 금후님!”
“동령각주가 오고 있는지 알아봐라.”
“연락하면 악불군이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해 봐.”
“예!”
은령각주는 절벽의 끝에 서더니 두 손을 입에 갖다 댔다.
“꼬로롱, 꼬로로롱, 꼬로롱!”
그녀의 입에서 새소리 같은 소리가 퍼져 나가자 잠시 후 곧 답이 들려왔다.
“꼬로로로롱, 꼬롱, 꼬로롱!”
답을 들은 은령각주는 금잔화를 보며 말했다.
“지금 오고 있답니다. 소리로 미루어 백 장 정도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대화까지는 할 수 없는 듯했다.
“백 장이면 악불군이 약속한 장소에 거의 도착했을 텐데?”
금잔화는 약속 장소를 다시 한번 자세히 훑었다. 하지만 보이는 인영은 없었다.
“금후님, 전서구가 내려옵니다.”
그때, 전서구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전서구를 잡은 금령각주는 통에 있는 쪽지를 급히 빼고는 금잔화에게 전했다.
쪽지를 받은 금잔화의 얼굴이 급격히 구겨졌다.
내용은 간단했다. 악불군을 놓쳤으니 피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금잔화가 건네준 쪽지를 읽은 금령각주가 급히 말했다.
“금후님, 동령각주는 상황 판단이 아주 예리합니다. 피하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이곳을 떠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악불군이 나타난 후에 움직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금잔화 역시 절실한 터라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금잔화는 몸을 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목에 날카로운 살기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냐?”
금령각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고 묻기는 했지만 직감적으로 악불군이라고 판단한 그녀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했다.
“몸을 돌리지 마십시오. 돌리면 그 즉시 죽습니다.”
악불군은 금령군주의 말에 대답 없이 다시 한번 금잔화를 향해 싸늘한 경고부터 전했다.
그러자 금령각주의 눈짓을 받은 금령각과 은령각의 대원들이 금잔화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으아악!”
“아악!”
하지만 그녀들은 금잔화 곁으로 갈 수 없었다. 그녀들도 모두 일류급 이상의 고수였지만, 대공과 싸우기 전보다 더 강해진 악불군에게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악불군은 이기어검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고 찔렀을 뿐이었지만, 이십 명이 넘는 여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죽어 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악불군의 공격에는 사정이 없었다.
“아하! 몸을 돌리면 정말 죽습니다!”
비명 소리에 몸을 돌리려던 금잔화는 다시 자신의 목을 옥죄는 살기에,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결국 멈추고 말았다.
제혼(制魂)이 빠르고 강력하여 절대의 고수라 해도 빠지게 된다면 그대로 노예가 된다는 섭혼금령제혼술은 천년마교에서 창조한 고금 제일의 미혼술이었다.
하지만 나오자마자 곧 전설상의 무공이 된 이유는 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로부터 요기를 받았다는 천요신체가 아닐 경우, 오히려 스스로의 뇌가 제혼되어 바보가 되거나 미치기 일쑤였다. 더 큰 단점은 반드시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눈만 안 마주친다면 다른 미혼술보다도 더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결국 천년마교에서도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장된 무공이었지만, 측천무후궁에서는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해서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섭혼금령제혼술에 아주 적합한 여인이 태어난 것이었다. 바로 금잔화였다.
“저는 단지 악 방주님을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대접이 너무 가혹하군요.”
금잔화는 애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섭혼금령제혼술을 펼친 목소리였지만,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은 상황에서 악불군 같은 고수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럼 무엇을 도와주려고 했는지 한번 들어볼까요?”
“대화를 나누면서 대면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제대로 된 대화가 되겠습니까?”
“아아악!”
악불군의 말에 희망을 본 금잔화는 더욱 애절하게 말했지만 답은 또 다른 비명 소리였다.
“당신들도 허튼짓하면 죽습니다.”
잠깐 사이 은령각 대원 중 한 명이 움직였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자면서 제 수하들을 계속 죽이다니, 강호의 도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공격하려고 해서 방어 차원으로 대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악 방주에 대한 모든 공격을 멈추거라!”
“예!”
금잔화의 말에 금령각주와 은령각주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와 차분한 대화를 위해 수하들에게 한 백 장만 물러나라고 하시지요. 괜히 움직였다가 죽으면 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금잔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상황에서 수하들까지 모두 물린다면 그녀로서는 꼼짝 못하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입을 열었다. 보지는 못하지만 지금 상황이 수하들이 있다 해도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수하를 물리면 자신이 몸을 돌리도록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한 몫을 했다.
“모두 백 장 밖으로 물러서라.”
“금후님! 그건…….”
“물러서라고 했다!”
금잔화의 강력한 목소리에 금령각주는 악불군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만약 금후님께 조금의 상처라도 입힌다면 너 역시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마음에 큰소리는 쳤지만 그게 통할 것이라고는 그녀도 믿지 않았다.
“자, 모두 물러났으니 이제 말씀해 보시지요.”
“이제 수하들도 없는데 계속 이렇게 대화할 필요가 있을까요?”
금잔화의 말에 악불군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했다.
“금령군주시지요?”
“그래요. 악 방주님과는 구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금잔화는 오랜 친구라도 만나 듯 반가운 목소리로 받았다.
“우선 서찰에 적은 내용에 대해 먼저 말씀하시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이 되면 그때 대면을 하시지요. 예전에 제게 하신 행동 때문에 얼굴을 보면 다시 화가 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때는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악 방주님께서 화가 날 만큼 큰 잘못을 했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몸을 돌리지 마세요. 정말 죽습니다.”
금잔화가 말을 하며 몸을 돌리려 하자 다시 경고를 날린 악불군이 말을 이어 갔다.
“빨리 말해 보십시오. 전 많이 바쁜 사람입니다.”
“전 금령군주이기 전에 측천무후궁의 금후입니다. 측천무후궁은 제게…….”
“저야 상관없는 일이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시고, 측천무후궁의 총궁이 어디에 있는지나 말해 보시지요.”
‘이, 이놈이…….’
최대한 악불군을 유혹하기 위해 참고 있었지만, 자존심이 무너지자 올라오는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금잔화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측천무후궁의 총궁은 호남의 군산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악불군의 눈이 커졌다. 군산이라면 바로 무림맹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군산이 대단히 넓은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군산 어딥니까?”
“군산…….”
총궁의 위치부터 시작해 그녀가 밝힌 정보는 실로 굉장했다. 그녀는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혈교의 총단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보타검각에 입수한 정보와는 또 다른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보타검각에서 취급하는 일과는 다른 일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게 말해 주신 정보는 확실히 제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그런데 그 정보가 정확하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정보에 대한 증거를 제가 말한다면 또 제 말에 대한 증거가 있냐고 물으실 거 아닌가요? 사람의 눈은 절대 거짓말을 못합니다. 직접 저를 보시면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악불군은 잠시 갈등에 잠겼다. 그녀가 그에게 해 준 말은 대부분 사실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악불군은 결정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천하에서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단 한 명입니다. 그분께서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절대로 지켜야 한다며 내린 명령이 있습니다.”
금잔화는 악불군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자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악불군을 완전히 홀리면 담수련부터 죽일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게 뭔가요?”
금잔화는 다시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몸을 돌리십시오.”
악불군의 말이 떨어지자 금잔화는 ‘드디어 됐다!’ 라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악불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악불군의 검이 그녀의 목을 그대로 잘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께서 제게 내린 명령이, 당신의 말을 다 듣고 나면 무조건 목을 자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이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하십시오.”
“죽여라!”
그때 금잔화의 목이 잘리는 것을 본 금령각주와 은령각주가 분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어느새 동령각주까지 합세하고 있었다.
“쯧! 쯧! 그대로 도망을 가면 쫓지는 않을 생각이었건만…….”
달려오는 여인들을 본 악불군은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검을 날렸다.
그리고 공중으로 떠오른 천륭검은 가차 없이 여인들의 죽여 나갔다.
* * *
악불군이 금잔화를 제거하고 방에 돌아온 후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악불군과 담수련은 금잔화에게 얻은 정보와 보타검각에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계획을 만들고 있었다.
둘이 방에 칩거하다시피하며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천하는 완전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일 갑자가 넘게 천하를 장악하고 무림을 탄압하던 주범인 태양천주의 죽음 때문이었다.
천호방의 정문에 그 유명한 구환도와 함께 태양천주의 목이 달리자, 악불군의 명성은 이제 천하 방방곡곡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무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촌구석의 노인들까지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새로운 명호가 붙기 시작했다.
천호검신(天護劍信)
신검이라는 명호는 상당히 많지만 검신이라고 불리는 무림인은 몇 대에 걸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신이라고 인정을 하는 명호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무림인들이 항주에 들어가서는 절대 싸우면 안 된다는 불문율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
천호방의 정문은 뜻밖에도 상인들의 발걸음이 무림인들보다 많을 정도였다.
천호방에 기부를 하고 천호방과 친한 상단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방주님!”
담수련의 방에 있던 악불군은 상경호의 목소리에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내당 당주가 직접 왔다는 것은 귀한 손님이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