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35화 (435/472)

<천검지애 435화>

435화. 변화(1)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무림맹의 군사총책 우문상일 대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문상일 대협께서 직접 오셨다는 말입니까?”

제갈우명에게 가려 있어서 그렇지, 우문상일 역시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지자(智者)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대문파 출신이 아니면서, 모든 일에 중립적이고 성품이 온화하여 중소 문파인들은 제갈우명보다 우문상일에게 의논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맹주님의 초청을 거절해서 무림맹에서 사람을 보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리 보냈네요. 무림맹이 생각보다 많이 다급한 모양이네요?”

대화를 듣고 있던 담수련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군사총책인 우문 대협께서 직접 오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정도 지위를 지닌 분이 와야, 악 방주님을 모시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니겠어요? 시간상으로 보면 악 방주님께서 태양천주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에 보낸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군사총책 같은 고위직까지 보냈는데 또 거절하면 무림맹을 무시했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어.”

“그럼 초청에 응하라는 말씀입니까?”

“금후까지 죽인 이상, 측천무후궁에서는 어떻게든 악 방주님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거야, 혈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현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 두 곳에서 모두 방주님을 노리고 있어요.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뭘까요?”

“역시 도와줄 사람이겠지요?”

“그들의 전력은 아직도 막강해요. 방주님께서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기는 어려워요. 물론 지금까지 저희들이 각 문파를 찾아다니며 혈맹지약을 한 이유가 그것이지만, 앞으로 달라질 거예요. 무림맹 역시 초청장을 받을 때의 방주님과 태양천주를 죽인 지금의 방주님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거예요. 이젠 초청에 응한다 해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상 당주.”

담수련의 말을 감탄의 표정을 지며 경청하던 상경호는 악불군이 부르자 급히 답했다.

“예, 방주님!”

“우문 대협은 정청에 계신가요?”

“예! 지금 정청에 계십니다.”

“제가 곧 간다고 전해 주십시오.”

“존명!”

안 하던 존명까지 외치며 상경호가 나가자 악불군은 쓴웃음을 지며 말했다.

“저런 말은 쓰지 말라고 했는데?”

“억지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말이야. 소군을 마음으로 존경한다는 의미니까 굳이 하지 말라고 할 필요는 없어.”

담수련의 부언에 악불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가씨께서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니야, 소군 혼자 가. 내가 자꾸 끼어들면 그게 더 이상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악불군이 밖으로 나가자.

담수련은 가슴이 벅찬 듯, 손을 가슴에 댔다.

“내 예상보다 훨씬 훌륭해졌어. 오히려 내가 점점 부족한 느낌이 드네…….”

담수련은 악불군이 무림의 정점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동시에 커지고 있었지만, 그와 함께 불안함도 같이 커지고 있었다.

* * *

‘지금 같은 혼란의 시기에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안정적인 세력을 만들다니……. 실로 놀랍군.’

천호방이 세워진 후, 처음으로 절강에 온 우문상일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무공이 강한 자가 문파를 세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문파가 존속시키는 것은, 수장의 무력이 아니라 정치적인 능력이었다.

신생 문파가 자리를 잡고 삼십 년 이상 버티는 경우는 일 푼이 채 되지 않았다. 백 개의 신생 문파 중 삼십 년 후에도 살아남는 문파는 한 개가 채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원나라가 물러난 후 기존의 세력들이 몰락하고 구역에 공백이 생기자, 우후죽순처럼 천하 곳곳에 신생 문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생겨 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반년을 버틴 문파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아직 살아남은 문파는 수장들이 정치력이 좋은 자들 뿐이었다.

즉, 문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무공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수장이 돈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재능과, 새롭게 재편되는 큰 문파들과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마도의 종주인 구천마성과 사파의 근간이 혈해사계, 그리고 중원 무림의 중심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다시 재건되고 있는 지금, 어느 쪽이든 붙어야만 버틸 수 있었다.

하나, 천호방은 말 그대로 갑자기 튀어나온 문파였다. 그들에게 돈을 주는 상인도 없었고, 정파를 표방했지만 무림맹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천호방은 절강에서 지금까지 어느 문파도 보이지 못했던 탄탄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오로지 방주인 악불군 혼자서 해낸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타의 지역과는 다른, 너무 편안해 보이는 양민들의 얼굴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력인 무림맹과 황제가 있는 남경에서도 그런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책사인 우문상일 입장에선 정말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방주님, 들어오십니다.”

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우문상일은 예를 갖추기 위해 급히 자세를 잡았다.

그는 오는 도중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죽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천호방 정문에 효시된 태양천주의 목과 구환도를 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악불군의 위상은 영웅을 넘어 무림의 구성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그가 무림맹을 출발할 때와 고작 이틀밖에 안 지났지만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위상이 달라졌으니 예도 달라져야 했다.

“무림맹 군사전 총책인 우문상일입니다. 악 방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은, 우문상일이 너무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굽히려 하자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우문상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책사이기는 하지만 무공 역시 절정 고수였다. 그런데 악불군의 가벼운 손짓에 그의 몸이 그대로 펴진 것이다.

“선배님께서 과한 예를 취하시면 제가 더 어색해집니다.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앉으시지요.”

말을 마친 악불군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에 앉은 둘은 잠시 미소를 지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우문상일이 입을 열지 않자 결국 악불군이 먼저 말했다.

“얼마 전, 맹주님께서 악 방주님께서 맹에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예, 저한테는 정말 영광스러운 초청장이었는데, 근래 사건이 너무 많아서 기회가 되면 찾아뵙겠다고 연락을 드렸지요.”

“연락을 받자마자 제가 악 방주님을 만나기 위해 출발을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있었습니까?”

“무림 영웅대회가 이제 반 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무림 십왕으로 봉해지신 네 분을 제외하면 여섯 분을 더 뽑는 대회지요. 하지만 이번 영웅대회로 인하여 무림의 힘이 많이 약화될 것이라는 본 군사전의 분석이 있었습니다.”

“영웅대회로 무림의 힘이 약화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공표하지 않았지만 본 맹에서 입수한 극비 정보에 의하면, 황상께서 이번 대회를 생사결로 정하셨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악불군의 표정이 일변했다.

무림 최고의 고수 여섯 명이 탄생하려면 최소한 수백 번의 대결이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그것도 시시한 고수가 아니라 초절정 고수들이 다 망라된 엄청난 결투였다.

그런데 생사결이라면 얼마나 많은 고수가 죽거나 다칠 지는 예상이 가능했다.

“황상께서는 무림 세력을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시고 계십니다. 하나, 지금 황상께 불가함을 진언할 힘을 가진 자들이 없습니다.”

“무림맹은 황상께서 명나라를 세우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황상께서는 공신을 더 경계하고 있다는 소문은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그게 저를 초청한 이유입니까?”

“무림맹과 천호방이 힘을 합쳐 건의한다면 황상께서도 마음을 바꾸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우문 대협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군사전에서 분석한 것입니다.”

“그럼, 제갈 군사님께서는 그 분석에 동의하셨습니까?”

“아직 답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갈 군사님만이 황상의 성정을 정확히 읽으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지금 황상께서 제게 특별 대우를 하시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악 방주님께서 황상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소문도 있고 호형호제한다는 말도 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무림맹에 입맹하지 않고 정파를 갈라치고 있다고 생각하시기에 저를 잘 대우해 주시는 겁니다. 만약 이번 일로 제가 무림맹에 힘을 실어 주는 행보를 한다면 황상께서는 더욱 무림을 경계하실 겁니다. 물론 저에 대한 대우도 달라지시겠지요. 지금 황상께서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저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문상일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악불군이 지금 한 얘기는 떠나기 전 제갈우명이 자신에게 해 준 말과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우문상일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악 방주님의 말씀에 상당히 우려할 만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십니까?”

“조언을 부탁합니다.”

“현재 무림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저에 대한 소문 말씀이십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사방에 퍼지고 있는데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맹주님을 만나 오해를 푼다면 그 소문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군사총책이 아닌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맹주님을 만나신다면 방주님께서 무조건 이익이십니다.”

“우문 대협께서는 제가 이익을 바라고 천호방을 세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시고자 하는 목표를 더 쉽게 이루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관점의 차이겠지요. 무림맹에는 조만간 가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목표니 이익이니 하고는 상관이 없는 무림의 안정을 위해 갈 것입니다.”

“무림의 안정이요?”

“혈해사계에서 혈교의 서무림 근거지인 악마전을 공격할 것입니다. 사천의 무림인들은 새외연합을 막아야겠지요. 다행히 태양천주와 소천주가 연달아 죽은 태양천은 후계자 문제와 더불어 전력의 약화로, 얼마간은 안심해도 될 겁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으신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 분석 중입니다. 조만간 그들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무림맹에서 맡아 주시기를 전 바랍니다.”

우문상일을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악불군의 말은 대의적인 관점에서는 자신의 공을 무림맹에 돌리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끌고 나가야 할 무림맹이 오히려 천호방에 끌려가는 듯한 지금의 모양새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럼 언제쯤 오실 수 있겠습니까?”

“태양천주를 제거하면서 저도 상처를 좀 입었습니다. 몸을 추스르는 대로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그럼 반가운 소식을 무림맹에 전하고 기다라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우문상일은 정확한 날짜는 받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정확하게 말해 달라고 요구라도 했겠지만, 악불군에게는 그것도 어려웠다.

‘휴우~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야. 소문에 대해서 변명이라도 듣고 오라고 했는데, 말을 꺼내는 것조차 못했으니…….’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그였지만, 이미 주눅이 들어 버린 상황에서 말대꾸하거나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주군, 돌아가는 우문 대협의 등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많이 실망한 것 같습니다.]

우문상일이 총단을 나가는 것까지 보고 온 흑석영이 여전히 정청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악불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머리가 상당히 복잡하시겠지. 상관 말고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악불군의 말에 흑석영은 보이지 않는데도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림맹까지 가볍게 생각하는 그의 말 속에서 강력한 절대자의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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