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39화>
439화. 새로운 국면(1)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담수련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 천화궁주님을 참 잘 따랐던 것으로 알아요. 궁주님도 진심으로 저를 예뻐해 주셨고요. 아무리 어리다 해도 거짓으로 예뻐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아끼고 예뻐해 주셨음을 느낄 수 있답니다.”
“맞습니다. 전 정말로 아가씨를 제 친딸처럼 예뻐했답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아가씨를 배신하겠습니까?”
듣고 있던 악불군이 결국 나서고 말았다.
“천화궁주님.”
조용한 말투였지만 천화궁주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귀에 벼락이라도 친 듯 심령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마, 마, 말씀하십시오 방주님.”
“저로 인해 죽은 측천무후궁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보타검각도 무너졌고 성후와 무후도 죽었지요. 얼마 전에는 검후와 사도비류가 저를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사도비류는 죽고, 검후는 역시 상당 기간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모두 궁주님 덕이었습니다.”
“……그, 그게 왜 덕인지……”
“천화궁을 통해 움직이는 정보들을 모두 제가 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금후라 칭하는 여인이 저를 찾아와, 제가 모르던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그럴 리가……”
금후가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반박한 그녀는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뱉어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측천무후궁은 치밀하고 완벽한 조직이지만, 지금 제가 입수한 정보면 얼마 못 가 무너지고 말 겁니다. 지금 아가씨께서는 궁주님께 마지막 기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옳지 않은 이상에 빠져 그 기회를 무산시키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악불군의 말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천화궁주에게는 매우 다르게 들렸다. 바로 절대자의 권위가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
악불군의 말에 주눅이 든 건지 아니면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갑자기 입을 닫고 고심에 빠진 그녀를 담수련이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
“우린 지금 확인하기 위해 천화궁주님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궁주님께서 측천무후궁의 사람들과 만나는 장면까지, 방주님께서는 이미 보셨습니다. 유모와 그동안 저와의 정리를 봐서 어떻게든 궁주님만은 살려드리고 싶어서 모신 거예요.”
“휴우~ 화 언니를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궁주님께서 결정을 내리신 후에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종리화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는 그녀의 말 한마디로 죽을 수도 있음을 뜻했다.
“아가씨께서도 측천무후궁의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지는 아실 것입니다.”
천화궁주는 부정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느낀 듯 자세를 바로 하며 반문했다.
“알고 있어요.”
“동감하시는 바가 없으십니까?”
“많이 동감해요.”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측천무후궁과 적대시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신지요?”
“동감한다고 해서 잘못된 방법을 따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세상에는 음양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어요.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태어나는 것 역시 천지만물의 이치예요. 물론 그 안에 구조적인 차별과 여러 모순이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남자들 역시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어요.”
“……세상의 권력은 모두 남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남자를 움직이는 사람은 여자지요. 소수의 극단적인 남자들을 일반화하여 모든 남자를 적으로 삼는 것은 미련한 짓이에요.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도우면서 살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남자만 살 수도 없지만, 여자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남자를 적으로 삼는 측천무후궁의 방식은 틀린 것이에요.”
“남녀가 동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동등이나 평등은 없어요. 왕후장상으로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거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굶어 죽는 아이도 있으니까요. 지금 측천무후궁은 사회 전체의 문제를 남녀의 문제로 너무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전 동감은 하지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담수련의 말에 반박할 말을 잊은 듯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천화궁주가 힘들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십니까?”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어요. 예전처럼 기녀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천화궁주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 주시면 됩니다. 전 궁주님의 그런 모습을 존경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측천무후궁이 존재하는 한 그게 불가능하시겠지요. 그들의 지시를 받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측천무후궁을 없애 버릴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측천무후궁에 대해 아시는 것을 모두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해 주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희가 보타검각과 금후에게서 얻은 정보가 상당합니다. 조금이라도 거짓으로 적었다가는 진의를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담수련의 말에 천화궁주는 매우 괴로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평생을 충성했던 곳을 배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제게 시간을 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측천무후궁에서 궁주님께서 저희를 만나러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너무 오래 걸리면 그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요?”
“한 시진 안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 * *
강서의 포양호에서 무림맹이 있는 군산까지는 뱃길이 크게 뚫려 있었다. 모두 장강의 물길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북의 입구인 구강포는 언제나 많은 배들과 어부 그리고 상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성을 넘을 때마다 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구강포는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여전히 사람은 많았지만 부쩍 칼을 찬 무림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악불군을 태운 천호방의 배가 구강포에 곧 도착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전날 무림맹에서 포구가 보이는 곳에 있는 커다란 주루를 통째로 빌린 터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주루를 통째로 빌린다는 것은 큰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빌린 주체가 무림맹이고 손님이 천호방이라는 말에 누구도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강포에 무림인들이 최소한 천 명 가까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층 주루의 창가에 앉아 밖을 보던 백천학은 영웅용단의 단주인 길복현의 보고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게……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시비도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백 명만 모여도 시비가 끊이지 않는 자들이 무림인들이었다. 그런데 천 명 가까이 모였음에도 시비가 없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시비를 회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단지 도착만 한다는 소문만으로 싸움을 멈추게 할 수 있다니…… 실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는 즉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백천학을 무림을 구할 구성이자 영웅이라고 믿고 그를 따르고 있었다. 비록 지금 경쟁에서 악불군이 우위에 있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지만, 천하는 넓고 사건은 많았다.
영웅이 여럿 나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무림인들은 물론 양민들에게까지 이렇게 영웅 대접을 받은 무림인은 그가 살아온 일평생 동안 본 적이 없었다. 정파의 최고인인 천제무황이 도착한다고 해도 양민들은 모두 겁에 질려 숨기 바빴다.
“왜 말이 없으십니까?”
태극검자가 말이 없자 백천학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 역시 태극검자가 답을 못하는 이유를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히 악 방주께서 양민들에게 자신들을 지켜 주는 무림인으로 각인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양민들에게 믿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의 말 한마디로 천하의 여론이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누가 악 방주를 음해하려고 들었다가는 오히려 당하겠군요?”
근래 돌고 있는 악불군에 대한 소문을 의미한다는 것을 직감한 태극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빈도가 보기에는 이미 소문이 사실이냐 거짓이냐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털고 가는 것이 악 방주께도 좋을 것입니다.”
오점은 힘이 있을 때는 수면 아래로 잠겨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힘을 잃거나 여론에 변화가 생긴다면 죽은 뒤 불에서 새 생명을 얻는 신조처럼 다시 살아나 목을 조일 수밖에 없었다.
백천학은 이번 기회에 악불군에 대해 퍼지고 있는 소문까지 제거해 버릴 생각을 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악불군을 보호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 철장건권이 주루 위로 올라왔다.
“공자님, 천호방의 깃발을 단 배가 구강포에 들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백천학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배를 본 수많은 무림인들이 포구로 몰리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철장건권.”
“예, 장로님.”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면 의외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영웅용단과 함께 포구 정리를 하는 것이 좋겠구나.”
태극검자도 포구의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운 것 같자 한마디 했다.
“아닙니다. 그대로 두십시오. 악 방주께서는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시더군요. 우리가 강압적으로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백천학은 고개를 저었다. 악불군이 양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가 바로 그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번 만남에서 그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 * *
“소군은, 천화궁주를 믿어?”
뒷짐을 진 채 뱃머리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던 악불군은, 담수련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께서 판단하신 것인데, 맞지 않겠습니까”
“사적인 감정이 없었다면 나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천화궁주만은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
“저희를 속였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최소한 제 서찰은 측천무후에게 전하겠지요.”
“소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사실은 좀 불안해.”
“혈교나 측천무후궁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든다면 최소한 십 년 이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희생자도 엄청날 것이고,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측천무후가 받아들일까?”
“가주님께서 일 초도 견디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무공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전 그녀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그녀가 거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악불군의 얼굴에서 불굴의 의지를 느낀 담수련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불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백 공자님께서 구강포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뭘까?”
“글쎄요. 만나 보면 이유를 알겠지요. 하지만 제게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
구강포가 가까워지면서 전경을 본 담수련은 생각 외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런 모습이 바로 그녀가 그렸던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패웅이나 효웅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웅은 다른 사람들의 추앙 속에 만들어진다.
지금 구강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악불군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음을 그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배에 타고 있는 천호방도들 역시 구강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감격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천호방도라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이 든 것이다.
구강포 앞에 어지럽게 정박하고 있던 수많은 배들도 천호방의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급히 배를 물려 그들이 쉽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구강포에 다가갈수록 악불군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