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41화 (441/472)

<천검지애 441화>

441화. 조우(1)

“제가 잠룡세가의 천금이라는 것은 어떤 말로도 바뀔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와 달리, 악 방주님은 부역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 방주께서 잠룡세가에서 무공을 수련했다면 그 자체로 부역자가 됩니다.”

“악 방주님은 천륭검가의 옛 식솔들이 모두 가주님으로 인정했습니다. 어린 시절 잠시 잠룡세가에 몸담았다고 부역자라고 한다면, 천하인의 반은 부역자가 되지 않을까요?”

일 갑자가 넘는 세월 동안 원나라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었던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그 모든 사람을 부역자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중원을 배신한 부역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다시 나라에 환란이 일어나면 또 배신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부역자 처벌은 중원의 정기(精氣)를 지키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백천학이 그동안 부역자 처벌을 도맡아 해 온 이유는, 그가 가진 신념을 따른 것이었다.

“저도 알아요. 죄를 지었으면 받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지만 실질적인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단지 연(緣)이 있다는 이유로 일률적으로 벌을 주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

백천학과 태극검자가 즉답을 하지 않자 담수련은 말을 이어 나갔다.

“잠룡세가에서 저의 호위 무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악 방주님을 부역자로 몰아간다면, 이후 천하는 또다시 혼란의 도가니가 될 것입니다.”

“잠룡세가는 오룡세가 중에서도 중원 무림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문파였습니다.”

“아버님의 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악 방주님과 저는 천하를 위해 온몸을 던져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도 혈교와 측천무후궁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면 백 년 전의 혼돈 상황이 다시 재연할 것이라는 정도는 아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천하를 위협하는 두 악의 무리를 저희가 제거할 것이니 그 공에 대해서도 인정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무림을 위해 현 무림의 최대 위협을 제거해 줄 것이니 자신들의 잘못을 넘어가 달라는 담수련의 말은, 평상시의 백천학이라면 절대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공과 과를 구별해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에게까지 냉철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지금의 대화는 발설하지 않기로 했으니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우려도 없었다.

“오늘 대화는 아예 없던 것으로 하는 편이 나아 보이는군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욱 감사할 뿐이지요.”

‘허허허! 정말 똑똑한 여인이로구나…….’

대화를 듣고 있던 태극검자는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진실을 얘기한 것은 분명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공범을 두 명 더 만들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무림인에게 이름을 건 맹세는 목숨보다도 더 중요했다.

“그럼 저를 먼저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저는 부역자로서 처단을 당한다 해도 조금도 세상을 원망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아버지 덕에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제 마음과는 달리 악 방주님은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저 때문에 악 방주님과 천하가 싸우고 또다시 혼란과 혈겁이 세상에 닥칠까 그것을 걱정하는 거랍니다.”

설득력 있는 말이었지만 협박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천학이나 태극검자는 그녀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악불군이 그녀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천학은 말없이 있는 악불군을 한 번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안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겠지요. 또한 태양천주를 죽이신 악 방주님의 위업을 무엇으로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니 제게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나 악 방주님은 무림의 정의도 세우고 양민들을 괴롭히는 자들도 징치하면서 아버님께서 지은 죄를 작게나마 갚고 싶습니다. 또한 무림맹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저희의 진의를 이해하고 도와주실 분이 공자님밖에 없어,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먼저 뵙자고 한 것입니다.”

“무림의 악적인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신 악 방주님이십니다. 부역자 문제는 제가 당장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이번 맹주님과의 회동만은 아무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악불군이 품에서 서찰 몇 장을 꺼냈다. 그중에는 지도도 하나 있었다.

“보타검각에서 입수한 서류를 분석 정리한 것입니다. 아직 분석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상당히 유용한 정보를 추릴 수 있었습니다. 전 이번 맹주님과의 회동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싶습니다.”

악불군의 말은 맹의 가입이나 소문 따위는 아예 의제에서 빼고 실질적인 협력에 관해서만 의논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백천학은 잠시 고심하듯 생각에 잠기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맹주님께서 악 방주님을 초청한 이유는 악 방주 주변을 떠도는 여러 의구심을 해소하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담 군사님과 악 방주님의 의견을 참고하여 서로 간에 불편한 의제는 올리지 않도록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백천학의 말을 들은 담수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밝혀지면 가장 곤란한 사안을 고심하며 밝혔는데, 다행히 백천학이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자 또 한 고비를 넘었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때, 악불군의 안색이 확 변했다.

심지어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역시 담수련이었다.

[소군, 왜 그래?]

그리고 곧 백천학도 뭔가를 느낀 듯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그의 표정 역시 급격하게 굳어졌다.

‘악 방주에게 누군가 기를 보냈어……. 도대체 누가?’

악불군의 얼굴이 저렇게 변할 정도라면 당연히 엄청난 기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자신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다.

다시 안정을 찾은 듯 표정이 풀린 악불군은 백천학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 공자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제가 잠시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아가씨를 좀 보호해 주십시오.”

담수련을 백천학에게 부탁한다는 것은 생각 외로 악불군이 백천학을 매우 믿고 있다는 의미였다.

[소군, 무슨 소리야?]

담수련은 당황한 듯 전음으로 소리쳤지만, 악불군은 답 없이 백천학과 바라볼 뿐이었다.

“악 방주님만큼 하지는 못하겠지만, 제 목숨을 다해 담 군사님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아, 악 방주님, 갑자기 어디 가시려고요?”

전음에 답을 안 하자 불안해진 담수련이 결국 직접 묻고 말았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아까 느낀 그 기 때문이에요?”

“걱정 마시고 백 공자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십시오.”

말을 마친 악불군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런 식으로 그녀 곁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담수련을 보며 백천학이 물었다.

“아까 느낀 기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모, 모르겠어요. 그냥 구강포에 들어서면서 뭔가 느껴진다고…….”

조금 전까지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말하던 그녀가 악불군이 사라지자 금세 애처로운 작은 새처럼 변하자, 백천학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변했다.

‘악 방주란 존재가 그녀의 전부로구나……. 휴우~’

* * *

방을 나온 악불군은 목적지가 정해진 듯, 일직선으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어찌나 빠르고 은밀한지 흑석영조차 그가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구강포 주위에는 험준한 산이 여러 곳 있었다. 악불군은 마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듯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한 산을 향해 그대로 달렸다.

깊은 산 중, 넙적한 바위위에 두 명의 노인이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떠냐, 바둑이 끝나기 전에 나를 찾아올 거라고 했지?”

하늘에서 악불군이 뚝 떨어지자 신선풍의 노인은 관우의 수염을 가진 노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기 죽을 자리라는 것을 알면서 진짜로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일월신마는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악불군을 보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저런 아이들의 특징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혈우대마종의 말이 끝나자 악불군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를 협박까지 하며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혈우대마종은 악불군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말을 한마디도 안 했는데 어찌 협박했다고 하느냐?”

“구강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신호를 제게 보내셨으니 그게 협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허허허~ 아직 이립밖에 안 됐다고 들었는데 벌써 상대의 기를 읽을 수 있는 경지에 들었다니, 놀랍구나.”

“바둑 둘 줄은 아느냐?”

“돌이 움직이는 정도는 압니다.”

잘은 두지 못해도 담수련에게 바둑의 길은 배운 적이 있었다.

미소를 지은 혈우대마종은 손에 쥔 바둑돌 하나를 악불군을 향해 튕겼다.

실로 너무 빠른 속도에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퍼퍼퍼퍼퍼 퍽!

악불군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바둑돌은 아름드리나무 십여 그루를 부러뜨리며 사라졌다.

단지 가볍게 튕긴 바둑돌의 위력이 초절정 고수가 전력을 다해 펼친 공격을 넘어설 정도였다.

혈무대마종은 검미를 살짝 좁혔다. 보통 사람들이 봤다면 악불군이 날아오는 바둑돌을 고개를 옆으로 젖혀 피했구나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혈우대마종이 던진 바둑돌은 악불군의 근처에서 열 가지가 넘는 변화를 보였다. 고개를 젖히는 정도로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세가 최소한 이십 번이 변했어. 정말 대단한 놈이로군.’

혈우대마종은 오늘 반드시 악불군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어르신께서 먼저 가르침을 주셨으니 그 답례는 해야겠지요.”

말을 마친 악불군이 팔을 털자 천호시가 그의 소매 속에서 빠르게 혈우대마종을 향해 날아갔다.

마왕급의 마두들도 감히 직접 상대를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하게 만들었던 천호궁의 천호시였지만, 혈우대마종에게는 애들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혈우대마종은 가볍게 천호시를 손으로 낚아채 버렸다.

“아주 잘 만들었구나? 이런 실력이면 명장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누가 만들었느냐?”

“저를 부르셨으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시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예의? 하하하하하! 그래, 너희 정파 놈들은 예의를 참 중시하긴 했지. 그리고 내 앞에서 예의 운운한 놈들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태양천주만 한 고수가 또 있을까 했는데, 이 노인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강한 것일까?”

악불군은 이 노인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 서로 간에 가벼운 인사는 했으니 정식으로 대화를 나눠 볼까. 일월아.”

“예.”

“너도 잠시 떠나거라.”

“교주님, 그건…….”

“왜 내가 걱정이 되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한 백 장 밖으로 가 있거라.”

일월신마는 결국 몸을 일으켜 사라졌다.

“이리 와, 앞에 앉거라.”

자신보다 내공이 강한 자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무림인들이 가장 주의해야 하는 금기사항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가더니 혈우대마종의 앞에 앉았다.

“저 아이와 바둑을 뒀는데 아직 끝을 내지 못했다. 네가 보기에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악불군은 중안에 놓인 바둑판을 쳐다보았다. 흑백의 바둑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전 바둑을 둔 적이 없습니다.”

“바둑을 두지는 못해도 볼 수는 있지 않느냐? 만류귀종이라 했다. 이치야 다를 것이 있겠느냐?”

혈우대마종의 말에 악불군은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흑돌과 백돌이 이어지고, 끊어지고 서로 엉겨 있는 모습이 혼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놈 봐라? 정말 대단한 놈이군.’

혈우대마종은 자신의 한마디에 뭔가 깨달은 듯 삼매경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악불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지금 손을 쓰면 단숨에 악불군의 목을 꺾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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