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42화 (442/472)

 


<천검지애 442화>


442화. 조우(2)


하지만 혈우대마종은 손을 쓰지 않았다.


그가 젊을 적, 뭔가 느낌이 오는 순간 목에 칼이 떨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빠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바로 지금 악불군이 보이는 모습처럼 말이다…….


‘위험한 아이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손을 쓰고 싶진 않군.’


그렇게 한 식경쯤 지났을까…….


“승패를 얘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혈우대마종은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래? 내가 보기에는 백이 당연히 이길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답이 나오다니, 의외로구나?”


“흑은 매우 현란한 초식으로 공격하고 있고, 백은 아주 묵직한 방어막을 형성하여 공격을 막아 내고 있습니다. 지금 흑이 아주 날카로운 초식으로 백을 공격했고 백이 방어를 한 상황에서 멈췄습니다. 아직 누가 이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혈우대마종은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악불군이 바둑을 마치 무공의 비무처럼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만류귀종이라고 한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당장 그것을 받아들여 바둑을 무공과 연계를 시킨다니……. 이놈이 내 제자였다면 이미 천하를 가졌을 터인데, 정파라는 사실이 정말 아깝군.’


혈우대마종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할 말을 다하는 악불군을 보며 아깝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바둑은 집이 많으면 이긴다. 아무리 공격이 날카롭고 방어가 완벽해도 결국 결과는 집이 말하지. 지금 흑은 공격에 치우쳐 자신의 집을 만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백은 착실히 공격을 막아 내며 자신의 집을 조금씩 구축해 내고 있다. 그렇다고 흑의 공격이 백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을 정도도 아니지. 그렇다면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 아니겠느냐?”


“바둑은 집이 많으면 이기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바둑에 대해 잘 모르는 제게 기리(棋理)를 설명하기를 원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흑에게 더 강하고 날카로운 공격수단이 아직 남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식이라면 네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백은 공격을 못해서 방어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에 그저 순리에 맞게 천천히 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백이 공격하기 시작하면 흑의 공격은 상대가 안 될 수도 있다.”


악불군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아는 모든 초식이 맹렬하게 돌고 있었다. 천륭검보의 자세를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초식의 수는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조합한 초식이 모두 유용한 것은 아니니, 유의미한 위력을 가진 초식을 만들기 위해 악불군은 거의 매일 노력을 해 왔다.


바둑판을 뚫어질 듯 보던 악불군이 흑돌을 들더니 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혈우대마종의 눈빛이 변했다.


“바둑을 둬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만류귀종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많이 들었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께 듣는 순간 그 뜻이 제 생각보다 심오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혈우대마종은 무공 수련을 제외하면 화초를 돌보는 일과 바둑으로 하루를 보낼 정도로 바둑의 고수였다. 그리고 악불군이 둔 수는 그가 보기에 바둑판의 승패에 전혀 상관없는 무의미한 수였다.


혈무대마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말에 깨달음을 얻어 그 수를 두었다는 말인데, 그럼 그 수에 대해 설명해 보거라.”


“설명은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곳에 두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럼 내가 다음 수를 둬야겠군.”


다음 착수를 위해 백돌을 든 혈우대마종은 갑자기 멈칫하고는 돌을 놓지 못했다.


‘이게…… 무슨 수가…….’


다른 돌과 연관이 전혀 없어 보였던 악불군의 착점이, 막상 수읽기에 돌입하자 대응이 매우 까다롭게 느껴진 것이다.


“어디까지 수를 읽었느냐?”


혈우대마종은 착수를 미루고 물었다.


“다음 수는 모릅니다. 다만 현재 그곳이 상대의 급소라는 느낌을 받았을 뿐입니다.”


“정녕 바둑을 두어 본 적이 없다는 말이지?”


혈우대마종은 그가 바둑을 두어 본 적이 없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직감하면서도 다시 한번 물었다. 그가 상당히 놀랐음을 보여 주는 순간이었다.


“바둑이란 것이 이렇게 신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배워 볼까 합니다.”


“이제부터 배운다……. 그럴 기회가 있겠느냐?”


“어르신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가능하겠지요.”


“내가 너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것을 포기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겠느냐?”


“어르신이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나를 사람들이 혈우대마종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혈교의 교주지.”


혈우대마종의 명호를 듣는 순간 악불군은 경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그게 잘못된 소문이라 해도 지금 그의 나이는 최소 이 갑자가 넘을 것이었다.


“어르신께서 혈우대마종이시라면 이미 세상 사람들은 고금 오대마종 중 한 분으로 추앙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모두 다 이루셨을 연세이신데 무엇을 바라시고 이러시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사실 그의 나이라면 이미 세상사에 달관하고도 남을 나이였다.


“혈교는 천년마교의 후신이다. 나는 후계자로서 천년마교를 다시 부활시킬 책임이 있단다.”


“천년마교가 비록 사람들에게 사교로 낙인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신도로 구성되는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본 교는 신도가 필요하지. 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 우리가 혈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무림이 우리를 핍박해 혈겁이 일어나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천년마교의 부활을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꾀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혈우대마종은 호기심이 생긴 듯 반문했다.


“그런 방법이 있느냐?”


악불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공손히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


“제가 지금 무림의 문제를 가장 적은 피로 가장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획한 것입니다.”


종이를 펼친 혈우대마종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넌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조건도 없으니까요.”


“잘못하면 너희가 전멸할 수도 있다.”


“그래도 몇십 명에 불과하겠지요. 하지만 혈교와 무림이 직접 부딪칠 경우 생길 수 있는 혈겁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이 아닐까요?”


혈우대마종은 악불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좋다. 너를 믿고 한 번 기다려주지.”


“제게 바둑을 배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 보거라. 너를 계속 보면 자꾸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구나.”


“그럼 어떻게 연락을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천호방으로 사람을 보내마.”


몸을 일으킨 악불군이 포권을 하며 돌아서자 갑자기 혈우대마종이 다시 불렀다.


“잠깐, 한 가지 물어보지 못한 것이 있구나.”


“말씀하십시오.”


“내가 아주 아끼는 아이가 하나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이인데, 사람들은 그놈을 혈응이라고 하지.”


“대단한 영물을 아시는군요.”


“그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어. 혹시 그 아이가 사라진 것과 너와 연관이 있느냐?”


“혈응 같은 천고의 영물이 사람의 말에 의해 사라지겠습니까? 아마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혈우대마종은 혈응이 사라진 것이 악불군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 혈응의 결정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네가 죽는다면 다시 내게 돌아가라고 전하거라.”


악불군은 답 없이 다시 포권을 하고는 몸을 날려 사라졌다.


“교주님! 어찌 악불군을 살려 보내셨습니까?”


멀리서 보고 있던 일월신마는 악불군이 멀쩡한 몸으로 떠나자 깜짝 놀라 달려왔다.


“저놈이 좋은 제안을 하나 하더구나.”


“정파 놈들의 함정에 빠져 크게 당하신 기억을 잊으셨습니까?”


예전 혈우대마종이 무황들의 합공에 당해 죽을 뻔한 것도 사실은 정파의 거짓 정보에 속아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나 혼자였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느냐? 그리고 시간을 조금 더 준 것일 뿐, 결국 내게 죽는 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거라.”


말을 마친 혈우대마종은 갑자기 바둑판에 시선을 보내더니, 일월신마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바둑판을 한번 보거라.”


“바둑돌이 애먼 곳에 떨어져 있군요.”


일월신마 역시 바둑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지 즉각 악불군이 착점한 돌을 찾아냈다.


“떼지 말고, 너라면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지 둬 보거라.”


방금 무림의 판도를 바꿔 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 지났건만 혈우대마종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월신마와 함께 바둑 삼매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 * *


“걱정 마십시오. 현 무림에서 악 방주를 해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최대한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얼굴은 창백하게 탈색이 된 담수련을 본 백천학은,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는지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꺼냈다.


“제 분석에 따르면 방주님께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무림인들은 최소한 다섯 명이 있습니다. 지금 누가 불러서 갔는지는 모르지만, 저를 놔두고 갈 정도면 굉장한 위험을 감지하고 간 것일 겁니다.”


담수련이 말한 최소한 다섯 명이라면 세 명의 무황과 측천무후궁의 궁주 그리고 혈교의 교주를 말하는 것임을 백천학은 알 수 있었다.


“담 군사님의 분석이 정확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무공에 대해서는 제가 더 분석을 잘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악 방주가 곧 무사히 돌아올 것이란 겁니다.”


백천학의 말에 담수련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말씀은 제게 큰 위로가 되네요. 사실 제가 처음 백 공자님을 뵈었을 때,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믿을 만한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악 방주께서도 공자님께서 공명정대하신 분임이 확실하다고 하시더군요.”


“처음 보았을 때 마차 안에서 잠깐 스친 것뿐인데 좋게 보셨다니 감사하군요.”


“전 악 방주님과 백 공자님께서 향후 안전하고 평화로운 무림을 만드는 데 서로 큰 힘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믿어요.”


“제가 보기에는 담 군사님께서 더 큰 힘이 되어 주실 것 같은데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담수련의 모습을 주시하던 태극검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악불군이 떠나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흔들리던 담수련의 기에서 강한 냉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네? 저렇게 극단적으로 변할 수가 있나?’


태극검자는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무당에서 기에 대한 연구를 상당히 많이 한 그였다.


“담 군사.”


“예.”


“결례 같지만, 혹시 오음절맥을 가지고 계신 거요?”


담수련도 자신의 몸이 갑자기 차가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강호에 나와 제가 오음절맥인 것을 알아보신 분은 몇 분 안 되시는데, 어르신께서는 의술이 능통하신 것 같네요?”


“정말 오음절맥이란 말입니까?”


태극검자의 반문에 안색이 확 굳어 버린 사람은 백천학이었다. 절대 고칠 수 없는, 그리고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약관 이상은 살 수 없다는 불치의 병.


‘담 소저가 오음절맥이라고…….’


백천학은 가슴이 아파 옴을 느끼자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안정을 취했다.


“맥을 한번 잡아 봐도 되겠소?”


태극검자의 말에 담수련은 스스럼없이 팔을 내밀었다.


“허허…… 이런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이라니?”


태극검자가 맥을 잡아보고자 했던 것은, 악불군이 있는 동안 그녀에게서 냉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나이가 열아홉이니 이제 시간이 별로 안 남은 모양이네요?”


“빈도가 신의는 아니지만 기에 대해서는 제법 알고 있소이다. 담 군사의 오음절맥은 전혀 악화되지 않았소이다. 절맥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약해지는 법인데, 뭔가에 의해 보호를 받은 것 같소이다.”


“제가 빙설초를 먹어서 그런 것 같네요.”


‘빙설초가 음공(陰功)에 특효약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오음절맥까지 보호하지는 못하는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그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담수련의 기에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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