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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443화 (443/472)

<천검지애 443화>

443화. 묘수(1)

태극검자는 담수련의 눈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악불군이 서 있었다.

“아가씨, 다행히 많이 늦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악불군 역시 그가 그렇게 떠나감으로써 담수련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를 능히 짐작한 듯, 정말 빨리 돌아온 것이다.

‘이런 일이……. 사람의 병을 마음으로 고칠 수도 있다는 말이 정녕 사실이었구나.’

인사하는 악불군을 보자마자 완연하게 변해 가는 담수련의 기를 느끼며 태극검자는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 확신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백천학은 악불군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자, 사안이 다 끝난 것은 아님을 느꼈다.

“아가씨를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호라는 말을 듣기에는 한 것이 너무 없어서 좀 민망하군요. 그럼 이제 갑자기 그렇게 나가셔야 했던 이유에 대해 저희들에게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담수련 역시 절대로 자신을 두고 갈 리 없는 악불군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조금 전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기를 감지했습니다. 마치 제가 당장 가지 않는다면 구강포의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것 같았습니다.”

“……지금 구강포에는 악 방주와 공자님은 물론 천호방도들과 공자님이 데리고 온 영웅용단 오십여 명이 와 있소이다. 거기다 천 명은 족히 되는 무림인들까지 있는데,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테극검자도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구강포에는 태양천주를 죽인 악불군과 천제무황이 자신과 거의 비숫한 수준이라고 극찬한 백천학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악불군이 그렇게 달려가게 할 정도의 두려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태극검자의 말에 악불군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달려간 곳은 구강포 외곽의 험준한 산속이었습니다. 거리로 따지만 거의 한 마장 이상이었지요.”

“설마 그 거리에서 악 방주께서 놀랄 정도의 기를 보냈다는 말입니까?”

태극검자는 정말 믿기 어렵다는 듯 다시 물었다.

한 마장 밖에 있는 고수의 기를 감지하는 것은 평범한 고수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지만,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을 보유하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 마장 밖에서 특정인만이 감지하도록 기를 발산했다는 것은 박학다식하고 경험이 많은 태극검자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혈우대마종이라고 하더군요.”

순간 모두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극검자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하며 반문했다.

“혈우대마종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혈교의 교주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느껴지는 강함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가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네 명의 무황과 무림이 고르고 고른 백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합공하여 간신히 제거한 것으로 알려진 절대마종의 재등장은 방 안을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가장 먼저 상황 정리에 들어간 담수련이 입을 열었다.

“악 방주님.”

“예, 아가씨.”

“그와 싸웠나요?”

“싸우지 않았습니다.”

“만약 악 방주님께서 싸웠다면 어찌 됐을 것 같나요?”

악불군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판단이 안 되어서였다.

백천학과 태극검자도 담수련의 질문에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마…… 그가 저를 죽이려고 했다면 무사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순간 담수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에게 악불군이 죽는다는 것은 그녀 자신의 죽음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지금 혈교에서는 악 방주님이 눈에 박힌 가시 이상으로 없애고 싶을 텐데, 왜 그냥 보내 준 겁니까?”

혈우대마종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계속 침묵하고 있던 백천학이 반문했다.

“사실은 맹주님의 허락을 받은 후, 공자님께 의논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으니 무조건 맹주님의 허락을 받아 낼 수 있도록 공자님께서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악불군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혈우대마종에게 보였던 종이와 똑같았다.

“우선 읽어 보십시오.”

종이를 다 읽은 백천학의 표정은 혈우대마종과는 좀 달랐다. 혈우대마종이 매우 흥미롭게 봤다면, 백천학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악 방주, 잘못하면 무림의 수많은 고수들이 죽습니다.”

“그가 혈우대마종이 맞다면 고수들이 안 죽을까요? 백 년 전에는 홀로 전 무림을 상대로 엄청난 혈겁을 일으켰던 자입니다. 지금은 더 강해졌을 것이고, 더욱이 혈교라는 거대한 전력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전쟁이 벌어진다면, 중원 무림인들은 반이 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예상보다 더 강하다면 아예 무림인들의 씨가 마를 수도 있겠지요. 거기다 우리에게는 측천무후궁이라는 막강한 또 다른 적이 있습니다.”

“혈우대마종은 승낙을 했습니까?”

“계획이 완성되면 연락을 주기로 했습니다.”

백천학은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를 태극검자에게 건넸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백천학이 이러는지 궁금했던 태극검자는 황급히 종이에 적힌 계획을 읽더니 얼굴이 창백해졌다.

“악 방주, 지금 이 계획을 누가 만든 겁니까?”

“제가 만들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대답하기 전에 재빨리 나섰다. 계획이 실패했을 경우 악불군을 책임에서 빠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닙니다. 제가 만들고 담 군사님께서는 조언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런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무너뜨렸다. 잘못될 경우 담수련과 자신이 같이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였다.

둘의 모습을 보던 백천학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 계획에 저도 동참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공자님!”

태극검자가 깜짝 놀라 불렀지만 백천학은 손을 들어 말을 막으며 부언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천년마교의 후신인 혈교와 측천무후궁까지 무림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명분을 따지는 무림맹에서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하지만 맹주단에서 밀어붙이고 악 방주님께서 군소 방파들을 설득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잠시 말을 멈춘 백천학은 모두를 한 번 보고는 결단한 듯 말을 이어 갔다.

“맹주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 계획을 짜는 데 저도 동참했다고 해야만 가능합니다.”

말이 맹주단이지, 결국은 천제무황을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주도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공자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상대가 혈우대마종이라면 그가 영웅대회의 최종 승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혈교는 공인을 받게 되고, 예전 천년마교처럼 혹세무민하며 천하를 혼돈에 빠지게 할 경우 막을 명분마저 잃습니다. 측천무후궁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측천무후궁주가 무림십왕에 봉해진다면 그들이 그동안 무림에 행해 온 모든 악행들을 징치할 방법이 없습니다.”

태극검자의 말에 담수련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악불군과 이 계획을 짤 때, 명분은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에는 악불군이 그들을 모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주원장은 영웅대회를 생사결로 치르려고 하고 있으니, 대회를 빙자해 악불군이 이들을 죽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혈우대마종의 등장으로 그녀는 갈등에 휩싸였다.

“악 방주님, 이 계획은 혈교의 교주가 혈우대마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짠 계획입니다. 상황이 변했으니 계획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담수련의 말에 모두는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특히 악불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계획의 전반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백천학과 태극검자가 이번에는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지금껏 전 담 군사님의 의견에 반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반대를 하겠습니다.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휴우~ 알았습니다. 방주님께서 그렇게 결정을 하셨다면 따라야지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수긍했다. 악불군이 자신의 말을 단번에 거절한 것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악불군이 자신의 주장을 얘기한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하나, 그녀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미안한 눈으로 담수련을 잠시 살핀 악불군은 이번에는 백천학을 보며 말했다.

“이 일은 또다시 중원에 살육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입니다. 제가 무림맹에 도착하기 전까지 백 공자님께서 꼭 허락을 받아주십시오.”

부탁임과 동시에 계획을 만드는 데 동참을 인정한 말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중차대한 결정인지라 설득하려면 시간이 촉박할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백천학은 일어서며 포권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악불군도 일어서더니 백천학의 손을 꼭 잡았다.

무림인들은 서로를 완벽하게 믿지 않으면 절대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 둘이 거리낌 없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다음 중원의 절대자가 될 두 사람이 동지애로 뭉쳤으니, 더 이상 내가 말릴 명분이 없구나.’

이번 계획이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태극검자는, 둘이 손을 잡는 모습을 감격에 찬 눈으로 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떤 계획이기에 모두가 이렇게 비장한 것일까…….

* * *

“천화궁주가 서찰을 올렸습니다.”

측천무후는 묘묘선자가 서찰이 놓인 쟁반을 바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아래에서 올라온 서찰이나 정보는 묘묘선자가 모두 읽어 본 후, 자신의 분석을 먼저 말하고 서찰을 올리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었다.

“읽어 보았느냐?”

“예.”

“직접 보고 결정하라는 말이구나?”

“분석은 했습니다. 다만 궁주님께서 결정을 먼저 하신 후, 제 분석을 듣는 것이 더 나을 듯싶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천화궁주의 서찰입니다.”

쟁반위에는 두 장의 서찰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측천무후는 오른쪽 서찰부터 집어 들었다.

“금후가…… 악불군에게 죽었다고?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죽였다는 소문이 혈해사계로부터 나온 것이 며칠이나 지났다고, 절강에 있는 금후가 어떻게 악불군에게 죽는단 말이냐? 거리와 시간상 가능한 일이 아닌데?”

“태붕이 죽고 보타검각이 쉽게 뚫린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악불군에게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영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럼 가능하겠군. 갈수록 흥미로운 자란 말이야. 악불군이 내게 서찰을 보냈다고 적혀 있는데, 남은 서찰이 바로 그것이냐?”

“예.”

측천무후는 왼쪽에 있는 서찰을 들어 펼쳤다. 그리고 곧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이자가 나를 성후나 금후 정도로 본 모양이구나. 감히 나를 도발하다니. 흥미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기까지 하구나.”

아주 기분이 좋아야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 정도인 측천무후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시립하고 있던 능파선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묘묘.”

“예, 궁주님.”

“넌 내가 어쩔 거라고 생각하느냐?”

“본 궁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곳곳에서 본 궁의 정보망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적에게 본 궁의 위치가 발각된 듯싶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궁주님께서 직접 천하를 접수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이제 타의건 자의건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보고 이자의 계획에 동조하라는 것이냐?”

“궁주님보다 강한 자가 있다면 그 계획에 동조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천하에 누가 있어 궁주님을 이기겠습니까?”

“묘묘가 오랜만에 제대로 분석했구나. 악불군은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고 이 계획을 획책한 것 같지만, 그게 얼마나 큰 오판인지 곧 알게 될 게다. 분열과 이간질만으로는 여인천하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육백 년간의 싸움으로 판명이 났다. 우선 무림부터 장악한 후에 천하를 도모한다.”

측천무후는 이미 계산이 끝난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데 악불군이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그거야, 그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 합의를 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 우선 나는 동의한다고 전해라.”

“존명!”

묘묘선자가 나가자 측천무후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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