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44화>
444화. 묘수(2)
“소군, 난 좀 불안해.”
백천학이 떠나고 하룻밤을 더 구강포에서 머문 악불군 일행은 아침이 되자 배에 올랐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십니까?”
“혈우대마종이 소군보다 강하다고 했잖아?”
“예, 제가 느끼기에 분명 저보다 강했습니다.”
“그럼 소군이 오히려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건 내 계획엔 없는 변수야.”
“아가씨, 제가 지난 시간 아가씨와 강호를 주유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제게 죽은 사람들이 모두 무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싸운 자들이 무림인들이니 죽은 자들 또한 무림인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도 무림인이라는 말입니다.”
순간, 담수련은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챈 듯 표정이 변했다.
“…….”
담수련이 답을 하지 않자, 악불군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잠룡세가에 거둬지지 않았다면 전 이미 굶어 죽었거나, 아직도 여전히 거지였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아가씨 덕에 과분할 정도로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남자로 태어나 이 정도 명성을 얻었으면 천하를 위해 어느 정도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담수련은 자신의 손을 잡은 악불군의 손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에서 그녀의 손을 잡거나 심지어 안고 몸을 날리기도 했지만, 이렇듯 대화하는 중에 악불군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난, 소군이 위험해지는 것이 너무 싫어.”
“저도 아가씨께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아가씨와 아직 살아 있는 잠룡세가의 식솔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태양천주를 죽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아성을 쌓아야 합니다.”
“혈우대마종과 싸웠다면 무사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아성을 쌓아?”
“무사하기 어렵다고 했지, 진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말이야?”
“강호에 나와 적들과 대적하면서 쉽게 이긴 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가주님께서 제게 철포삼을 시술해 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전 이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역경을 딛고 전 아직 살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가씨와 숨어 사는 것을 택하지 않은 이상, 어떤 위험이든 최선을 다해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담수련은 악불군이 더 이상 그녀만의 악불군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 소군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 만에 하나 소군이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으면 돼.’
담수련도 자신이 나가야 할 길이 확실하게 무엇인지 결정한 듯 미소를 지으며 악불군의 손을 꽉 잡았다.
* * *
“유백온.”
“예, 황상.”
“금의위 장령 오선두의 보고서는 읽어 봤느냐?”
“악 왕야의 서찰과 비교하면서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럼 빨리 보고해야지, 짐이 찾을 때까지 보고를 안 한 이유가 뭐냐?”
“보고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분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판단이 나오면 즉시 보고할 생각이었습니다.”
새벽이 되자마자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유백온은 주원장의 말에 이미 예상했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선두의 보고서에 적혀 있기를 악불군이 절강에서는 거의 신인에 가까운 존경을 받는다고 하던데, 천호방 총단이 있는 항주과 황도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안 드느냐?”
“지금 무림인들 중 황상의 뜻을 가장 잘 따르는 분이 악 왕야입니다. 만약 악 왕야가 없었다면 다른 무림 세력이 절강을 차지했을 것인데, 그것이 더 위협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양천주까지 죽였다고 하던데,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무공이 아니더냐?”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구문제독부의 십만 정예군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황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가 절강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천호방이 절강을 장악한 이후, 봉물이 도적 떼의 습격을 받거나 물자의 이동이 막힌 적이 없습니다. 나라의 기틀을 잡아 가는 지금, 악 왕야의 존재는 황상께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주원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원래 주원장은 악불군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를 이용해 무림을 견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명성이 너무 높아지면서 백성들이 그를 따른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자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유백온의 말도 타당해 보였다.
하나, 주원장은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원했다.
집착에 가까운 권력욕과 의심, 그리고 패도적인 그의 성격, 거기에 비천하게 태어난 태생의 열등감까지 합쳐져 그는 유례없는 패웅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귀족이었던 신하들이 지금은 자신의 힘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목숨을 바쳐 자신을 황제 자리에 올려 준 공신들조차 그는 믿지를 않았다.
하물며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무림을 그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그의 성정상 용납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그는 야인 시절, 무림인들에게 치욕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유백온.”
“예.”
“짐이 당장 악불군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쯤에서 힘을 좀 빼야겠다 생각한 것뿐이다.”
“제가 만나 본 악 왕야는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상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다면 어느 정도 손은 봐야겠지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냐?”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결론은…….”
“확정이고 뭐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그냥 말해라!”
잠시 머뭇거린 유백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악 왕야께서 보내신 계획서는 읽어 보셨습니까?”
“읽어 봤다. 상당히 치밀하게 짠 것 같긴 하던데, 혈교의 교주와 측천무후궁의 궁주까지 영웅대회에 참가하게 한다는 것이 가능은 하겠느냐?”
“그냥 단순히 서열을 매기는 비무라면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그 싸움으로 중원 무림의 판도를 결정한다면 그들이 참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복안이 있는 것이냐?”
“지금 혈교와 측천무후궁이라는 반역도들이 암중에서 암약하고 있고, 마도와 사파는 황실에게 언제나 비협조적이었습니다. 그나마 형식적이나마 황실에 충성하는 정파가 있지만 그들 또한 관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하여 언제나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무림을 손보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니더냐?”
“하나, 송조의 교훈을 생각하면 무작정 무림을 없애는 것은 황실의 안위까지 흔들 수 있습니다.”
“흠……. 솔직히 그게 지금 가장 큰 걸림돌이다.”
“황상의 뜻을 거역할 수 없을 정도만 무림을 약화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느냐?”
“악 방주의 계획은 제가 볼 땐 무림의 혈겁을 막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황상께서 무림인 간의 세력 싸움으로 나라에 혼란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염두에 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계획을 이용해서 무림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이냐?”
“어차피 영웅대회의 주최자는 황상이십니다. 그 말은, 싸울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이 황상께 있다는 것이지요.”
순간 이해를 못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던 주원장은 곧 알아들었는지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역시 유백온이구나. 맞아. 짐이 죽이고 싶은 놈들을 서로 싸우게 하면 되겠구나.”
“무림을 단결시킬 지도자급의 인물들이 이번 대회를 통해 제거된다면 무림인들은 구심점을 잃고 황상께 충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두 대회에 참가하도록 짐이 오히려 장려해야겠구나?”
“예, 그리고 비무 장소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어디로 말이냐?”
“제가 생각해 둔 장소가 있습니다.”
무림을 정비할 요량으로 공표된 영웅대회가 각 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서로 죽이려는 자들 간의 동상이몽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예전, 제갈우명을 만나기 위해 무림맹에 도착했을 때, 악불군과 담수련은 숨어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천호방의 깃발이 달린 배가 나타나자 무림맹 총단이 있는 승룡도의 주위를 경계하던 무림맹의 순시선들은 일제히 자리를 비켜 주었고 선두에 서 있는 악불군을 향해 모두 포권을 했다.
태양천주를 죽이면서 악불군은 무림맹의 무사들에게도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미 주의를 받았는지, 배가 포구에 도착한 후 악불군과 담수련이 내렸지만 그들에게 다가와 용건을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맹의 간부들조차 외부로 나갔다 귀환할 때면 적어야 하는 명부조차 내밀지 않았다.
천호방도들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무림맹 정문을 통과한 악불군은, 제갈우명이 직접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 포권을 했다.
“제갈 대협께서 어찌 직접 나와 계십니까?”
“천하의 천호검신이 무림맹을 방문했는데, 저 정도는 마중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학후배입니다. 어쩌다 명성을 좀 얻었지만 감히 제갈 대협의 마중을 받을 정도의 인물은 못 됩니다.”
악불군의 겸손한 말에 제갈우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영웅이요 하고 아무리 외쳐도 주위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영웅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난 영웅이 아닙니다 하고 아무리 외쳐도 모든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인정하면 영웅인 거지요. 이미 악 방주님은 영웅이십니다. 맹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따라오십시오.”
제갈우명의 말에 악불군보다 담수련의 가슴이 더 벅차올랐다. 악불군을 영웅을 만들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다.
제갈우명의 안내로 들어간 정청에는 승도속의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무림맹의 맹주단과 수석 장로들이었다. 그가 예전에 만났던 태웅왕과 파금왕도 보였고, 현기수사와 함께 서 있던 백천학은 악불군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악불군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백천학이 설득에 성공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서자, 커다란 덩치에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위맹한 모습의 노인이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현 무림을 완전히 들썩거리게 만든 장본인이 이렇게 젊다니, 나이만 먹은 내가 부끄럽구먼. 난 한세도왕이라고 하네. 말을 놓아도 되겠지?”
“당연하십니다. 편안하게 대해 주십시오.”
“맹주님께서 곧 나오실 거네. 잠시만 기다리게.”
의자가 있음에도 모두 서 있던 것은 천제무황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너무도 공손한 악불군의 모습과 말투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한세도왕이었다. 무황들도 젊을 적에는 얻지 못했던 엄청난 명성을 얻은 악불군이 당연히 교만한 모습을 보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태웅왕이 자네를 보고 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니, 이유가 있었구먼.’
한세도왕은 자신도 모르게 백천학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눈은 다시 현기수사에게 향하며 혀를 찼다.
천무성궁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긴 해도 끝까지 악불군을 견제하려고 했던 그는, 이젠 모든 것이 틀렸음을 느낀 듯 고개를 숙인 채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림의 최고 원수인 태양천주를 죽인 이상, 이젠 악불군이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는 증거를 찾는다 해도 감히 그것을 내밀며 악불군을 규탄하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악 방주님에 대해 대부분의 원로들이 호의를 보이고 있으니, 오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갈 것 같군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무게를 잡던 원로들이 악불군을 편한 얼굴로 주시하는 것을 보자, 제갈우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맹주단과 원로들 그리고 군사전 사람들까지 모여 이번 영웅대회에 대한 계획을 보고 밤새 갑론을박을 벌였습니다. 결론을 도출한 것이 반 시진도 채 안 됩니다.”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지요?”
“그건 맹주님이 오시면 얘기하겠습니다.”
제갈우명의 말에 알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악불군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굳게 닫혀 있는 문 밖에서 엄청난 기의 소유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역시 무황 소리를 듣는 이유가 있구나…….’
그리고 곧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중원 정파의 지휘자이자 절대자였던 천제무황과 무림의 새로이 등장한 젊은 절대자, 악불군의 첫 대면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