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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445화 (445/472)

<천검지애 445화>

445화. 영웅대회(1)

문이 열리자 모두가 허리를 살짝 굽히며 예를 취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각 문파의 장로급의 원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지금 그가 얼마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공을 떠나 몸 전체에서 절대자의 기도가 풀풀 넘치는구나……. 확실히 나와는 그릇 자체가 다른 분이야.’

악불군은 ‘역시!’하는 감탄의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강호 출입을 극도로 자제하던 천륭검가가 구문황대에 이르러 혈무대마종을 상대하면서 급격하게 이름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천무성궁은 그 전에 이미 무림에 최고의 무가로 우뚝 솟아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절대자의 교육과 수련을 받으며 커온 천제무황은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천제무황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향해 포권을 했다. 이내 그의 눈은 자신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있는 악불군과 담수련에게 향했다.

‘허허허~ 어린 나이에 저런 자연스러움이라니…….’

천제무황은 악불군이 그를 보며 느꼈던 감탄과는 또 다른 의미로 탄복하고 말았다.

천제무황이 보이는 압도적인 절대자의 기도와 달리 악불군의 몸에서는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기도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교육과 수련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천제무황은 악불군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모두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림인들은 손을 잡는 것이나 맥문을 상대에게 맡기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 심지어 그와 비슷할 정도로 금기시하는 곳이 견정혈이 있는 어깨였다.

견정혈이 제압당하면 온몸이 마비되고, 내공의 원활한 움직임에 심대한 방해를 입힐 수 있었다.

특히 손이나 맥은 내공이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타격을 주기 어려운 반면, 견정혈은 약한 내공으로도 효과적인 타격이 가능하기에 사혈(死穴)과 맞먹을 정도로 중요시하는 혈도였다.

그런 견정혈이 있는 어깨를 천제무황 같은 초절정 고수가 손을 댔으니 모두의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악불군과 천제무황은 오늘이 첫 대면이었다.

하나, 그런 이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악불군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는 듯 목례를 했고, 천제무황은 가볍게 토닥거리고는 손을 뗐다.

가벼운 동작들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악불군의 담대함과 천제무황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역시, 제가 따를 수 없는 그릇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백천학은 태극검자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태극검자는 차마 답할 수가 없었다. 인정한다는 듯 말은 했지만, 천제무황과 마찬가지로 절대자의 교육을 받아온 백천학으로서는 약간은 자조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착석하고 제갈우명이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정황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계획을 수립하고 만든 장본인이었고, 다른 원로들 역시 이미 밤새 의논해서 결론까지 낸 상황인지라 세세한 설명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악 방주.”

“예, 맹주님.”

“구천마황과 혈해사황에게는 이미 서찰을 보냈다고 하던데, 참가할 것 같으냐?”

“그분들도 명예를 중요시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참가하지 않는다면 십왕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할 터이니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불군의 답에 모두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천제무황의 말도 우습게 여기는, 마도와 사파의 절대자인 그들에게 직접 서찰을 보내고 종용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악불군의 영향력이 천제무황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 *

회의가 끝난 후, 제갈우명은 악불군과 담수련을 천제무황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집무실 안에는 이미 천제무황과 백천학이 와 있었다.

“앉거라.”

“감사합니다.”

천제무황의 말에 악불군과 담수련은 공손히 예를 갖추고는 자리에 앉았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묻겠다. 혈우대마종을 본 것이 확실하냐?”

“그분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해, 확실하다고 답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하나, 그분이 스스로 혈우대마종이라고 했고, 풍기는 기운은 그분이 아니면 어렵다 느꼈습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거라.”

천하에서 혈우대마종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몇 명의 인물 중 한 명이 그였다. 그리고 악불군의 묘사를 듣자 굳어진 표정으로 탄식을 내쉬었다.

“그때, 시신을 반드시 찾아냈어야 했는데……. 네가 본 얼굴은 좀 늙기는 했지만 혈우대마종이 맞는 것 같구나.”

그 한마디에 악불군은, 천제무황이 이번 계획을 받아들인 이유엔 혈우대마종의 등장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혈우대마종은 무림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천년마교가 교세를 넓히는 것을 묵인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너는 천년마교가 어떤 폐해를 끼쳤는지 알기는 하느냐?”

“중원이 최고조로 분열되어 있던 전국시대와 오호십육국 시대가 모두 천년마교 때문에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인정해 줄 때마다 천하는 큰 홍역을 치르곤 했다. 그런데 또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는데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혈우대마종과 정면으로 대적하기에는 아직 무림은 약합니다. 일 갑자에 걸친 원나라 시절을 거치며 무림은 피폐해졌고, 아직도 제대로 재건이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저는 우선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를 받아들여 강대강 대결 상태를 끝내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곪은 데를 놔두고 미봉책을 쓰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

“아직 체력이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곪은 곳을 헤집으면 아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 미봉책이나마 곪은 데를 약으로 덮고, 건강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견딜 체력이 확보되면 그때 곪은 곳을 도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혈우대마종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하던데, 그가 무림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느냐?”

“무림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림을 제압할 생각일 것입니다.”

“맞다, 그는 이번 영웅대회를 통해 정파의 고수들을 편히 제거할 생각일 것이다. 솔직히 일대일로 그를 이길 사람이 천하에 있기나 할지 모르겠구나?”

천제무황은 예전 그가 싸웠던 혈우대마종의 모습을 떠올리자 한숨이 절로 나옴을 느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황상께 부탁해 혈우대마종과 제가 가장 먼저 싸우도록 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네가 혈우대마종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이긴다면 정말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진다 해도 상당한 부상은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다음은 무황 어르신들이 맡아 주셔야 합니다.”

“차륜전으로 나가자는 것이냐?”

“그 방법 말고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천학이에게 혈우대마종에 대한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무림맹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혈우대마종의 이름이 거론된다면 당장 천하에 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천마황이나 혈해사황은 이번 대회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측천무후 역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혈우대마종에 대한 사실은 영웅대회가 시작된 이후에나 알게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천제무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악불군의 계획은 잘못하면 중원의 고수들이 한순간에 몰살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른 차선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은 이제 간신히 재건을 시작한 무림 정파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혈우대마종이 예전보다 더 강해졌다면 타격 정도가 아니라 정파 무림의 괴멸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좋다. 네 말대로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니, 그렇게 하자.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무엇이신지요?”

“혈우대마종과 결투는 노부가 가장 먼저 하겠다.”

“맹주님께서는 현 무림의 구심점이십니다. 맹주님께서 먼저 싸우는 위험을 감수하시는 것은 무림에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이미 살 만큼 살았다. 이제 무림은 너와 천학이 같은 젊은 아이들이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난 아직 혈우대마종과 결판을 보지 못했지 않느냐? 가능하다면 노부가 혈우대마종과 동귀어진이라도 할 것이니, 다음은 너희들이 맡거라.”

“……어르신, 그건…….”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번 계획은 내 선에서 비틀어 버릴 수도 있다.”

악불군은 백천학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천제무황은 할아버지가 아니던가…….

그의 표정도 상당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제가 실력만 된다면 가장 먼저 싸우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전 할아버님을 믿습니다. 이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절대자의 교육을 받은 그답게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 짓고 있었다.

손자인 백천학까지 그렇게 말하자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게 된 악불군은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를 깊이 구부리며 말했다.

“맹주 어르신께서는 천하의 귀감이 되실 것입니다.”

* * *

갑자기 공표된 무림맹의 발표로 천하는 흥분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무림인에게 싸우지 않고 봉해진 무림십왕은 의미도 없고 자격도 없다며, 천제무황과 악불군이 십왕을 반납하고 영웅대회에 직접 참가하겠다고 한 것이다.

더욱이 십왕만 뽑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하제일인까지 가리겠다고 발표를 했다.

일반 무림인들은 평생, 절정급 고수의 결투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무황과 검신이 직접 나오는 비무라니……. 무림이 흥분의 도가니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소문이 퍼졌다. 구천마황과 혈해사황까지 십왕을 반납하고 영웅대회에 참가하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도의 최고수들까지 모두 대회에 참가한다면, 이건 무림 천년사에 남을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또 다른 소문이 뒤를 이어 천하를 강타했다. 혈교의 교주와 측천무후궁의 궁주까지 참가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바야흐로 무림의 모든 역량과 화제가 정지되고, 영웅대회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대회가 몇 달이나 남았음에도 무림인들의 행렬이 태호로 향하기 시작했다.

영웅대회의 비무장소가 태호로 결정이 났기 때문이었다.

* * *

무림맹에서 돌아온 악불군은 한 달이 넘도록 연공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담수련과 강호행을 하면서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만의 수련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혈우대마종을 만난 후, 악불군은 자신의 무공에 대한 전체적인 점검이 필요함은 절감하고는 총단에 도착하자마자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예전 담무룡과 함께 수련을 했던 연공관은 은밀하면서도 여간한 충격에는 까딱도 하지 않도록 튼튼하게 지어져, 수련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동안 악불군이 익힌 무공들은 한마디로 잡동사니 같았다.

육관에서 익힌 무공들은 사파가 사용하는 무공들이 대부분이었고, 잠룡세가 무고에서 얻은 무공은 정파의 무공에 가까웠다.

이후, 담무룡이 수련을 허락한 연공관 내의 비급들은 마도의 무공들이 태반이었다. 거기다 강호행 중에 얻은 배교비전은 사파와 마도의 무공보다 더 사악한 무공들이었다.

그 이질적인 무공들을 그가 아무 문제없이 익힐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천륭검보가 있었다.

이후, 강호행 중에 얻은 여러 깨우침과 실전 능력 그리고 무당과 소림에서 얻은 뜻밖의 기연까지 가미되면서 그는 급속도로 강해졌다.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내가 익힌 무공 중, 가장 살상력이 높은 초식들을 모아서 단번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초식을 만들어야 해.’

자신보다 내공이 강한 혈우대마종을 만난 후, 악불군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최대한 방어를 해내다가 기회를 잡아 단번에 그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눈을 감은 채, 모든 무공들을 머리로 수련하기 시작한 악불군은 상상의 비무 삼매경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던 중…….

‘침입자가…… 있어?’

한창, 수련을 이어 가던 악불군은 눈을 천천히 뜨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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