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46화 (446/472)

<천검지애 446화>

446화. 영웅대회(2)

혈우대마종을 만났을 때도 악불군은 놀라기는 했지만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긴장하는 경우는 오로지 담수련이 그의 옆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런 그를 담수련 없이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비밀 연무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담무룡이었다.

악불군을 몸을 일으키더니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 비밀통로를 통해 나타난 한 인물에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수련이는 세가 안에 있는데, 너는 계속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고 와 봤더니 역시나 여기 있었구나.”

담무룡은 언제나 그가 앉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악불군이 수련할 때, 앉아서 보며 교정해 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거만한 자세를 취한 담무룡은 악불군을 보며 다시 말했다.

“감히 내가 올려다보게 할 것이냐!”

“죄송합니다.”

악불군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예전에 언제나 담무룡 앞에서 하던 자세였다.

악불군이 무릎을 꿇자,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담무룡이었다.

만약 자신이 악불군의 위치였다면, 이미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 판단하고 그를 죽였을 확률이 높았다.

사실 무력으로도 이미 담무룡을 넘어선 지 오래이지 않는가.

“나를 거역한 자들의 말로는 너도 잘 알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잠봉밀과 잠룡밀의 간부들이 모두 나를 배신했더구나? 마음 같아서는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수련이를 봐서 참았다.”

담무룡은 죽음을 가장해 측천무후궁의 추적을 피하면서 예전 잠룡세가의 수하들을 규합하려고 했다. 하지만 발 빠른 담수련의 대처로 모두 마음이 변해 버린 상황이었다.

“어차피 잠룡밀과 잠봉밀은 소가주님과 아가씨께 넘기신 세력입니다. 배신이 아니라 아가씨의 명을 따른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공손히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

“가주님께서 분명 제가 혼자 있을 때 찾아오실 거라면서, 아가씨께서 전해 주라고 한 서찰입니다.”

담무룡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서찰을 펼쳤다. 그리고 곧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지어 서찰을 잡은 손마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는 듯했다.

“너도 이 서찰을 읽었느냐?”

“전 보지 않았습니다.”

“보지 않았다니 다행이구나. 수련이가 내게 이런 글을 남기다니, 솔직히 충격이구나.”

그의 자존심을 모조리 뭉개버렸다고 할 정도로 담무룡이 그동안 행한 잘못과 더 이상 담무룡이 세상에 나서서는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적어 놓은 담수련의 서찰은 그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담무룡은 서찰을 손으로 비벼 가루로 만들더니 물었다.

“대공을 네가 죽인 것이 사실이냐?”

“예.”

“혼자서 싸웠느냐?”

“예.”

“이번 영웅대회에 혈교의 교주와 측천무후궁의 궁주가 출전하느냐?”

“출전하겠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서찰에는 혈교의 교주가 혈우대마종이라고 했는데, 사실이냐?”

“맞는 것 같습니다.”

“허허~ 내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라, 내 시대는 아예 온 적이 없었구나.”

잠시 생각하던 담무룡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측천무후에게 패한 후, 다각도로 당시 상황을 반추했다. 하지만 또다시 싸운다 해도 역시 일 초를 견디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상대가 누구든 나를 일 초 만에 죽일 수 있는 자가 존재하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턱이 없겠지. 수련이에게 전해라. 뜻을 알았으니 우선은 자중하겠다. 허나, 나 담무룡은 포기란 없다. 대회에서 죽지 말거라.”

말을 마친 담무룡은 미련은 없다는 듯, 그대로 비밀 통로로 나가 버렸다.

‘아가씨께서 무슨 말을 쓰셨기에 가주님께서 저렇게까지 낙담하신 거지?’

처음 본 담무룡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마음이 안 좋은 듯 침통한 표정을 하던 악불군은, 잠시 후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 수련을 시작했다.

* * *

악불군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와중, 다른 문파들도 봉문 수준으로 활동을 줄이고 영웅대회에 자파의 제자들을 출전시키기 위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십왕에 뽑히는 것은 둘째 치고, 참가조차 못 한다면 문파의 명성이 곤두박질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영웅대회 참가 신청서가 각 문파에 전해지며 무림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명성이 높은 문파에는 예비 비무를 거치지 않고 본 비무로 곧장 갈 수 있는 신청서가 세 장에서 열 장까지 규모에 맞춰 전해졌다.

더 많은 수가 출전하고 싶으면 예비 비무 신청서에 기재한 후, 한 달 전에 태호에 도착해 예비 비무를 먼저 해야 했다.

예비 비무 신청서는 관부와 현청에 가면 누구라도 얻어 신청할 수가 있었다. 떠돌이 낭인이라도 신청은 가능했다. 다만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예비 비무조차 생사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명의 위협조차도 무림인들의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미 예비 비무 신청서를 제출한 무림인이 기천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작될 때쯤이면 그 수는 몇 배로 불어날 수도 있었다.

* * *

“이건 비무대가 아니라 함정 아닙니까? 아무리 무림인이라 해도 매우 위험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공사 진행 상황을 유백온과 함께 순시하던 구문제독부 천부장 장군인 항창권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비무장은 태호의 호변에서 시작해, 천우산으로 이어진 협곡을 따라가며 만들어지고 있었다.

협곡을 따라 이어진 절벽 위에는 비무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될 예정이었다.

“십왕은 왕야로 칭해지는 대단한 지위를 갖게 되지 않는가? 그만큼 최소한 이 정도는 어려워야지, 쉽게 싸움에서 이겼다고 왕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유백온은 회심의 미소를 지며 답했다. 하지만 단지 어렵게 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거대했고, 사방에 위험 요소가 깔려 있었다.

항창권의 말대로 비무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마치 적을 죽이기 위한 함정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황상께서 직접 참관할 장소는 저곳으로 정했습니다. 다만, 황상을 보위하는 구문제독부의 장군으로서 말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이곳에 왜 황상께서 굳이 직접 오셔서 참관하시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항창권이 가리킨 곳은 협곡의 절벽 중앙으로 거대 비무장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면서도 갑작스런 시해(弑害) 시도를 방지할 수 있도록 양옆의 협곡과 거리가 좀 있었다.

“황상의 뜻인데,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참관을 유도한 것은 유백온이었다.

주원장이 아는 그냥 무림인이 아니라 진짜 강한 무림인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유백온은 주원장이 무림인들을 배척하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너무 적대시하는 것은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의 주원장에게 함부로 제언(提言)했다가는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원장이 직접 보고 결정할 수 있도록 굳이 참관을 권유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그 역시 짐작할 수가 없었다.

* * *

또다시 석 달이 흘렀다.

무림 역사상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큰 사건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용했던 천하가 드디어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예비 비무 대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비 비무의 첫 시작은 경신술 시험이었다. 하나, 그냥 빨리 달리거나 높이 뜨는 시험이 아니었다.

태호 호변에 만들어진 경신술 시험대는 무려 반 마장에 걸쳐 지어졌는데, 바닥이 온통 예리한 검과 창끝이 들쑥날쑥 높이가 다르게 박혀 있었다. 달리는 동안 내공이 부족해지거나, 실수하면 그대로 꼬챙이에 낀 닭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수시로 밑에서 창이 솟아올라 신형을 흔들었고,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도 피하거나 막아야 했다.

경신술에 여간한 조예가 없다면 통과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게 만들어진 관문이었다.

두 번째 시험은 내공 시험으로, 작은 공간에 들어간 후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바위를 두 손으로 받아 내야 했다.

거의 만 근의 무게를 지닌 바위에 떨어져 내리는 가속력까지 붙으니, 일 갑자 이하의 공력으로는 온몸이 그대로 박살이 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첫날부터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그것을 보고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예비 비무를 신청한 사람들 중에는 비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시험만으로 죽은 사람이 백 명이 넘었고, 포기한 사람은 무려 이천 명에 달했다.

예비 비무까지 간 사람들은 대부분 최소한 절정급의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중에서 또 몇 명이나 살아남아 본 비무에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 * *

정좌를 한 채 공중으로 석 장쯤 떠오른 악불군의 몸은 금빛 강기로 완전히 싸여 있었다.

그동안 보였던 금광과는 차원이 다른 완전 황금빛으로, 마치 전설의 금강불괴가 환생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천륭검보의 자세들을 공중에 뜬 상태에서 펼치기 시작하자 그의 몸 주위에 금빛 고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점점 많아진 고리는 어느덧 그의 온몸을 감싸는 것을 넘어 연무장 전체를 덮을 정도였다.

삼화취정의 경지에 세 개의 고리를 형성하고 오기조원의 경지에는 다섯 개의 고리가 형성된다는 것은 무림인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수백 개가 넘어 보이는 고리를 형성한 것은 어떤 경지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순간 악불군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악불군의 손이 빠르게 나눠지며 그 많은 고리들을 하나하나 다 잡아냈다.

이번에는 천 개의 손을 지녔다는 천수여래의 모습이었다.

천륭검보에 소림사의 기연이 합쳐지면서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무공의 탄생이 이뤄지고 있었다.

파파파파파팍!

고리를 든 손이 그의 몸 주위를 회전하며 주위를 훑었다. 그리고 아무리 강력한 수련을 하더라도 부서지지 않도록 만년한철로 둘러싸인 연무장의 벽들이 종잇장 찢어지듯 금이 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그렇게 한바탕 바람이 지나가고 모든 고리가 악불군의 몸에 흡수되면서 금광은 사라졌다.

어느새 다시 정좌를 한 악불군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더니 그제야 긴 숨을 뱉어 냈다.

“성공이다…….”

만족한 표정으로 눈으로 뜬 악불군은 기쁜 듯 중얼거렸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강력한 초식을 담아낼 수 있는 한 가지 수법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내공에는 크나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초식은 큰 진전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소림사의 천불전에서 본 천불상들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신묘함은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풀어낼 수 있을지 찾아내지를 못했는데,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초식과 천불상의 가르침을 동시에 만족하는 수법을 찾아낸 것이다.

한 초식에 상대의 모든 공격 수단을 막고 동시에 모든 방어 수단을 깨부술 초식은 없었다. 하지만 천 개의 방어와 천 개의 공격이라면 가능했다.

주위를 둘러본 악불군은 벽으로 다가가 손으로 만지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까운 곳인데 다 망가지게 생겼군. 남은 시간은 약 한 달, 그 안에 이 초식을 연달아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을 축적하는 것이 마지막 수련이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잠시 쉴 만도 했지만 악불군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연무장 중앙으로 가서 다시 정좌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혈우대마종은 너무 강한 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웅대회 개막이 한 달 남은 시점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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