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47화>
447화. 개전(1)
“아가씨, 소문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
“태호에서 예비 비무가 시작됐는데 비무도 하기 전에 죽는 자들과 포기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어서, 황상이 무림인들을 죽이려고 함정을 판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네요.”
연화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소문만은 아닐 거야.”
“그 말씀은, 황상께서 무림인들을 죽이려고 함정을 팠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거예요?”
“사실이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했다는 거야. 그런 식의 죽음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 않겠어?”
“단지 무공 시험으로만 그렇게 죽으면, 진짜 비무가 시작되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담수련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유백온은 그녀에게 자신과 직접 통할 수 있는 전서구를 건네주었다.
이후 수많은 대화를 전서를 통해 나누면서 영웅대회에 대해 의견 교환을 해 왔다. 천하인들은 모르지만, 사실 지금의 모든 상황은 담수련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어느 순간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주원장이 악불군까지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원장의 성정(性情)을 이미 짐작하고 있던 그녀는 악불군이 이룬 많은 업적들 중 상당수를 황상의 덕으로 돌려 왔다. 그럼에도 주원장은 그녀의 예상보다 더 편협했다.
유백온은 상황을 매우 에둘러 설명했지만, 그녀는 주원장이 악불군까지 토사구팽할 생각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황상께서 영웅대회를 통해 무림과 척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황실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함정 아닌 함정을 팠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지만, 담수련은 무림의 미래를 위해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소군이 얼마나 강해져 나오는가에 달렸어.’
담수련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담 군사님, 소걸아 소협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밖에서 마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요. 제가 곧 정청으로 갈게요.”
담수련은 소걸아가 정보를 가지고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는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제갈공명이라 할지라도 정보가 없으면 어떤 계획도 짤 수 없는 법이었다.
악불군이 수련하는 동안 담수련은 최대한 유리하도록 상황을 이끌어 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떤 변수가 그녀의 계획을 뒤집을지 알 수 없었다.
소걸아는 그런 그녀에게는 정말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 * *
비무장(比武場)이 있는 태호 주위는 구문제독부의 십만 병사가 완벽하게 포위한 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비무장 안으로는 본 비무에 출전하는 각 파의 고수들과 예비 비무를 통과한 무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비무를 볼 수 있는 관망장이 준비된 협곡 위의 절벽은 상당히 넓고 길게 형성이 되어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올라가기에는 장소가 좁았다.
결국 관망장도 이름 난 고수들이 아니면 근처에도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막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수들이 자연스레 뿜어내는 기를 무공이 약한 무림인들은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비무장이 잘 보이는 좋은 장소에는 이미 대문파들이 자리를 잡고 커다란 군막을 쳐 놓았다.
군막 설치 문제로 마도와 사파, 그리고 정파 간에 싸움이 날 뻔할 정도로 살벌한 상황이 여러 차례 벌어졌지만 다행히 큰 싸움 없이 정리되었다.
정파가 한쪽 협곡을 차지하고 다른 쪽은 사파와 마도가 차지하기로 암묵적인 협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각 문파를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 있는 군막들의 모습만으로도 여간한 사람들은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하나 있었다.
무림맹 군막의 오른쪽에 소림사의 군막이 쳐졌지만, 왼쪽에는 무림맹 소속도 아닌 천호방의 군막이 쳐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먼저 온 차례대로 군막을 친 것 같지만, 정파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천호방의 위상이 무림의 태산북두로 일컬어지는 소림사의 위상과 맞먹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비무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예비 비무를 통과한 무인들의 명호와 이름 그리고 소속 문파를 적은 커다란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통과한 무인들의 이름과 명호가 적힐 때면 몰려온 사람들의 함성이 한 번씩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절벽에 올라가지 못한 무림인들은 정문과 부분적이나마 볼 수 있는 태호변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영웅대회가 개최할 날이 보름밖에 남지 않자, 각 지역을 대표하는 문파의 무인들이 태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수라마전을 전멸시키고 남무림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구천마성과, 악마전을 감숙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 혈해사계가 북상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와 함께 무림인들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장대한 무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천호방에서 북쪽 성문으로 통하는 길은 모여든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였다.
드디어 악불군이 영웅대회가 열리는 태호로 출발한다는 말이 항주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천호방의 정문이 열리고 먼저 말을 탄 천호사기 일대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성민들은 길옆으로 벌어졌다.
인파로 꽉 차 있던 길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길을 만드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곧이어 흑마를 탄 악불군과 담수련이 탄 마차가 나타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방주님,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방주님, 꼭 이기세요!”
“천호검신은 무적이다!”
곳곳에서 악불군을 향해 사람들이 소리를 쳤다.
수십 년 이래,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게 해 준 악불군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다시 지옥 같았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목소리에는 담겨 있었다.
마차의 뒤로 동정어옹을 비롯한 장로들이 나타나고 다시 천호사기 이대가 그 뒤를 따랐다.
흑석영을 비롯한 방주호법과 천호특별단은 변복한 채 척후 임무와 주위 경계를 하며 은밀하게 따르고 있었다.
악불군 행렬이 총단에서 나오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오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의 다섯 달 만에 모습을 보인 악불군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무림인에게 큰 변화가 생기기에는 긴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실지로 그의 눈에 보이는 악불군은 전에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그게 단지 느낌인지 아니면 진짜 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뭐지? 뭐가 달라진 거지? 이걸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선두는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지며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곧 포기했다.
뭔가 달라졌다고 보고서에 쓴다면 분명 무엇이 달라졌는지까지 써야 했는데, 그 역시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표 부장!]
[예!]
[악 왕야께서 태호로 출발했다고 황상께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양 대장!]
[예!]
[금의위들을 소집해라. 전서를 날리고 곧장 우리도 황도로 돌아간다.]
금의위 대장 양은천은 돌아간다는 말이 매우 기쁜 듯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황상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감시는 하고 있었지만, 이제 검신 칭호까지 받은 악불군을 감시하는 일은 그들에게 매우 신경 쓰이고 벅찬 임무였다.
‘다시는 이곳에 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오선두 역시 항주를 떠난다는 것이 홀가분한 듯 표정이 편해졌다.
* * *
“사부님, 사조님 괜찮으시겠지요?”
소걸아는 비무장 안으로 들어가는 여섯 명의 거지들을 걱정 어린 눈으로 보며 물었다.
제자가 많은 개방에서 본 대회로 직행할 수 있는 배정을 받은 사람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소걸아의 사조인 사해신개였다.
개방 최고의 고수가 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무 대회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따라줘야 했다. 십왕에 도전할 정도의 실력이 되지 않는 이상 최대한 많이 올라가는 것이 모두의 목표였다.
그러나 재수 없게 구천마황이나 혈해사황과 일찍 만나 싸우게 된다면 목표 달성은커녕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었다.
“개방의 제자로서 문파에 대한 보은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부님께서 죽음은 무림인의 숙명이니 혹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하셨다.”
말은 의연하게 했지만 신룡신개의 표정 역시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소림의 광천대사님이나 무당의 무상진인이 모두 사부님과 같은 연배다. 거기다 맹주님은 연세가 더 많으시다. 나이는 변명이 안 된다. 방주님께서 기다리시고 계시니 난 먼저 올라가 보겠다.”
“전 악 방주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따라가겠습니다.”
처음으로 마음에 맞는 친구가 생겼다며 좋아하던 소걸아였다. 악불군을 사귄 후, 그렇게 사고만 치던 소걸아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최고의 거지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어야 한다며 사조인 사해신개와 사부인 자신의 말도 잘 듣지 않던 그가 책임과 의무를 깨달은 것이다.
신룡신개는 악불군의 신상에 참변이라도 일어난다면 소걸아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충격이 될 것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라. 친구가 힘든 상황에 뛰어들 때, 옆에서 잘하라는 한마디가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사라지는 신룡신개를 보던 소걸아는 새삼 존경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부님께서 저런 멋진 말도 할 줄 아셨네?”
* * *
본 비무장으로 한 명씩 들어서면 허가증과 명부를 대조한 금의위 대장은 커다랗게 이름을 불러 주위에 있는 군웅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군웅들은 환호성으로 답을 했다.
특히 무림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초고수들이 입장할 때의 함성은 태호가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악명이 높은 사파의 고수의 이름이 호명되면 야유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왁자지껄하던 입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함성을 지르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는 초고수들의 등장이 시작된 때문이었다.
많은 초절정 고수들이 강력한 기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갔지만, 군웅들 전체를 떨게 만든 사람들은 역시 구천마황과 혈해사황이었다.
약 반 시진 정도 차이를 두고 나타난 그들은, 등장만으로도 그 많은 군웅들의 몸이 떨릴 정도로 패도적이며 소름이 끼치는 사악한 기운을 풀풀 날리며 모두에게 ‘역시!’ 무황이라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더구나 그들을 호위하듯 따라 들어가는 수하들 역시 군웅들이 보기에는 언감생심 쳐다도 보기 힘든 초절정 고수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마황과 사황이 저런 사람들일 줄은 몰랐네? 수하들도 대단한 것 같지 않아? 난 여기서도 오금이 저리는데, 저 수하들은 끄떡없이 버티잖아.”
“그냥 수하가 아니라, 본 비무에 참가하는 자들이잖아. 시시한 자들을 데리고 왔겠어? 그런데 천호검신은 왜 안 나타나지?”
군웅들이 누구보다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은 뜻밖에도 무황들이 아니라 악불군이었다.
그때 한쪽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