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48화>
448화. 개전(2)
“무림맹주님과 천호검신 악 대협께서 같이 오고 계시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단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기 위해서였다.
악불군이 무림맹주와 같이 오고 있다는 말은, 악불군이 무림맹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친분이 있다는 생각을 뇌리에 박히게 하기 충분했다.
악불군과 잠룡세가 간에 연관이 있다는 측천무후궁이 퍼뜨린 소문은 태풍이 될 것처럼 퍼져 나갔지만 결국 찻잔 속의 미풍으로 그치게 될 공산이 커졌다.
정파를 대표하는 천제무황까지 인정하는 정파인을, 누가 있어 감히 부역자랑 엮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천제무황과 악불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에서는 본 비무 참가자가 무려 열다섯 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백천학까지 비무에 참가했다.
사실 천무성궁의 간부들은 천제무황과 백천학이 동시에 출전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만약 현 궁주인 천제무황과 다음 대 궁주인 백천학, 둘 다 변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삼백 년 역사의 천무성궁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천학은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반드시 참가하겠다고 주장했고 천제무황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만큼 백천학의 무공을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호방의 출전자는 악불군 단 한 명이었다. 장로인 무림 사기는 모두 백대고수급의 고수들로 얼마든지 출전할 자격이 되었지만 아무도 참가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와아! 맹주님이시다!”
“천호검신이 오셨다!”
화가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나타난 그들을 본 군웅들은 열광하듯 환호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우리에게 환호하는 것은 이기라는 응원이다. 하지만 패배하면 멸시로 바뀌게 될 것이다.”
천제무황은 세간의 평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석변개(朝夕變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 제도 다치지 말고 끝에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악 형의 뒤만 열심히 쫓아갈 생각입니다.”
드디어 백천학과 악불군이 호형호제를 하기 시작한 듯했다.
드디어 그들까지 안으로 들어서자 금의위 대장이 연단에 올라와 커다랗게 소리쳤다.
“반 시진 후, 비무장의 문은 닫힙니다. 출전하실 분들은 빨리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내공이 깃든 목소리가 퍼져 나가자 군웅들은 최대한 비무를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 * *
“황상, 방금 악불군과 무림맹주가 비무장 안으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 거만한 노인네의 얼굴들을 드디어 볼 수 있겠구나. 망원통을 가지고 오너라.”
주원장은 황제의 위에 오른 후, 이미 한 차례 무황들에게 황궁에 오라고 소환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유백온은 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기 위해 정중하게 초청장을 보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주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두는 소환령에 따르지 않았다.
소환령을 따르면 황궁에 도착해 군신의 예로 인사를 해야 하는데, 황제가 되기 전 일개 강호 낭인에 불과했던 주원장에게 군신의 예를 갖출 생각이 그들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황실에 가장 순종적이라는 정파인 천제무황까지 답도 없이 따르지 않자 주원장의 무림에 대한 의구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망원통으로 비무장을 살피던 주원장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악불군의 모습에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저 아이하고만은 잘 지내고 싶었는데……. 쩝!’
주원장은 악불군이 자신의 심복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악불군이 자신의 심복이 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커다란 대붕이 비무장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보타검각의 영물 중 남은 천붕이었다.
“저게 뭐냐?”
주원장은 깜짝 놀라 물었다.
“말로만 전해지는 전설의 대붕새 같습니다.”
“대붕이 진짜로 존재했다니……. 저런 영물은 천자인 짐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욕심이 난 듯 급히 대붕을 향해 망원통을 눈에 갖다 댄 그는 입이 살짝 벌어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아직 천 길 공중 위에 있는 천붕의 등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기 때문이었다.
천 길 높이라면 초절정 고수들도 위험한 높이었다. 하지만 더욱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그다음에 전개된 상황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인영이 십 장 높이에서 뚝 멈춰 서더니, 거기서부터 마치 계단을 걷듯 천천히 걸어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한 무공을 지닌 주원장은 경신술도 제법 조예가 깊었다.
“능공허도인가? 아니지, 능공허도라 해도 저 높이에서 떨어지다가 그대로 멈추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의아한 듯 중얼거리던 그는 인영이 궁장을 입은 여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입에서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측천무후?”
망원통에 보인 여인의 옷 앞에는 측천무후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의 등장은 주원장만이 아니라 비무장에 모인 천하의 고수들조차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 정도의 공력이 있어야 저런 경신술을 발휘할 수 있을지, 누구도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한 실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무황이나 악불군보다 더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치자, 절벽 위 관망장에 있던 군웅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일 장쯤 공중에서 다시 멈추자, 예비 비무를 통해 본 비무에 참가한 여인 중 세 명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궁주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녀들은 이미 준비한 듯 바닥에 빨간 비단천을 깔았다. 그러자 사뿐히 천 위에 내려선 측천무후는 자신을 바라보는 군웅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오늘 저 멍청한 놈들을 한 명도 봐주지 말고 죽여라.”
무림의 최고 고수들만 모인 자리에서 그녀가 내뱉은 말은 실로 안하무인 그 자체였지만 여인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존명(尊命)!”
측천무후궁의 여인들과 싸우는 자들은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측천무후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금의위 대장을 보며 말했다.
“언제 시작할 거냐?”
“허허허허! 노부 평생에 저렇게 건방진 계집은 정말 처음이구나.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좋긴 하구나.”
크지는 않았지만 비무장은 물론 협곡 절벽 위 모인 수많은 군웅들까지 귀를 울리는 목소리에, 모두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이 목소리에 얼마나 엄청난 공력이 담겨 있는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측천무후와 마찬가지로 비무장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정식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 하늘에서 나타난 한 노인.
그는 지붕이 없는 가마를 타고 공중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사방을 둘러본 노인은, 천제무황과 구천마황 그리고 혈해사황을 보자 기분 좋은 듯 다시 커다랗게 웃어젖혔다.
“하하하하! 세월이 많이 흐르기는 했구나. 그 애송이들이 늙은이가 되어 있다니 말이다.”
혈우대마종이었다. 그는 아예 아무도 없이 홀로 나타났다.
이미 악불군에게 그의 등장에 대해 알고 있던 천제무황은 좀 덜 놀랐지만, 혈해사황과 구천마황은 벌떡 일어났다. 일 갑자도 전이었지만 혈우대마종의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혈우대마종! 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혈해사황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터져 나오자 순식간에 비무장과 관망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천년마교의 창시자인 천마와 더불어 고금오대마로 불리는 희대의 마종의 등장에, 주원장조차 들고 있던 망원통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죽지 않았다 해도 이미 귀천할 나이가 지나신 것으로 아는데, 뭐가 그리 미련이 많아 아직도 살아계십니까?”
천제무황이 의연하게 포권을 하며 물었다.
“내가 끝내지 못한 일이 있으니 죽을 수가 있겠느냐?”
“시시한 대회가 될 것을 걱정했는데, 그래도 싸울 만한 상대가 나타나니 심심하지는 않겠네요. 당신이 혈교의 교주인가요?”
모두가 놀랐지만 단 한 사람, 측천무후만은 혈우대마종의 등장을 반기고 있었다.
“네가 그 못된 년들의 대장이냐? 무던히도 본 교의 행사를 방해하더니 드디어 그 머리를 보이는구나.”
“호호호! 제가 못된 년들의 대장이라면 당신은 못된 놈들의 대장 아닌가요?”
측천무후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말을 받자, 혈우대마종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며 차갑고 뜨거운 공기가 중간에서 격돌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싸운 것도 아니고 단지 기가 부딪쳤을 뿐이었지만, 혈우대마종은 평생 만나지 못했던 적수를 만났음을 직감했다.
측천무후 역시 자신이 패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은 듯, 방금까지 보였던 천하를 오시하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유백온.”
“예!”
“혈교의 교주가 혈우대마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혈우대마종이라면 나이가 거의 삼 갑자에 가까울 텐데, 누가 있어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오늘 대진표는 좀 조정해야 할 것 같다.”
“어찌하시게요?”
“천제무황과 혈해사황의 대결을 취소하고 모두 혈우대마종과 싸우도록 조정해라.”
유백온과 담수련은 되도록 정파와 정파끼리는 싸우지 않도록 대진표를 만들기로 했었다.
그것은 되도록 많은 무림인들이 서로 죽이기를 바라는 주원장의 뜻과도 일치했다.
비무의 취지상 생사결을 원칙으로 했지만, 패배를 자인하거나 스스로 비무장을 떠나는 것까지 쫓아가서 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정파끼리 싸울 경우 죽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파나 마도가 정파와 싸우게 될 경우, 반드시 한 명은 죽는 그림이 그려졌다.
혈교와 측천무후궁 역시 마도로 분류가 되어 있었지만, 혈교의 교주가 혈우대마종으로 밝혀진 이상 그를 제거하는 것이 일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비 비무를 신청한 자가 이천 명에 달했지만, 예비 시험에서 죽은 자가 백 명이 넘었고 포기한 자들은 무려 천 오백여 명에 달하면서 막상 비무는 오백 명 정도가 치렀다.
죽거나 불구가 되는 자들이 속출했고, 또다시 포기한 자들이 이백여 명에 달하면서 막상 본 비무까지 올라온 자들은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본 비무에 참가할 자격을 얻은 자의 수가 이백여 명에 달했으니, 총 이백 오십여 명이 비무를 하게 된 것이다.
비무장은 태호변에 마련된 이십 개의 비무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평범한 비무대에서 승리한 무인들은 다음 비무장으로 옮겨 갔다.
두 번째 비무장은 경공술 시험 때와 같이 들쑥날쑥 박힌 검날 위에서 치르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날이 훨씬 더 날카롭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힘 조절을 못하면 검끝과 창끝은 그대로 발바닥을 뚫을 것이었다. 거기다 수시로 창이 바닥에서 튀어나오니, 이것은 비무인지 죽이기 위한 함정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위험한 비무장이었다.
그래도 두 번째 비무장까지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비무대에서 떨어져도 싸울 의지만 있으면 다시 뛰어 올라가면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벗어나거나, 떨어진 후 올라가지 않는다면 패배를 자인한 것이 되어 탈락이었다.
죽지는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비무장부터는 말 그대로 실전 생사결이었다. 무대도 없고 함정도 없었다. 암기며 독이며 어떤 수법도 가능한,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기량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대신 도망을 칠 곳이 없었다.
세 번째 비무장까지 올라갈 정도라면 대단한 고수여야 했다. 주원장이 원하는 대로 위험한 초절정 고수들의 수를 줄이기에 딱 좋았던 것이다.
둥둥둥둥둥…….
드디어 비무의 개시를 알리는 북이 울렸다.
“호명된 분들은 비무대에 오르십시오.”
각 비무대로 호명된 자들이 둘씩 올라갔다.
드디어 결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