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49화>
449화. 본선(1)
천호방 무인들의 군막 배치는 다른 군막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다른 문파의 군막은 비무를 잘 볼 수 있도록 넓게 퍼져서 배치되어 있었지만, 천호방은 계단식으로 판을 만든 후 중앙에 담수련과 사화가 앉고 그 주위를 천호방의 간부들이 지키듯 앉아 있었다.
구경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담수련의 호위에 더 신경을 쓴 배치였다. 거기다 만약을 대비해 백설조차 고삐도 묶지 않은 채 서 있었고,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적설이 하늘 위에서 그녀를 호위 중이었다.
악불군이 무엇보다도 담수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간부들이기에 가장 완벽한 방어진을 형성한 것이다.
“아가씨, 전 너무 불안해요.”
드디어 비무대로 무인들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흑란이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왜?”
“혈우대마종은 백여 년 전에 혼자서 전 무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전설의 고수잖아요? 거기다 측천무후라는 여인의 무공도, 제 눈엔 사람의 무공 같지가 않았습니다.”
비무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담수련은 슬쩍 흑란을 보며 물었다.
“네가 보기에 소군의 무공은 사람의 무공 같니?”
“방주님의 무공도 당연히 엄청나지요. 그러니까 명호도 검신이시잖아요.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가 없을 때는 솔직히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데……. 아가씨도 혈교의 교주가 혈우대마종일 줄은 예상 못 하셨을 거잖아요?”
“나나 소군이나 이미 알고 있었어.”
“아시면서 영웅대회를 그대로 진행하게 하신 거예요?”
듣고 있던 추국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녀들이 아는 담수련은 절대로 악불군이 위험할 일에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소군은 이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이젠 나도 말릴 수가 없구나…….’
악불군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담수련이 절실했다.
“이제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비무에 집중해 줘. 특히 소군이 올라오면 즉시 말해 주고.”
담수련은 망원통을 눈에 대며 사화의 입을 막았다.
무역하는 양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망원통은 엄청난 고가의 물건으로, 여간한 부자의 재산으로도 구입하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황실과 군부 이외의 인물들은 소지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하나 무공이 약한 담수련이 상당한 거리가 있는 관망장에서 비무를 보기 어려울 것을 짐작한 고철황은 자신의 보물창고에 모셔 놓았던 망원통을 부리나케 갖고 온 것이었다.
일견하기엔 예술품처럼 보여, 망원통이라 의심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물건이었다.
* * *
비무는 스무 개의 비무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기에 승패가 빠르게 결정되고 있었다.
사흘 밤낮을 싸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만, 보통 무림인들의 승패는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삼십 초 안팎에서 나는 법이었다.
더구나 한 번의 비무로 끝나는 것이 아닌 만큼, 체력의 소진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무인들이 최대한 빨리 비무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가장 강한 초식을 연발했고, 그런 탓에 대부분의 수법은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죽고 다치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비무장은 벌써 피가 난자하기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금의위 무사들은 죽는 사람이 나오면 재빨리 시신을 수거해 갔다. 다행인 것은 황궁의 의원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기는 한다는 것이었다.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가 나타나면서 관망장의 군웅들은 상당히 위축돼 있었다.
혈교와 측천무후궁에 대한 소문은 이미 강호에 파다했다.
하지만 그들의 실체에 대해 자세히 아는 무림인들은 각 문파의 핵심 인물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무림맹이 조직되면서 각 지역의 정파들이 재건되고 구천마성과 혈해마계, 거기다 떠오르는 신성인 천호방까지 세력을 넓혀 가자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혈교와 측천무후궁 정도는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백 년 전에 엄청난 혈겁을 몰고왔던 혈우대마종의 등장으로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심지어 그의 등장과 비슷한 압도적인 위용을 보인 측천무후도 있었다.
이제 모두의 관심사는 누가 십왕이 되느냐가 아니라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를 누가 이길 수 있느냐로 바뀌어 있었다.
백 년 전, 무황들의 합공으로도 죽이지 못한 혈우대마종이였다. 무황들 역시 예전의 무황들이 아니겠지만, 혈우대마종 역시 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일대일로 싸우는 생사결에서 혈우대마종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비무장을 주시했지만, 무황을 비롯한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는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부전승으로 다음 비무대로 옮겨 갔다.
상대가 모두 패배를 자인하고 비무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비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백천학과 붙는 자는 혈해사계의 장로인 유마진인이었다. 팽팽하게 싸울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뜻밖에도 백천학의 검이 고작 십 초 만에 그의 심장을 찔러 버렸다. 천제무황이 그를 믿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악불군 역시 상대가 포기하면서 결투 없이 다음 비무장으로 옮겨 갔다.
[궁주님, 저놈이 악불군입니다.]
첫 비무를 승리하고 먼저 이차 비무장에 와 있던 측천무후궁의 장로인 염화선자는 악불군이 나타나자 측천무후에게 전음을 날렸다.
측천무후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용모파기를 통해 어느 정도 얼굴을 익히고 있었고, 실지로 젊은 나이에 본 비무에 출전한 자들 중 그녀가 인정할 정도로 출중한 자는 악불군밖에 없었다.
[악불군.]
전음을 들은 악불군은 측천무후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천호방의 악불군입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용모파기보다 실물이 훨씬 낫구나.”
“궁주님께서도 제 추측보다는 아름다우십니다.”
순간 측천무후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살아오면서 그녀의 무공에 대한 칭찬은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외모에 대한 말은 어릴 때 전대 궁주가 그녀에게 ‘얼굴이 예쁘구나.’라고 한 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말을 남자에게 처음으로 들은 것이다.
“여기 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재미있구나. 사내놈에게 아름답다는 말까지 듣다니 말이다.”
“하지만 내면까지 아름다우셨다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넌 나의 내면이 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궁주님을 오늘 처음 뵈었는데 추한지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그동안 측천무후궁에서 천하에 끼친 해악을 생각해 보면 분명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본 궁이 해악을 끼쳤다는 것이나, 아름답고 추함의 기준 등은 모두 너희들의 관점일 뿐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겠군요?”
“그래도 따질 것은 따져야겠지. 그동안 네놈이 본 궁의 대업에 얼마나 막대한 손해를 끼쳤는지는 아느냐?”
“제가 아무리 큰 손해를 끼쳤다 해도 측천무후궁에서 수백 년간 무림에 끼친 손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너희들의 자업자득일 뿐이다.”
악불군은 측천무후와는 대화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악불군이 답이 없자 측천무후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본 후가 이런 천한 비무 대회에 나오기로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글쎄요? 제가 궁주님의 속까지 알 도리는 없지요. 하지만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각오는 아까 들었습니다.”
“그래,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본 무후의 손에 너희 사내놈들이 무참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보여 줄 생각이다.”
“저와 일찍 만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왜? 일찍 만나 빨리 죽을까 걱정되느냐?”
“제가 걱정하는 것은 궁주님입니다. 초반부터 저를 만나 패하시면 계획이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말대꾸는 아주 잘하는구나. 목이 잘리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기대해 보마.”
“일 갑자 전쯤에 무림 최고의 살수로 불리던 비영살신 어르신이 어린 여인에게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측천무후는 의아한 눈으로 반문했다.
“……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아느냐? 천하에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을 텐데?”
“비영살신께서 당시 죽지 않고 돌아오셨다는군요.”
“천하제일 살수라고 해서 수련에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열 명이 넘는 살수 놈들이 겨우 삼 초식 만에 다 죽어 버리더구나. 그래서 불쌍해서 한 놈은 조금 더 살 수 있도록 해 줬는데 끈질기게 돌아간 모양이구나. 뭐, 그래 봐야 곧 죽었을 게다.”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진짜 범인이 측천무후라는 것을 안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궁주님을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어차피 죽여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아서, 하나 더 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본 후의 인내심을 자꾸 시험하지 말거라. 그렇게 건방을 떨면 비무고 뭐고 당장 죽일 수도 있다.”
[둘 다, 재롱을 부리는 꼴이 아주 귀엽구나.]
그때, 둘의 귀에 천둥 같은 위력의 음공이 파고들었다.
혈우대마종이었다.
그는 측천무후와 악불군이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을 쳐다보자 재밌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측천무후궁이라고 한 것을 보니, 혹시 시조가 측천무후냐?]
[너 따위 노괴(老怪)가 함부로 입에 올리실 분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년마교의 유지를 이어받는 노부는 말할 수 있지. 측천무후는 천년마교의 교도로서 황후까지 만들어 준 본교의 배덕자니 말이다.]
[배신하신 것이 아니라, 고루한 늙은 놈들이 망쳐 놓은 천년마교를 쇄신하시려 한 것이다. 감히 측천무후님의 뜻을 거역하고 끝까지 저항하다 멸교한 것은, 여자는 교주가 될 수 없다는 네놈들의 잘못된 이기심 때문이 아니더냐?]
[재밌구나. 노부와 싸우게 되면 최선을 다하거라. 네년에게만은 조금도 용서가 없을 것이다.]
[이미 죽어 백골이 됐어야 할 나이에 뭐 하러 다시 세상에 나타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참히 죽어 나가는 꼴을 보이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본 무후 역시 천년마교의 잔당들은 살려 둘 생각이 없으니 너야말로 각오하고 있거라.]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모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던 둘이기에, 서로를 향한 기세에서도 조금의 양보는 없었다.
그리고 혈우대마종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말이 안 통하는 계집이로군.]
둘의 대화를 듣던 악불군은 측천무후가 천년마교의 교도였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교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제 초청을 받아들여 주신 것에도 크게 감사합니다.]
혈우대마종은 포권을 하는 악불군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더니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고작 다섯 달밖에 안 지났는데,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구나? 혹시 기연이라도 만났느냐?]
[제게 기연은 교주님을 만난 것이지요. 그때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혈우대마종과 악불군은 손속 한 번 나눈 적이 없었다.
[노부가 도움을 줬다니 다행이구나. 그래 무엇을 배운 것이냐?]
[바둑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만류귀종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우쳤습니다.]
[……노부가 너를 너무 얕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래 얼마나 많이 깨우쳤는지 기대해서 보마.]
악불군은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에게 정중히 다시 포권을 하고는 정파인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일차 비무를 통과한 정파인들은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악불군과 측천무후 그리고 혈우대마종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궁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악 방주.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한 거냐?”
상당히 힘든 싸움을 한 듯 몸에 많은 피를 묻힌 사해신개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피는 다행히 사해신개의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얘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저분들이 비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를 죽이려고 왔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그거야,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인데……. 혈우대마종이라니, 정말 걱정이구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최선을 다해 수습해야지요. 그런데 어르신은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둥둥둥둥둥…….
그때 다시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