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50화 (450/472)

<천검지애 450화>

450화. 본선(2)

꽤 많은 수가 출전했지만 이십 개의 비무대를 한 번에 사용하니 생각보다 빨리 첫 비무가 끝났다.

첫 비무로 죽은 자는 사십여 명에 달했다. 패한 자들의 수가 백이십 명이 넘는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적은 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상당히 큰 부상을 입은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이기긴 했지만 비무 중 심한 상처를 입거나, 상처가 심하지 않아도 자신감을 잃고 포기한 사람도 오십여 명에 달했다.

결국 두 번째 비무장에 들어선 자들은 칠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이차 비무장에 도착한 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져 있었다.

“자, 그럼 이차 비무를 시작합니다. 검창비무대에는 모두 번호가 적힌 깃발이 있습니다. 이름과 번호를 부르면 곧장 번호가 있는 비무대로 달려가 비무를 시작하면 됩니다.”

“대진표는 누가 짠 거냐?”

그때 혈해사황이 상당히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혈해사계에서 같이 온 수하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겨우 두 명만 일차 비무를 통과했다. 강한 상대들과 맞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진표가 상당히 불공정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여러분들의 명성과 무공 수준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황상께서 직접 짜고 계십니다.”

금의위 대장의 말에 혈해사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제가 직접 짜고 있다면 불만을 토로하기는 어려웠다.

혹시나 이런 불만이 나올 경우 어떻게 답을 할지까지 미리 유백온에게 배워 온 금위대장은 부언을 했다.

“황상께서는 무림 십왕은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분이 봉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왕에 들 만한 분들이 일차나 이차 비무에서 만나 탈락을 하고 실력이 부족한 분이 운이 좋아 십왕이 된다면 권위가 세워지겠습니까?”

한마디로 대진표를 조작하고 있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었다.

하나 금의위 대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지라, 혈해사황은 더 이상 대진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무황과 혈우대마종이 일찍 결투를 벌여 무황이 탈락한다면 실질적인 최강자 중의 한 명이 순위 밖으로 밀리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의 불만이 없자 금의위 대장은 이름과 함께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호명된 사람들은 같이 불린 번호가 있는 비무대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이름이 불렸다. 상대는 구천마성의 모대립이었다.

[성주님, 어떻게 할까요?]

모대립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즉시 구천마황에게 전음을 보내 포기 여부를 물었다.

그녀가 나타날 때 보인 경신술을 미루어 자신이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천마황은 고개를 저었다.

모대립은 구천마성의 삼인자였다. 그런 그가 싸워 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면 구천마성의 체면에 큰 흉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네 지위나 명성을 생각한다면 패배할지언정 포기는 안 된다. 몇 초식이라도 싸워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비무대 밖으로 피해라. 그게 포기보다는 낫다.]

최소한 싸우기도 전에 포기했다는 오명도 피하고 죽음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알겠습니다.]

모대립은 최선을 다해 몇 초식 부딪쳐 보기로 하고는 비무대 위로 올랐다.

하나, 그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뒤를 이어 비무대로 몸을 날린 측천무후는 비무대에 발을 딛지도 않고 그대로 모대립을 향해 짓쳐 나갔다.

예의에는 좀 어긋났지만 규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측천무후 정도 되는 고수가 이런 기습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 못 한 모대립은 당황한 와중에도 초절정 고수답게 즉시 무기를 들어 방어에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일 초라기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너무 간단히 그의 목이 잘렸기 때문이었다.

아직 호명을 기다리고 있던 고수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측천무후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들은 무림에서 초절정 고수로 불리는 최고의 무인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모대립을 쉽게 이길 수 있는 고수만 최소한 열 명 이상은 될 것이었다. 하나, 일 초에 죽이는 것은 또 얘기가 달랐다.

혈우대마종조차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떠오를 정도였다. 협곡 위 관망장에 비무를 보던 군웅들 역시 경악한 표정을 한 채 모두 입을 닫고 말았다.

모대립 같은 마왕급의 마두를 일 초에 죽이는 것은 무황들도 어렵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짜 빠르다. 저런 속도와 예기라면 호신강기는 물론 철포삼도 그대로 잘릴 거야. 방어를 해야 하나, 피해야 하나……?’

모두가 결과에 대해 경악을 하고 있을 때, 악불군 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그녀가 보여 준 검초를 생각하며 어떻게 상대할지는 고심하고 있었다.

모두를 경악케 한 측천무후가 모두에게 비소를 보이며 다음 비무장으로 떠나자 다시 호명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무황들과 혈우대마종의 상대가 된 자들은 포기했다. 너무 강한 상대와 싸우면, 비무대를 벗어날 기회조차 없음을 측천무후에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은 모대립에게서 본 것이다.

“천호검신, 나백귀왕 삼 번!”

드디어 악불군이 호명되었다. 상대는 혈해사계의 나백귀왕이었다. 모대립과 맞먹는 무공을 지닌 그는 사파답게 악랄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자였다.

악불군은 상대가 누구건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나백귀왕은 잠시 머뭇거렸다.

태양천자까지 죽인 악불군과 싸우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삼십도 안 된 악불군에게 싸워 보지도 않고 포기를 한다면 수십 년간 쌓아온 그의 명성은 곤두박질칠 것이 뻔했다.

혈해사황은 마치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한번 싸워 보자!’

나백귀왕은 도를 굳게 잡고는 비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대로 짓쳐 나가며 공격에 돌입했다. 측천무후처럼 기습적인 공격을 한 것이다.

“크어어억!”

그리고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 벌어졌다.

나백귀왕이 악불군의 검에 일 초 만에 심장을 찔린 것이다. 기습 공격이 아니라 마치 악불군의 검에 나백귀왕이 스스로 뛰어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관망장에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천호검신!”

“천호검신!”

모대립이 측천무후에게 일 초 만에 죽자, 관망장의 군웅들은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모대립의 실력과 거의 비슷한 나백귀왕을 악불군이 일 초에 죽이자 희망을 본 것이었다.

이 정도면, 악불군이 측천무후나 혈우대마종에게 밀린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환호를 보내던 군웅들이 악불군의 명호를 연호하기 시작하자, 천제무황은 탄복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시기적절하게 정파인의 사기를 올려 주다니, 역시 시의(時宜)를 잘 읽는 아이야.’

관망장은 물론 지금 비무에 출전하고 있는 정파인들의 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었다. 이런 중차대한 결투에서 사기가 좋고 나쁨은 실력 발휘에 매우 크게 작동을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악불군이 한 번의 결투로 사기를 확실하게 진작시킨 것이다.

연호하는 군웅들을 향해 몇 번이나 포권을 한 악불군은 금의위의 안내를 받으며 삼차 비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망원통으로 비무를 세세히 살피던 주원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일차 비무를 보며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무림인들의 무공에 상당히 경악하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무림인들의 결투를 보았지만 지금 같은 초절정 고수들 사이의 대결은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생사결이다 보니 그 강도는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수들 대결에서 승리하고 이차 비무장에 도착한 자들은 무림 백대 고수 안에 드는 초절정 고수라는 것을 주원장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측천무후와 악불군이 그런 자들을 일 초에 제거한 것이다.

아직 무황들이나 무황을 능가하는 혈우대마종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음에도, 벌써 주원장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유백온.”

“예, 황상.”

“지금 이 주위를 십만 황군이 에워싸고 있지?”

“예.”

“그들을 동원해서 여기 있는 무림인들을 전부 제거할 수 있겠나?”

“지금 비무장에 있는 무림인들은 무공을 모르는 황군이 잡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역도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황상의 용심에 마땅치 않은 점이 많으시겠지만, 무림인들은 달래서 끌고 가는 것이 나라를 안정되게 운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같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제언이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무림인들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 수 있었다.

주원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 해도 사교인 혈교나 황실의 전복까지 꾀하는 측천무후궁은 없애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무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황군이 제거하려 든다면 엄청난 물자와 재정 그리고 많은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나라는 다시 어지러워질 것이고, 군부의 입김이 강해져 오히려 황권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림 세력은 무림 세력에게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입니다.”

“흠…….”

숙고하던 주원장은 다시 망원통을 들더니 비무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음을 결정하려면 좀 더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었다.

‘그래, 저 무황이라 불리는 노인네들과 혈우대마종은 얼마나 대단한지 보고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구나.’

담수련과 유백온의 계획대로 주원장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 비무가 어떤 결과로 끝날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주원장의 심경의 변화는 무림의 평화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 * *

드디어 삼차 비무장의 문이 열렸다.

비무를 끝내고 모인 사람들의 수는 이십이 명에 불과했다.

일차와는 달리 이차 비무는 모두 실력이 비슷했다. 당연히 결투는 더욱 치열했고, 승자와 패자도 없이 둘 다 부상을 입은 채 끝난 비무도 세 곳이나 되었다.

또한 이차 비무의 승리로 문파에 대한 체면치레는 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비무를 포기한 자들도 여럿 있었다. 거기에는 개방의 사해신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십이 명의 면면은 역시 거대 문파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림의 광천대사와 무당의 무상진인 그리고 화산의 매화신검은 당연히 삼차까지는 갈 것으로 예상이 되었던 자들이었지만, 남궁세가의 남궁세황과 하북 팽가의 팽우황은 조금 의외의 인물이었다.

무림맹은 천제무황과 백천학, 그리고 태웅왕이 통과를 했다.

구천마성은 구천마황과 태상호법인 흑천마왕과 금갑마인이 통과했고, 혈해사계는 혈해사황과 귀안마군만이 통과를 했다.

악불군과 혈우대마종 그리고 측천무후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고, 그 외에도 문파에 속해 있지는 않았지만 백대고수 중 최상층에 있는 정사마의 고수 여섯 명이 골고루 포진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정파인이 많이 남은 것은 주원장이 사파와 마도에게 불리하게 대진표를 짰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포기나 패배 선언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물론 상대가 배려해 주어 살려 준다면 모르지만, 끝까지 죽이겠다고 나올 경우 일차, 이차와는 달리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특히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를 만나는 자는 거의 죽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불군은 백천학을 보며 수고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천학 역시 미소로 받았다.

이제부터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절대자급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한 수의 실수가 그대로 황천행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둘의 서로에게 보내는 미소는 힘이 되기에 충분했다.

두 번의 비무를 모두 싸우지 않고 올라온 무황들도 이제 슬슬 준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부전승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삼각가량의 휴식 시간이 끝나자 금위의 대장이 대진표를 들고 다시 나타나 크게 소리쳤다.

“그럼 호명하겠습니다.”

드디어 삼차 비무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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