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52화>
452화. 십왕(2)
정파인들이 이토록 응원하는 이유는 백천학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었다.
최근엔 악불군에게 밀리며 그 명성이 빛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정파인들에게는 다음 대의 희망으로 불리는 최고의 기대주였다.
거기다 정파의 마지막 보루로 불리던 천무성궁의 다음 대 후계자라는 점도 정파인들에게 주는 믿음이 컸다.
그런 그가 여기서 패해 죽기라도 한다면 정파로서는 실로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곽등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무공이 분명 마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더욱 백천학이 이기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 * *
‘저 어린놈은 누구지?’
삼차 비무장은 커다란 목책으로 가려져 있어, 위에 있는 관망장 안에서는 결투 장면을 볼 수 있으나, 비무를 기다리는 대결자는 볼 수 없었다.
무공을 탐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비무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눈으로 만 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의 움직임과 소리, 그리고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어떤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 환히 알 수 있었다.
혈우대마종은 백천학 정도는 천마종이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물론 쉬운 상대가 아님은 그가 삼차 비무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비무가 시작되자 백천학은 그가 느낀 실력 이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백천학 스스로가 뽐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무공은 거의 천제무황에 육박할 정도였다.
혈우대마종은 백천학과 천마종이 자신의 눈앞에서 싸우고 있는 듯 머리에 그려 내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 더 강한 실력을 가지고도 패하다니……!’
분명 지금 백천학과 천마종은 아직 누가 우세하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혈우대마종은 이미 천마종이 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직접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기와 흐름 그리고 소리만으로 이미 승부를 예상한다는 것은, 그가 실전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혈우대마종의 예상대로 천마종은 백천학의 검에 옆구리를 찔리면서 급격하게 수세에 몰리더니, 곧 목울대가 검에 의해 잘리면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수천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북무림의 암중 세력으로 대단한 힘을 휘두르던 천마종의 죽음은 실로 초라했다.
곽등이라는 무명의 고수로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백천학이 십왕의 자리에 올라가자 관망장에는 환호가 울려 퍼졌다.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로 인해 침체되었던 분위기가 악불군의 활약과 백천학의 십왕 등극으로 완연하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호명에 다시 장내는 조용해졌다.
측천무후가 불렸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태웅왕이었다.
무림에서 본격적인 활동한 적이 거의 없는 천무사왕은 십대고수에는 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천무사왕이 십대고수보다 약할 거라고 생각하는 무림인들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태웅왕은 천무사왕의 맏형 격으로 천무사왕 중 무공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먼저 삼차 비무장으로 들어간 태웅왕은 손에 수투를 착용하였다. 여간한 상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다고 소문난 비웅갑이었다.
도검조차 뚫지 못한다는 장백산 불곰의 가죽으로 만든 비웅갑은 장갑 전체에 미세한 돌기가 수십 개가 붙어 있었다.
권의 대가인 그의 주먹은 검이나 칼과 부딪쳐도 조금의 상처도 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주먹에 수투까지 끼면 가히 천하 일절로 손꼽히곤 했다.
거기다 일 권은 집채만 한 바위도 가루를 만들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그런 그가 비밀 병기라 할 수 있는 비웅갑을 꼈다는 것은, 그만큼 측천무후를 인정하고 최대한 주의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준비도 무용(無用)했다.
측천무후의 기습 공격까지 염두에 둔 태웅왕은 시작부터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비무가 시작되었다.
원나라의 일급 수배자로 이름을 올린 그는, 태양천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으로 유명했다.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는다는 그의 신조는 태양천의 무사들조차 태웅왕이라면 고개를 저을 정도로 공포의 존재였다.
결투의 경험 면에서는 오히려 천제무황보다 더 많았던 그가, 측천무후에게 죽는 데는 고작 일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공격도 방어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허리가 반으로 잘려 즉사한 것이었다.
관망장의 군웅들은 구천마성의 모대립이 일초에 죽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따금 가느다란 탄식과 공포의 한숨이 간간이 들릴 정도였다.
태웅왕의 죽음에 백천학은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일변했다. 삼차 비무의 승자들은 싸우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천무사왕은 공식적으로 천무성궁의 호법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천제무황에게는 아우들이었고 백천학에게는 숙부나 마찬가지였었다.
승리의 호명을 받은 측천무후는 승리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 가더니 비웃는 표정으로 모두가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저따위 실력들을 가지고 오로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하를 좌지우지해 왔다는 것이 정말 어이가 없군!”
그녀의 말에 백천학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낌새를 눈치챈 매화신검이 그의 팔을 잡았다.
[백 공자, 참으시게. 지금 저 여 시주는 어떻게든 분란을 만들 생각이네. 은원은 시합이 끝난 후에 풀어도 늦지 않을 걸세.]
[……죄송합니다.]
백천학은 그의 말에 간신히 분노를 삭이며 참고 말았다.
다음 비무는 무상 진인과 태산철검이었다.
무상 진인은 무당의 최고수이니 삼차 비무까지 올라올 만했다. 하지만 스스로 태산철검이라고 밝힌 중년인은 곽등과 같이 무림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였다.
그렇지만, 예비 비무를 거쳐 삼차까지 올라왔으니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원시천존!”
무상 진인은 인사도 없이 거무튀튀한 녹슨 철검을 곧장 자신에게 겨누는 태산철검을 보자, 도호를 외며 검을 꺼내 들었다.
검 주위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것은 그가 무당의 태을선천강기를 끌어올렸다는 증거였다.
‘반드시 이겨 몰락한 문파를 다시 세워야 한다.’
태산철검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자세를 바꿨다.
그의 이름은 형두목으로, 태산파의 직전 제자였다.
정파와 사파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던 태산파는 삼백 년 전 태산철검성이라는 최고의 종사가 나타나면서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전성기를 구가했었다.
하지만 태산파의 전성기를 이끌어 냈던 태산철검성이 죽은 후, 그의 무공을 제자들이 잇지 못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원나라 침공 당시 태양천에 의해 멸문하고 말았다.
다행히 당시 장문 제자였던 원창선이 태산철검성의 무공을 수록해 놓은 비급을 가지고 나오면서, 문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희망의 끈은 잡을 수 있었다.
원창선은 태산파를 살리기 위해서는 태산철검성의 무공을 익혀야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이십 년간 홀로 무공을 수련했다.
그러나 그의 무재로는 태산철검성의 무공을 재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무공을 재연하는 데 실패하고 나이까지 많이 먹은 원창선은 희망을 잃은 채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그때 한 소년이 목검을 가지고 좀 놀아도 되냐고 물었고, 그는 그러라고 허락했다. 예전 같으면 손도 못 대게 했겠지만 이미 그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
소년은 태산철검 형두목이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사는 화전민의 자식으로, 이따금 이곳에 놀러 와 원창선이 수련하는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보다 가곤 했었다.
원창선은 그의 부모에게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형두목이 와도 방해만 하지 않으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창선이 실의에 빠져 근래 수련을 하지 않자 자신이 목검을 들고 그의 앞에서 연습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수련을 받아 본 적도 없이 단지 보기만 했고 재미삼아 연습한 것인데, 놀랍게도 수십 년간 수련한 원창선보다 더 완벽한 초식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원창선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힘을 다시 북돋아 줄 희망을 본 것이었다.
자신은 못 했지만 제자를 통해 꿈을 이루어 보자는 희망이었다.
이후, 사십 년간 형두목은 태상철검성의 무공을 십성 이상 익혔다. 그가 산을 내려온 것은 원나라가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였다.
그리고 곧 영웅대회에 대해 듣고는 곧장 참가 신청을 했다.
무상 진인을 보는 그의 눈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투지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세상일은 투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무에서 연승하며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그의 무재가 탁월했고, 태산철검성의 무공 또한 대단한 절기임에는 확실했다.
하지만 무당의 절기 역시 태산철검의 무공에 부족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태산철검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태양천과 수십 년에 걸쳐 싸우면서 충분하게 축적된 실전 경험이었다.
시작은 상당히 평이했다.
태산철검은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기 전에 언제나 상대의 무공을 탐색했다. 경험의 부족을 조심성으로 보충한 것이다.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움을 특징으로 하는 무당의 무공답게 무상 진인 역시 유연한 자세로 그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각 정도가 지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태산철검성의 최고 절기인 철검칠참은 상대에게 찌르고 베기를 일곱 번이나 쉬지 않고 몰아치는, 검법으로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연쇄공격법이었다.
당연히 공격은 거칠고 강력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그의 철검칠참에 걸려서 빠져나온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무공에도 서로 물리고 무는 천적이 있었다.
바로 그의 철검칠참과 무당의 태극칠성양의검이 그랬다.
강함을 강함으로 받아치거나 피하는 방법으로 와해하려고 할 경우, 철검칠참은 실로 무서운 수법이었다.
하지만 부드러움으로 감싸 안거나 비켜가게 할 경우 강력함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태산철검은 경험이 부족했다.
자신의 수법이 잘 안 먹힌다고 느꼈다면 빨리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했지만 태산철검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무상 진인이 쉽게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막히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태산철검의 공격이 약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무당의 검식의 약점 중 하나가 공격조차 부드러워 날카로움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삼십 초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비무가 십 초에서 이십 초 사이에 결판이 난 것에 비하면 상당히 긴 대결이었다. 그리고 차츰 태산철검의 공격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각 초식은 대략 삼 식에서 육 식 길게는 십 식까지 검을 변화시켜야 했다. 그래서 공력이 약한 쪽에서는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는 것이 철칙이었는데, 초식이 길어지며 태산철검이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고수들은 상대의 초식이 느려지는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 법이었다.
“윽!”
태산철검은 침음성을 터뜨리며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의 왼쪽 어깨는 금세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태산파의 절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태산파의 제자 같은데, 이쯤에서 패배를 자인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어떻겠소? 시주의 무공을 보니 십 년 안에 빈도를 능가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태산파를 다시 일으켜야 하지 않겠소?”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 이번 비무의 규칙이었다. 패배를 자인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치욕으로 여기는 무림인의 특성상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규칙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산파를 아십니까?”
처음으로 태산철검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부님께 들은 적은 있소이다. 정사지간의 자세를 취하기는 했지만 산동에서는 대단한 존경을 받았던 문파라고 알고 있소.”
무상 진인의 말에 태산철검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두 손을 들어 포권을 했다.
“선배님의 조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패배를 자인합니다.”
어차피 불리한 상황에서 부상까지 당한 이상 버텨봐야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하나 그는 자신에게 태산파의 중흥을 부탁하고 죽은 사부의 유지를 받들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삼차 비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존자가 나왔다.
곧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록 십왕에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태산철검의 명성은 오늘 이후 엄청나게 떠오를 것은 자명했다.
태산철검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연단에 오른 금의위 대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 역시 예상과 다른 대진표 때문인 듯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크게 두 명의 이름을 호명했다.
순간 관람장은 물론 비무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이 커졌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이름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