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53화 (453/472)

<천검지애 453화>

453화. 격돌(1)

금의위 대장이 호명한 사람은 천제무황과 염화선자였다.

염화선자는 측천무후궁의 호법으로 궁주를 제외하면 가장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둘의 대결이 아니었다.

그럼으로써 마지막으로 남는 두 사람의 대결도 같이 결정됐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남은 두 사람.

혈우대마종과 악불군이었다.

담수련이 마지막 순간까지 차마 적지 못하고 망설인 이유였다.

“금의위 대장!”

천제무황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이 금의위 대장을 보며 크게 외쳤다.

“왜 그러십니까?”

“혈우대마종과는 노부가 싸우기로 되어 있다네. 대진표에 뭔가 잘못이 있는 것 같으니 대진표를 다시 한번 보게.”

마지막으로 네 명이 남았을 때, 당연히 자신이 혈우대마종과 싸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천제무황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살짝 섞여 있었다.

금의위 대장은 대진표를 다시 보더니 말했다.

“대진표에는 분명 천제무황과 염화선자가 결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악 방주는 누구와 싸우도록 되어 있단 말인가?”

“당연히 혈교의 교주와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혈우대마종과 노부는 구원(舊怨)이 아직 남아 있네. 더구나 악 방주는 아직 젊은데 어찌 가장 나이가 많은 혈우대마종과 싸운단 말인가? 바꿔 주게.”

“천제무황께서는 이 대진표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십니까? 황상께서 직접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무림에서의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황상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구원이라니요? 개인적인 원한을 풀라고 영웅대회를 개최한 줄 아십니까?”

그 순간 천제무황의 귀로 악불군의 음성이 흘러들어갔다.

[어르신, 황상이 정하셨다면 더 이상의 반론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최대한 버텨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패배를 자인하고 도망을 치겠습니다. 맹주님께서는 그때 혈우대마종이 저를 쫓지 못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악불군의 전음을 들은 천제무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많은 만남은 없었지만 그가 느낀 악불군은 절대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자네가 이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니겠지?]

[섶을 들고 불 속에 뛰어드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제무황은 지금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더 이상 고집 부리기는 어려웠다.

삼차 비무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이미 열리고 염화선자가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어린놈들이 목숨 아까운 줄은 모르고 서로 죽으려 하다니, 그 배짱만은 기특하구나. 그런데 황제에게 대진표를 바꿔 달라고 떼쓰는 것보다는 너희 둘이 합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구나. 어차피 한 명씩 덤빈다면 시간이 좀 차이가 날 뿐, 오늘 다 죽는다.”

보고 있던 혈우대마종은 먼저 싸우겠다고 대진표까지 바꿔 달라는 천제무황의 행동이 치기처럼 보이는 듯 비꼬듯 말했다.

무림의 최고 어른 중 한 명인 그였지만 혈우대마종의 눈에는 여전히 예전의 애송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말 잘했소. 어차피 오늘 당신과 나 둘 중의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이오.”

혈우대마종에게 한마디 던진 천제무황은 악불군을 안쓰러운 눈으로 잠시 보더니 비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혈우대마종은 비소를 지으며 악불군에게 말했다.

“정파 놈들은 겉으로는 언제나 저렇게 걱정을 하고 위하는 듯 행동을 하지.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위협한다 싶으면 표변해서는 당장 죽이려고 한다. 너무 정파를 믿지 말거라.”

혈우대마종의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대놓고 나쁜 짓을 하는 마도나 사파보다는 정파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정파에서는 무슨 일을 할 때, 최소한 명분은 따지니까요.”

“아직은 어리니 명분이 뭔가 공정함을 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마도나 사파는 최소한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정파 놈들은 명분을 내세워 나쁜 짓마저 합리화한다.”

“그러는 어르신은 정파의 문제점을 지적해, 나쁜 짓을 하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 같습니다. 문제점은 고치면 되지만, 나쁜 짓은 멈춘다 해도 거기에 대한 책임은 지셔야 합니다.”

‘설득 자체가 안 될 놈이로군.’

혈우대마종은 악불군이 사파와 마도에게 매우 안 좋은 선입견이 있다는 것을 느끼자 검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가 계획한 일이 어긋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와아아아!”

그때, 관망장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잠깐 대화하는 사이 천제무황과 염화선자의 승부의 결판이 난 것이다.

압도적인 천제무황의 승리였다.

비무장에 들어간 지 이 각이 채 안 되었으니 매우 빠르게 결판이 난 셈이었다.

그렇다고 염화선자가 약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결판은 빨랐지만 승부가 나기까지의 상황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천제무황이 이긴 것이다.

그런데 정파의 최고 지도자인 천제무황의 승리임에도 환호성은 매우 빨리 잦아들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은 마지막 남은 두 사람에게 향했다.

금의위 대장이 연단에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 * *

천호방의 군막은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다. 모두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고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 간부들이 동정어옹과 조그맣게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가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유 태사령님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았는데, 왜 방주님께서 혈우대마종하고 싸우게 된 걸까요?”

담수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터라 사화도 함부로 묻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둘의 대결이 코앞에 다가오자 연화가 결국 울먹이는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연화야, 소군이 지금 안 싸우면 혈우대마종과 싸울 일이 없을까?”

주먹을 꼭 쥐고 긴장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였지만 말투는 생각 외로 차분했다.

“싸울 일이 있긴 있겠지만, 그래도 첫 상대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잖아요?”

‘그래, 피할 수 있었어…….’

담수련은 중얼거리며 악불군과의 대화를 상기(想起)했다.

측천무후는 악불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삼차까지 혈교의 교주나 무황과는 대결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측천무후와 혈우대마종을 삼차 비무에서 싸우도록 대진표를 짜려고 했다. 아무리 조건이라지만 한 명의 강적을 손 안 대고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날리는 것은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약속은 무림인들에게 목숨과도 같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지만, 대의를 위해 한 번쯤은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악불군의 생각은 달랐다.

약속하고 그녀가 나타났는데, 그 약속을 깬다면 정당성이 훼손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악불군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담무룡의 안전까지 담보 받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영향력이면 담수련까지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담무룡은 달랐다. 수십 년에 걸쳐 너무 많은 원한을 쌓아 온 때문이었다.

담무룡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담수련의 아버지였고, 그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으며 무공까지 가르쳐 준 사부와 같은 존재였다.

물론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음을 악불군도 이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받은 은혜가 은혜가 아닌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방법은 담무룡의 죄를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의 공을 세우는 일이었다.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자신과 혈우대마종이 삼차 비무에서 대결할 수 있도록 대진표를 짜서 유백온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담수련도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악불군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도 냉정하게 사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 악불군이 싸우지 않는다 해도 결국 악불군과 혈우대마종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둘이 부딪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운이 좋아, 혈우대마종과의 싸움을 피한다 해도, 이번에는 담무룡을 지키기 위해 무림맹과 싸우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악불군의 성정상 담무룡이 무림맹에 쫓기게 된다면 절대 모른 척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쫓기다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악불군이 혈우대마종을 죽일 수만 있다면 문제는 단번에 해결될 수 있었다. 거기다 측천무후까지 악불군이 죽인다면 실로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악불군이 혈우대마종을 이길 가능성이 너무 낮다는 것이었다.

그때 악불군은 그녀에게 정확히 말했다.

“아가씨, 제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혈우대마종과 저의 승패는 오대오로 보입니다. 혈우대마종이 저를 경시한다면 오히려 제가 이길 확률은 육으로 높아집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 있게 한 말을 되뇌며 말했다.

“소군은 이길 거야. 그리고 어차피 이긴다면 이곳에서 첫 상대로 이기는 것이 가장 좋아.”

담수련의 말에 사화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비장하기까지 한 그녀의 말에서 어쩌면 진짜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을 읽은 것이다.

* * *

이미 마지막 비무 상대는 정해져 있지만 금의위 대장은 또렷하게 호명하기 시작했다.

“혈교의 교주 혈우대마종과와 천호방의 방주 천호검신 악불군! 삼차 비무장으로 들어가십시오.”

인세에 다시 나오기 어렵다는 희대의 마인과 무림 역사상 가장 빠르게 최고인의 소리를 듣는 신성 간의 대결.

군웅들과 주위를 지키는 십만의 구문제독부의 군사들까지 이십 만에 가까운 사람이 운집해 있었지만, 일생에 다시 볼 수 없는 엄청난 대결에 누구 한 사람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건 이기건 혈우대마종과 제일 먼저 싸운다는 자체로 악불군은 이미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이 되고 있었다.

악불군이 반드시 자신이 가장 먼저 혈우대마종과 싸워야 한다고 담수련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효과 때문이었다.

가마에 탄 채 공중으로 떠오른 혈우대마종은 악불군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며 전음을 보냈다.

[네가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아니, 이번 비무에서 내가 패배를 자인할 수도 있다. 어떠냐?]

혈우대마종의 제안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패배를 자인할 수도 있다는 대목은 파격 그 자체였다.

혈우대마종은 수십 년 전부터 천년마교의 성골인 혈 공자를 키워 왔고, 그들 중 가장 빼어난 능력을 보인 네 명을 뽑아 무림을 사등분하여 관장하도록 해 왔었다.

태양천의 압박 속에서도 그들은 사대마전을 키우면서 혈우대마종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었다.

그러나 원체 뛰어난 자질을 지녔던 혈우대마종의 눈에는 모두가 차지 않았다.

결국 그의 염려대로, 근거지가 알려지자마자 마전들은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악마종은 악불군에게 죽었고 아수마종은 구천마황에게 죽었다. 혈해사계에게 패한 후 섬서로 자리를 옮긴 혈마종은 살아는 있었지만 연락조차 쉽지 않았다.

그가 가장 기대했던 천마종조차 백천학의 급습으로 허무하게 무너진 이후, 혈우대마종은 후계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때문이었다.

아직은 멀쩡해 보이지만 삼 갑자라는 나이는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조금도 이상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가 천마종에게 영웅대회의 출전을 종용한 것도 다음 후계자가 되기 전에 천마전을 잃은 실책을 만회하라는 의미였다.

당연히 천마종이 십왕에 오를 것이라는 자신감도 한몫을 했다. 이제야 세상에 기지개를 켠 혈교에 십왕이 둘이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이없게 죽음을 당했으니, 아무리 세상의 모든 풍파를 다 겪은 혈우대마종조차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몇 달 전 악불군을 만나고 온 후, 계속 악불군에 대해 생각해 왔다. 악불군에게서 대종사의 기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악불군이 자신의 제자였다면 혈교는 이미 벌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단지 그랬으면 했던 그의 상상은 천마종의 죽음으로 현실화가 되어 버렸다.

자신이 얻은 모든 명성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악불군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받아 주겠단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악불군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를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제가 교주님께 충성을 맹세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쯧! 쯧! 쯧! 마지막 제안이었건만,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구나.]

악불군의 전음을 받은 혈우대마종은 아깝다는 듯 혀를 차더니 삼차 비무장으로 천천히 날아 들어갔다.

악불군은 천륭검을 손에 꽉 잡은 후, 그의 뒤를 따라 삼차 비무장으로 날아갔다.

바야흐로 이번 대회 최대의 격돌이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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