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54화>
454화. 격돌(2)
삼차 비무장으로 들어선 악불군은 약 백 장 밖에 준비된 승리자 좌석에 앉아 있는 천제무황을 비롯한 정파인사들에게 포권을 했다. .
백 장이면 보통 사람은 얼굴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거리였지만 그들은 세세한 표정까지도 모두 서로 볼 수 있었다.
‘걱정이 많으시군.’
악불군은 자신을 보는 정파 인사들의 표정을 보고는 환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직전 악불군은 혈우대마종 덕분에 만류귀종에 대해 확실히 깨닫게 되어 감사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감사였다.
무공도 아닌 바둑에서 악불군은 그동안 스스로 익히거나 머리에서 구상하던 잡다한 여러 무공을 합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혈우대마종에게 죽지는 않을 자신이 생겼다.
악불군의 지금 계획은 무승부로 가는 것이었다. 백 초를 겨눈 뒤에도 생사가 판가름 나지 않는다면 무승부로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생사결을 백 초 이상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끼워 넣은 규칙에 불과했지만, 악불군은 그것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승패를 가르지 못한다면, 천하인들에게는 엄청난 쾌거였고, 혈우대마종에게는 실질적인 패배나 다름이 없었다.
비무자들이 처음 설 곳에는 깃발이 꽂혀 있었다.
혈우대마종은 가마에 앉은 채, 깃발 위에 떠 있었다. 계속 가마까지 탄 채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은 그의 내공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높다는 방증이었다.
[아직 기회는 있다. 네가 내 제안을 따른다면 난 네게 혈교의 모든 세력뿐만 아니라 엄청난 재화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악불군이 깃발 앞에 서자 혈우대마종은 다시 한번 전음을 보냈다.
그만큼 지금 그가 아쉽다는 것을 악불군은 직감할 수 있었다.
[마치 제게 혈교의 교주 자리까지 주실 듯 말씀하시는군요?]
[줄 듯이 아니라, 네가 노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당장이라도 네게 혈교의 교주 자리를 물려주겠다.]
[제가 그러마고 하고 나서 약속을 어기면 어쩌시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만큼 세상을 오래 살면, 자신이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는 아이와 지키지 않는 아이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는 법이다.]
[그렇다면 제가 그 제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혜안에 보이지 않으십니까?]
[……안타깝게도 그것도 보이는구나.]
[그럼 이런 대화가 굳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몇 갑자를 살아온 노부가 처음으로 욕심나는 아이를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하는데 회한이 생기지 않으려면 그래도 한번 말은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마시고, 이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초야에 묻혀 마음 편히 사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그 말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렷다?]
[저를 이렇게 인정해 주시는 분을 죽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서, 한번 권유는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하하하! 말도 귀엽게 하는구나. 내 손에 정말 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그중에서 너는 더욱 특별하게 기억에 남을 거 같구나.”
죽인다는 말을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악불군의 머리를 언뜻 스쳐 갔다.
악불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혈우대마종은 말을 이어 갔다.
“최대한 버티고 싶다면 시작보터 최선을 다하여라. 탐색한다거나 내공을 아끼려다가는 몇 초식 견디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고언 감사합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자 혈우대마종의 몸에서 핏빛의 선홍색 강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천제무황을 비롯한 세 명의 무황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
백 년 전 혈우대마종이 처음 무림에 발을 디뎠을 때, 무림인들은 그의 무공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무공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검붉은 강기로 온몸을 휘두른 그는 무림을 없애 버리겠다고 천하에 출사표를 던졌다.
측천무후궁의 이간책에 말려 혼란의 극을 달리던 무림은 혈우대마종에게 대책 없이 각개격파를 당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가지 무공만을 익히지 않았다.
일절이라 할 수 있는 장에 맞으면 그대로 몸속의 장기가 부서졌고, 권에 맞으면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심지어 검과 도까지 등에 메고 다니며 상대에 맞춰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검붉은 강기였다.
혈우대마종과 싸우는 자들은 그의 공격에 죽기 전에 강기에 온몸이 부서져 죽는 자들이 더 많았다.
후일 그의 모든 무공이 천년마교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펼치는 강기가 바로 전설의 천마가 사용했다는 혈황개세천마혈강(血皇蓋世天魔血罡)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개세의 마공답게 그 파괴력이 무공 사상 최고라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다 시간이 갈수록 강기의 색은 붉은색이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혈황개세천마혈강(血皇蓋世天魔血罡)은 내공이 높아질수록 더 붉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시기도 혈우대마종이 무림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나서였으니, 무림이 얼마나 대비를 못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이가 틀어져 원수 같이 싸우던 무림의 각 파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이미 너무 큰 피해를 입어 고수들이 많이 남아 있지 못했다.
만약 무황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림은 혈우대마종의 호언대로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었다.
무황들은 자신의 문파의 최고수들만 데리고 나와 무림의 남은 고수들과 함께 혈우대마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당시 무황들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무공이 바로 지금 혈우대마종이 펼치고 있는 혈황개세천마혈강이었다.
지금의 무림에선 천마혈강이라 알려진 그것이었다.
그토록 치를 떨던 천마혈강을 다시 눈앞에서 보았으니, 놀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 색이 완전 핏빛의 선홍색이라는 것은 천마혈강이 십 성 이상으로 완벽해졌다는 의미였으니, 놀라움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순간, 모두의 눈에 또 다른 놀라움이 나타났다.
검을 뽑아 든 악불군의 몸에서도 강기가 뿜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악불군의 황금빛 호신강기는 이미 무림에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의 색이 황금색이 아니라 매우 특이했다.
황금색과 붉은색 그리고 검은색의, 마치 각기 다른 색의 실을 꼰 듯 강기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혼탁한 색에서 성취가 늘면 점점 강렬한 단색으로 변하는 것은 웬만한 고수라면 다들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그런데 세 가지 강기가 본연의 색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한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실로 기사(奇事)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허! 정말 놀라운 아이로고…….”
천제무황은 악불군의 강기를 보자 탄복한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리고 구천마황와 혈해사황도 뭔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혈우대마종과 싸울 때, 그들은 천마혈강 때문에 매우 고심했었다.
혈우대마종과 무황들 간에 이미 여러 차례 싸움을 한 터였다. 네 명의 합공, 그것도 후일 절대자가 될 무황들의 합공은 정말 대단했다.
거기다 익힌 무공들이 하나같이 천하가 인정하는 절세의 무공이니, 초식면으로는 혈우대마종보다 우의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들의 공세도 혈우대마종의 강기를 뚫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다른 무림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황이 죽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 낸 방법이, 각기 다른 위력을 지닌 무황들의 강기로 천마혈강의 한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혈우대마종 같은 고수를 한 곳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라지망을 펼친 상황에서 혈우대마종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다시 시도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천마혈강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균열을 구문황이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 넣으면서 간신히 혈우대마종의 혈겁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무수히 싸워 가며 알아낸 천마혈강의 약점.
지금 악불군이 서로 다른 강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사용한 방법과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욱이 따로따로 공격하며 한 곳을 타격했던 그들과는 다르게 악불군은 혼자서 한꺼번에 펼치기 때문에 성공 확률도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회상한 무황들이 악불군에게 탄복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탄복은 탄복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또 달랐다. 당시 혈우대마종의 천마혈강은 완벽하지 않았고, 무황은 네 명이 합공을 하면서 서로 공력까지 보완했었다.
하지만 지금 혈우대마종이 펼치는 혈황개세천마혈강은 완벽해 보였다.
더구나 지금 상대는 악불군 혼자였다. 그의 내공으로 천마혈강에 타격을 줄 수 있느냐는 누가 보아도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혈우대마종의 강기가 마치 거미줄이 퍼지듯 갈라지며 악불군을 향해 뻗어 왔다. 하지만 악불군의 앞 반 장 앞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강기가 담긴 검막이 악불군의 앞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악불군의 소매에서 강력한 강선이 혈우대마종을 향해 날아갔다. 천호시였다.
혈우대마종에게 천호시가 통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악불군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연달아 천호시를 열 개나 날렸다.
천마혈강이 천호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역시나 천호시는 맥없이 튕겨 나가거나 심지어 가루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튕겨 나가는 곳은 호신강기고 가루가 되는 곳은 반탄강기다. 똑같은 강기인데 작용은 다르다. 신기하구나.’
누구라도 긴장되고 두려워할 상황이었지만, 악불군은 새로운 무공을 발견한 것이 매우 기쁜 듯 오히려 혈우대마종의 무공에 빠져들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내가 이미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거라고 말해 줬거늘, 장난이나 치다니!”
수많은 초절정 고수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천호시를 혈우대마종은 장난감 취급을 하고 있었다.
혈우대마종의 천마후가 비무장을 넘어 관망장까지 울리자, 모든 군웅들은 물론 모두를 오시하며 앉아 있던 측천무후의 표정까지 굳게 만들었다.
가마를 탄 채 공중에 떠서 천마혈강이라는 개세의 마공을 펼치면서 천마후까지 펼친다는 것은 혈우대마종의 공력이 측정 불가라고 할 정도로 높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관망장의 군웅들과는 달리 비무의 승리자들의 모든 시선은 혈우대마종에게만 쏠려 있었다.
악불군이 패배할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그들이 혈우대마종과 대결하게 된다면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할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커다랗게 외친 악불군의 몸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배교의 은밀잠영에 이형환위를 접목해 만든 무공이었다.
배교의 무공은 대부분 사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배교 비전에서 본 무공들은 사술에 가깝기는 했지만 엄연히 내공을 필요로 하는 무공들이었다.
다만 환술이 가미되어 사술처럼 보일 뿐이었다.
악불군이 혈우대마종과의 싸움에 대비해 배교의 무공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것은, 정상적인 무공으로는 내공에서 월등한 그를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사라지고 곧 공중에서 천륭검이 혈우대마종을 향해 날아갔다. 이기어검술이 악불군이 택한 첫 번째 공격 초식이었다.
혈우대마종의 표정에 살짝 변했다. 악불군의 이기어검도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나, 그가 놀란 것은 검이 날아오는 방향을 그가 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천마혈강은 그의 주위로 약 십 장 정도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는 삼십 장이 넘는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검이 날아온 곳은 약 이십 장 거리이니, 그가 악불군이 있는 곳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이놈 봐라?’
혈우대마종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천륭검은 너무 어이없게 튕겨 나갔다.
이기어검하면 천호검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무림인들에게 경외감을 주던 악불군의 이기어검이 이렇게 쉽게 무력화된 적은 처음이었다.
‘태양천주보다 많이 강하다. 정상적으로는 내가 이기기 힘들어.’
악불군은 혈우대마종의 무공이 자신의 예상을 웃돌자 차분히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